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인 고문 '스티븐스' 사살

관리자
2017-1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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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인 고문 '스티븐스' 사살


제2고

그때 나의 생각으로는 일본인들이 기독교 선교 사업을 못하게 할 수는 없을 것이고 내가 기독교 교육 사업에만 전념하고 있는 이상 내가 하는 일을 방해하지는 않을 것이라는 것이었다. 그래서 나는 한국에서 할 일을 위해 나 자신이 잘 준비해야 한다고 결심하였다. 그때부터 나는 조지워싱턴대학을 착실하게 다녔다. 그리고 나는 주일학교, 청년회 모임, 선교사들의 모임 등 워싱턴 시내와 기타 미국동부지역의 각 도시에서 자주 강연을 하였고, 그때마다 받은 돈으로 생계를 유지했다.


영어에 대해서는 무슨 학문적인 수준에 도달하려고 해본 일이 없다. 나의 원하는 바는 그저 독서력이나 얻어서 영어책들을 한국말로 번역해 내는 것이었다. 나는 그렇게 하는 것이 한국 사람들을 지적으로나 정신적으로 갱생시키는데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이라고 생각했었고, 그것이 나의 한국의 장래에 대한 소망이었다. 그래서 그때부터 아주 최근까지 나의 모든 저작은 한국말로 이루어졌었다.


1907년 6월 나는 조지 워싱턴대학에서 학사학위를 받았다. [당시 32세] 그 가을에 나는 하버드대학원에 입학했는데, [고국에서는] 일본인들이 한국정부의 각 부서를 [하나씩 하나씩] 틀어잡고 있어서 공부에 몰두하기가 참으로 힘겨웠다. 그리고 그 겨울에 두 명의 한국인이 샌프란시스코에서 데오도어 루즈벨트 대통령의 친구인 스티븐스(Stevens)를 세인트 프란시스(St. Francis)호텔 앞에서 사살했고 바로 그 전에 한국의 애국지사 안중근이 시베리아의 하얼빈에서 일본의 거물정치가인 이토 히로부미(이등박문)을 사살했다. 스티븐스는 어버린 대학의 졸업식이었고 미국에서는 퍽 영향력이 강한 사람이었다.


일본이 한국을 보호국으로 만들려고 할 때 그들은 미국인들의 반감을 살까 두려워하며 스티븐스를 외부의 고문으로 채용하고 탁지부의 고문이었던 영국인 브라운(J. Mcleary Brown)을 대치케 하였었다. 브라운은 마술적인 힘(Magnetic Power)이 있는 사람으로서 모든 외국 사람들이 그를 높이 [평가하고] 존경하였을 뿐만 아니라 그는 미국정부와 영국정부가 일본의 한국침범을 허용하는 정책을 반대하는 사람이었다.

(역주 ㅡ 브라운은 1893년에 해관총세무사로 임명되어 1897년까지 시무하다가 친러파의 등장으로 물러가고 노인 알렉세프가 탁지부 고문으로 임명되었는데 그 다음해(1898년)에 알렉세프는 파면되고 브라운이 복직되었다. 1904년에는 일본인 목하전종태랑이 탁지부 고문관으로 들어앉고 스티븐스는 외부고문으로 임명되었다.)


그리하여 일본은 브라운을 제거하고 스티븐스를 고문관으로 앉혔는데, 그는 한국에 해로운 정책을 시행하고, 또 일본의 한국에 대한 자비로운 통치는 한국 사람들에게 둘도 없는 혜택이라는 등 자극적인 성명을 신문에 발표하곤 했었다. 이러한 선전을 위해서 일본은 스티븐스를 미국에 파송하였는데, 그는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하자 신문기자회견을 통해서 일본이 한국을 통치하는 것은 한국 사람들을 위해서 제일 좋은 일이니까 미국사람들은 일본의 하는 일을 도와주어야 한다고 발표하였던 것이다. 이에 흥분한 한국 사람들은 스티븐스가 머물고 있는 세인트 프란시스 호텔에 대표단을 보내 그의 성명을 철회하라고 요구했으나 그는 거절하였고, 그러자 그의 호텔방에서는 난투가 벌어졌었다. 그 후에 그가 외출을 하기 위해 자동차를 타려고 할 때 두 한국청년이 다가와서 그를 쏘아 죽여 버린 것이다. 그중 한 청년은 도주했고 또 한 청년은 경찰에 붙잡혔다.

(역주 ㅡ 여기에 기술한 스티븐스사건의 내용 ㅡ 즉 스티븐스가 총을 맞은 장소와 장인환, 정명운 의사들의 체포경위 ㅡ 에는 다소 착오가 있으나 사건 전모에 대한 기술은 정확하다. 김원용 저 '재미한인 50년사'(1969년). 318-321면 참조)


붙잡힌 청년은 형무소에서 동정적인 대우를 받았고, 내 기억에는 10년형을 받았다. 하얼빈과 샌프란시스코에서 있은 이 두 살해사건은 일본의 선전기관들이 한국 사람들을 흉도들이고 최악의 악당들이라고 묘사하는데 대대적으로 이용되었다. 나는 그때 캘리포니아 주에 갈 일이 있었는데, 일본의 선전에 영향을 받은 모든 사람들은 한국에서나 교회에서나 한국 사람을 대하는 것을 두려워하였다.

(역주 ㅡ 김원용씨에 의하면 장인환의사의 재판을 위해 통역할 사람이 필요하여 이승만을 초빙하였는데, 그는 통역을 할 수 없다고 하며 다시 동부로 돌아갔다고 한다(전게서 326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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