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윤정의 배반과 친일적 분위기

관리자
2017-1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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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윤정의 배반과 친일적 분위기


조반을 먹자마자 우리는 공사관으로 갔다. 김이 2층에서 내려오자 내가 "김선생, 지금은 당신이 맡은 일을 할 차례요"하고 말했더니 그는 그리 좋아하지 않으면서 "이선생, 나는 모국정부의 허락을 받지 않고는 그것을 보낼 수 없소."라고 했다. 나는 놀라면서 "김선생, 그거 무슨 말씀이오. 당신이 어떠한 약속을 했었는지 기억나지 않으시오? 그리고 그 약속을 지킨다는 조건하에 그 자리에 임명되었다는 사실을 잊으셨고"하고 대들었지만 아무리 이치를 따지고 협박을 해봐야 소용이 없었다.


윤씨와 내가 아침 내내 그와 논쟁을 하자 그의 부인과 두 아이가 나타났는데, 김씨 부인이 하는 말이 "이선생, 당신이 우리 넷을 모두 죽이더라도 정부의 명령이 없이는 우리는 아무 일도 할 수 없습니다."하고 하는 것이었다. 나는 아이들에게 "너희들은 너희 아버지가 지금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 모르고 있지만, 너희 아버지는 너희들의 자유를 팔아먹고 있다. 너희들은 이제 너희 아버지가 너희들을 어떤 노예로 만들 것인가 곧 보게 될 것이다. 너희 아버지는 너희들의 나라를 배반하고 너희들을 포함한 전 민족을 배반하고 있는 것이다. 나는 너희 아버지가 이 공사관을 일본사람에게 넘겨주지 못하게 할 것이다. 그러기 전에 나는 이 건물을 불살라버릴 것이다"하고 했다. 그리고는 나와 버렸다.


다음날 아침 우리는 공사관을 또 찾아갔는데, 김은 내가 공사관 건물을 불살라 버리겠다고 했다면서 공사관을 보호하기 위해 경찰관을 부르겠다고 했다. 그리고 그는 흑인소사더러 문을 잠그고 우리를 다시는 들어오지 못하게 하라고 지시했다. 우리는 문을 나와 버렸지만 솔직히 말해서 분을 참기가 힘들었고 같이 갔던 한국청년 3명이 폭행을 하려는 것을 막느라고 고심했다.


는 햄린 박사와 니드햄 박사에게 피서지로 편지를 보내 이 사람의 마음을 돌리도록 부탁을 했다. 그러나 그들은 김씨가 본국정부로부터 지시를 받기 전에는 어떤 행동도 취하면 안 된다고 단호한 입장을 취했다. 물론 미국대통령이나 정부와 전국의 소위 유력자들은 모두가 친일적이었다. 1882년 체결한 한미수호조약은 한낮 어리석은 외교적 제스처에 지나지 않았고, 한국인들이 그 조약에 기대를 걸었던 것은 어리석고 순진한 탓이었다.


그때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란 그저 실상을 완전히 적어서 한국 사람들에게 알리는 일뿐이었다. 각처에 있는 한국 사람들이 김에 대해 반감이 어찌나 강했던지 그가 무슨 도지사로 임명되어 귀국길에 나섰을 때 해외에서 한국 사람에게 변을 당할까 두려워 비밀행동을 취할 정도였다. 그는 공사관을 일본인에게 넘겨주고 갔다.


김시는 얼마 후에 장남(Frank)만을 마운트 허만 고등학교에 남기고 한국으로 돌아갔는데, 그는 후에 펜실베니아 대학을 졸업했다. 그리고는 그의 부친의 권유를 받아들여 한국으로 돌아갔는데, 물론 그 프랭크는 일본치하에서 한국 사람들의 어떠한 압박을 받아야 했던 지를 모르고 있었다. 그는 아마도 미국에서와 같이 자유를 누릴 수 있으리라고 생각하고 돌아갔을 것이다. 그러나 가서 몇 주일이 안되어 자기는 그곳에 살 수 없다는 것을 알고 될 수 있는 대로 빨리 떠나려고 했으나 그는 떠날 수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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