프린스턴 대학에서 박사학위 받음

관리자
2017-1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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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린스턴 대학에서 박사학위 받음


나는 하버드대학에서 석사과정을 마치고 고국으로 돌아가고 싶었으나 나의 성격을 아는 부친은 나더러 조금만 더 있으라고 편지를 써 보내왔다. 그 흥분된 시기에 내가 한국에 있었더라면 나는 결과를 불문하고 무슨 일을 했을지 모른다. 그래서 나는 학업을 계속하기로 하고 겨울학기 초에 뉴욕에 있는 유니온신학교에 기숙하면서 그곳에서 강의를 좀 듣고 동시에 콜롬비아대학에서 석사학위 과정을 밟기로 했다.


나는 기숙사의 방을 배당받고 학기가 시작되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때 유니온신학교는 뉴욕시내 다운타운의 동부[동남부]에 있었고 콜롬비아대학은 업타운[북부]에 있었는데, 이 두 학교를 매일 다닌다는 것은 퍽 힘든 일이었다. 매일 붐비는 지하철을 타고 다니며 시내 동쪽에서 서쪽으로 갈아타고 하는 일은 도무지 구미가 당기는 일이 아니었다.


그런데 어느 날 나는 [우연히] 장로교 선교부 사무실에서 홀(Emest F. Hall) 목사를 만났다. 그는 옛날에 한국에 선교사로 나가 있었는데, 당시에는 장로교 선교부의 서기의 한 사람으로 있었던 것이다. 그가 나더러 뉴욕에서 무엇을 하고 있느냐고 묻기에 나의 계획을 말했더니. "당신은 유니온신학교에 갈 수 없소. 프린스턴으로 오시오"했다. 그래서 나는 "나도 뉴욕에 있기를 그리 원치 않소. 만일 프린스턴으로 갈 수 있는 길이 있다면 그곳에 가고 싶습니다."라고 했다.


그 다음날 아침 나는 홀씨가 프린스턴에서 보낸 속달편지를 받았다. 그는 왕복기차표와 기차시간표를 함께 보내면서 프린스턴 역에서 나를 기다리겠다고 했다. 그는 나를 기다리고 있다가 프린스턴신학교의 [교장] 어드맨(Charles Erdman) 박사에게 데리고 가서 면접을 시키고 프린스턴대학원의 원장인 웨스트(Andrew F. West) 박사에게 데리고 갔다. 그래서 나는 프린스턴신학교 기숙사에 살면서 신학에 관한 강좌 몇 개를 택하고 프린스턴대학에서 박사과정을 밟게 되었다. 이렇게 계획을 바꾼데 대해서 나는 후회해본 적이 없다. 프린스턴 시절은 나의 학창시절의 가장 즐거운 시기였다.


어드맨 박사는 나에게 그렇게도 친절했다.[어드맨 박사는 나에게 그렇게 좋은 친구가 되어 주었다.] 그가 나를 위해 베풀어준 몇 가지의 혜택은 내가 평생 잊을 수가 없다. 웨스트 대학원장도 나에게 헌신적인 친구가 되어주어 내가 대학원 과정을 성공적으로 밟을 수 있도록 모든 것을 돌보아 주었다. 무엇보다도 더 [기뻤던 것은] 우드로우 윌슨 총장과 그의 가족이 나에게 그렇게 친밀한 친구들의 되어 주었고 그들의 한국과 한국선교에 대해 보여준 관심이었다. 그들은 나를 격려하여 주었고 내가 준비하고 있던 사업에 대해 희망을 주었다.


이상한 일이기는 하지만 웨스트 대학원장과 윌슨 총장은 새 대학원 건물을 위한 프록터(Proctor)씨로부터의 기부금 건을 에워싸고 신랄하게 다투고 있었고, 결국 그 건은 윌슨씨를 프린스턴에서 몰아내 백악관으로 가게 만들었지만, 나는 두 분의 우정을 [똑같이] 즐기고 있었다. 그들은 나의 감옥시절의 경험, 그리고 내가 준비하고 있는 장차의 사업에 대해 [늘] 관심을 보여 주었다. 그 때는 윌슨을 민주당의 대통령후보로 지명한 민주당 전당대회가 볼티모어에서 열렸을 때였다. 윌슨씨는 나를 뉴저지 주지사 오글맨(Ogleman, 후에 상원의원)에게 소개하면서 '한국의 교주'라고 했다. 윌슨 총장과 그의 부인은 이상하게 한국문제에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역주 ㅡ 윌슨 박사가 대통령후보로 지명된 것은 1912년이었다. 우남은 1910년 10월에 귀국하였다가 1912년 4월말에 미국으로 들어갔었다.)


1910년 6월에 나는 "미국의 영향을 받은 [국제법상의] 중립'이라는 국제법에 관한 나의 박사논문을 끝마쳤다. 그 후에 웨스트대학원장이 이 논문을 출판하였는데, 제1차 세계전쟁 당시 나는 중립무역에 대한 권위자로 인정되었다. 논문의 인세로 나는 1달러80센트 또는 2달러25센트짜리 수표를 받곤 하였는데, 나는 아직도 그 수표들을 기념품으로 어디에 가지고 있는 줄 안다.


1910년 6월에 있은 졸업식에서 나는 윌슨 박사로부터 철학박사학위를 받았다. 그 졸업식은 우드로우 윌슨 박사가 프린스턴대학 총장으로서는 마지막으로 참여했던 졸업식이었다.

(역주 ㅡ 윌슨 박사는 그 후 뉴저지의 지사로, 그리고 대통령으로 정계에 나섰다.)


그 날이 나의 준비단계를 종말 짓는 날이었는데, 나는 슬픈 감정을 느꼈다. 한국은 내가 나가서 일을 하여야 하는 나라였다. 그러나 그 나라는 [일본에게 병합되었으므로] 나의 나라가 아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