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승만 박사의 독립운동 지도사상(양동안 교수)

관리자
2017-1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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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만 박사의 독립운동 지도사상

양동안 (한국학중앙연구원 교수)

1. 머리말

이승만 박사가 독립운동을 전개함에 있어서 어떤 사상에 입각하여 활동했는지에 관해 이 박사 자신이 기술해놓은 자료는 아직 발견되지 않았다. 따라서 이 박사의 독립운동 지도사상은 그의 독립운동 행적에서 추출할 수밖에 없다. 이 박사의 독립운동 행적에 근거하여 그가 독립운동 과정에서 준수했던 운동원칙, 즉 그의 독립운동의 지도사상을 추출해보면 실용주의, 통합주의, 민주주의, 반공주의 등 4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이 박사는 독립운동의 전과정을 통해서, 그리고 해방 후 우리 민족의 독립국가를 건국하는 작업을 전개함에 있어서까지 항상 이 4가지 원칙을 그의 지도사상으로 삼고 활동해왔다.

2. 실용주의

이 박사는 매우 실용적인 정치인이다. 명분 때문에 갑론을박하며 시간 허비하는 것을 매우 싫어했다. 한 예를 들면, 1948년 6월 대한민국 건국헌법 제정 당시 국회의원들이 헌법을 심의함에 있어서 국호문제를 놓고 갑론을박하며 시간을 낭비하자 이 박사는 “국호가 좋은 것으로 정해진다고 해서 나라가 발전하는 것이 아니다. 건국을 서둘러야 하는데 국호문제로 시간을 허비해서는 안 된다. 우선 대한민국으로 국호를 정하고 후일에 가서 더 좋은 국호가 있으면 그것을 고치도록 하자”고 설득하여, 국호논쟁을 종식시키고 대한민국을 국호로 정하도록 유도했다. 실은 이 박사가 남한에 정부를 수립하자는 제안을 맨 먼저 했던 것도 그의 탈명분론적 실용주의에서 비롯되었다고 말할 수 있다. 북한에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라는 단독정부가 설립되어 공산화를 위한 변혁조치를 급속하게 진행시키고 있고, 한반도 통일정부 구성을 협의하는 미소공동동위원회는 무기 휴회되어 언제 재개될 지 알 수 없는 상황에서 모든 정치인들이 통일정부 수립이라는 명분에 구속되어 남한의 민족정부 부재상태를 방치하고 있을 때, 이 박사는 정치생명의 위험을 무릅쓰고 우선 남한에 정부를 세우고 그것을 기반으로 통일정부 수립을 추진하자고 제안했던 것이다.

이 박사는 독립운동을 전개함에 있어서 시종일관 이러한 실용주의 정신에 입각하여 활동했다. 독립을 가져오는데 어떤 투쟁방법이 가장 효율적인가, 외국사람들에게 우리 민족의 독립을 지원해달라고 호소하는데 있어서 무엇이 효과적인가를 우선적으로 생각하며 독립운동을 전개했다.

독립운동세력들 가운데는 명분, 감정, 국제공산주의운동의 사주 등의 요인으로 인해 무장군사투쟁이나 폭력투쟁을 주장하는 세력이 많았다. 이 박사의 실용주의 사고는 그러한 주장과 부합하지 않았다. 당시 우리 민족의 독립운동세력의 빈약한 역량을 생각할 때 우리 민족의 독자적 역량으로 독립을 쟁취한다는 것은 전혀 불가능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일본을 상대로 무장투쟁을 전개한다거나 폭력투쟁을 전개하는 것은 빈약한 독립운동 역량과 독립운동가들의 생명만 축낼 뿐 독립 쟁취에는 아무런 효과를 나타낼 수 없었다. 현실적으로 생각할 때 당시의 여건에서는 외교활동을 통해 강대국을 움직여 독립을 가져오도록 하는 것이 가장 효과적이고도 유일하게 가능한 방법이었다.

그런 까닭으로 실용주의자인 이 박사는 비폭력 외교활동을 자신의 독립운동의 주된 방침으로 선택했다. 이 박사는 실용주의적 관점에서 외교활동에 중심을 둔 자신의 독립운동 방략을 결정하자, 그 방면으로 집중적인 노력을 전개했다. 요즈음 말로 ‘선택과 집중’의 전술을 구사한 것이다.

그는 주요 국제회의가 개최될 때마다 빠지지 않고 회의를 찾아가 한국문제를 논의해달라고 청원했다. 미국에 구미위원부를 설치해놓고 미국 조야에 한국문제에 대한 관심을 환기시켰다. 또 미국정부를 상대로 임시정부를 승인해달라고 거듭해서 청원했다.

이런 일들은 모두 다 상대방으로부터 문전박대의 멸시와 푸대접을 받으며 하는 일이어서, 인간적으로는 대단히 불쾌하고 피곤한 일이었다. 보통사람들도 이런 개인적으로 소득 없는 일로 인해 경멸과 푸대접을 받으면 크게 속상해서 도중에 그만두기 십상이다. 이 박사처럼 고국의 국민 가운데 최고의 선각자이며, 미국에서도 최고의 대학인 하버드대학과 프린스턴대학을 졸업한 정치학박사인 그가 그런 자존심 상하는 대우를 받았을 때 그가 내면적으로 겪는 심리적 고통은 매우 컸을 것이다. 그러나 이 박사는 그 길이 조국의 독립을 이끌어낼 수 있는 유일한 길이라고 믿고 집요하게 그런 자존심 상하고 피곤한 일들을 해냈다. 강한 애국심과 사명감이 없고서는 불가능한 일이다.

3. 외교중심 독립운동의 실적

이 박사가 외교중심 독립운동을 전개한 실적은 화려하다. 이 박사는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임시대통령으로 추대되기 전부터 민족독립을 위한 외교투쟁에 나섰다. 그가 외교투쟁에 나선 최초의 투쟁대상은 제1차 세계대전 종전 후 그 뒤처리를 위해 1919년 1월부터 파리에서 개최된 강화회의였다. 그는 이 회의에 참석하여 한국의 독립을 호소하려 했다. 그러나 미국정부가 여권을 발급해주지 않아 파리 강화회의에 가지 못했다.

파리에 가지 못한 이 박사는 한성임시정부(대한공화국)의 집정관총재(대통령)에 추대된 후 대한공화국 대통령의 자격으로 문서를 통해 외교투쟁을 전개했다. 그는 파리강화회의 의장인 프랑스 수상 클레망소와 미 영 불 등 열강국들의 정부에 공문을 보내 한국에 완벽한 자율적 민주정부가 탄생했으며 자기가 그 정부의 대통령으로 선출되었다는 사실을 통고했다.

이 박사가 이때 집정관총재라는 직함을 사용하지 않고 대통령이라는 직함을 사용한 것에 대해 당시에나 오늘날에나 논란이 많다. 그러나 객관적으로 생각해보면, 이 박사가 대통령 직함을 사용한 것은 실용주의적 선택이었으며 크게 비난할 것이 못된다. 집정관총재에 가장 가까운 영어 단어는 president이고 민주공화제 정부의 수반은 통상 대통령으로 호칭한다는 점을 생각한다면, 그리고 외국인들에게 대한공화국 임시정부가 수립되었음을 알리면서 그 수반의 영어명칭을 president로 하는 것이 효과적이라는 점이라는 생각해보면 그것을 쉽게 이해할 수 있다.

파리강화회의를 상대로 한 현장 외교투쟁을 시작할 즈음인 1919년 2월 이 박사는 정한경과 더불어 한국에 대한 국제연맹의 위임통치를 청원하는 일도 했다. 이 청원서는 미국 대통령에게 제출했으나 미국은 그에 응답하지 않았다. 당시 독립운동가들이나 훗날의 독립운동연구자들은 이 박사의 이런 청원행동을 비판해왔다. 그러나 후술하는 바와 같이 그런 청원은 결코 비난받을 행동이 아니다. 당시로서는 우리 민족이 일제의 식민지 지배를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현실적인 대안이 국제연맹에 의한 위임통치였다고 할 수 있다.

이 박사는 외교중심 독립운동을 보다 효과적으로 전개하기 위해 1919년 9월경부터 미국의 수도인 워싱턴에 구미위원부를 조직하고, 그것을 통해 미국의 여론지도층 및 정치인들을 포섭, 그들로 하여금 미국 정부가 한국의 독립을 위해 노력하도록 영향력을 행사하게 만들려고 했다. 구미위원부의 노력으로 인해 1919년 후반부터 미국 의회에서 한국문제가 거론되기 시작했고 1920년 3월에는 한국독립승인안이 상원 본회의에 상정되기까지 했다. 불행하게도 한국독립승인안은 상원 표결에서 부결되었다.

이 박사는 1921년 11월부터 1922년 2월까지 워싱턴에서 개최된 국제군축회의에 한국 독립문제를 제기하려고 노력했다. 이승만은 서재필과 함께 한국대표단을 구성하여 군축회의에 대해 회의에서 한국대표단에게 발언할 기회를 주거나 군축회의에서 한국문제를 논의해줄 것을 요구했다. 그 회의의 주도국인 미 영 불 일 등 열강국 대표들이 그런 요구를 묵살했다.

이 박사는 1933년 초 제네바에 있는 국제연맹 본부에서 일본의 만주침략을 규탄하는 국제회의가 개최되자, 혼자서 제네바로 찾아가 일본의 한국병탄과 만주침략을 규탄하는 선전활동을 전개하고 국제연맹으로 하여금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승인하도록 하기 위한 활동을 전개했다. 이 회의에 참석한 열강국 대표들이 한국문제를 본격적으로 논의하기를 회피하여 이 박사의 뜻은 이루어지지 못했다.

이 박사는 미일간의 전쟁위기가 고조된 1941년부터는 미국의 정부와 언론을 상대로 한 반일선전 활동과 한국독립호소 활동에 주력했다. 그는 1941년『일본 내막기』를 저술하여 일본의 팽창야욕과 미일간의 대전쟁 발발이 임박했음을 미국인들에게 경고했다. 그리고 1941년부터 45년까지 미국정부를 상대로 대한민국 임시정부 승인 청원활동을 반복해서 전개했다. 미국무부의 관리들을 상대로 승인요구 문서를 전달하는 것은 물론이고 미국 대통령과 국무장관 등에게 편지와 전보를 반복해서 보내서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승인해달라고 요구했다. 또 미국의 저명인사들을 포섭하여 한미협회를 조직하고 그 협회를 통해 미국 정부와 의회에 임시정부 승인 로비를 전개했다. 그러나 미국정부는 일본 패망 후 한국문제를 소련·중국 등과 협의해서 처리할 방침을 세워놓고 있어서 임시정부를 끝내 승인해주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중국의 국민당 정부에게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승인하지 못하도록 제동을 걸었다. 그러면서 임시정부 승인을 집요하게 요구하는 이 박사를 멀리했다.

이 박사는 재미 한인동포사회의 분열과 흥사단계열 동포들의 정치적 공격 및 미국 정부의 냉대로 인해 심신이 극도로 피곤해진 상태에서도 1945년 4월 샌프란시스코에서 국제연합 창립총회가 개최되자 거르지 않고 그 회의를 상대로 한 외교투쟁에 나섰다. 이 박사는 대표단을 조직하여 샌프란시스코로 가서 그 회의에 참석하거나 한국문제를 상정시키려고 노력했다. 재미동포사회의 반이승만파와의 갈등 및 미국관리들의 방해로 그것 또한 실패했다.

이러한 이승만의 독립을 위한 외교활동은 당장은 모두 실패했지만 연합국으로 하여금 한국문제에 대해 관심을 가지게 만들고, 나아가서 카이로회담과 포츠담회담 등 연합국들의 정상회담에서 한국문제가 논의되고 한국을 독립시켜주기로 연합국 정상들이 합의하도록 하는데 중요한 작용을 했다.

4. 통합주의

이 박사는 독립운동 기간 중 계속해서 독립운동세력들간에 파벌투쟁을 하지 말고 모든 독립운동세력이 단합하여 독립운동을 전개할 것을 주장했다. 이 박사는 상해 임시정부 구성원들이 파벌싸움으로 날을 지새우는 것을 보고 그들을 외면했다. 이 박사의 통합주의가 천명한 바대로 충분히 실천되었다고는 말할 수 없다. 이 박사는 독립운동 기간 중 특히 공산주의세력과는 협조하지 않았다.

이 박사가 통합주의 원칙을 충분히 실천하지는 못했지만 그가 기본적으로 통합주의 노선을 추구했다는 점은 다음과 같은 사실에서 확인된다. 그는 독립운동을 전개하면서 단체를 만들기도 하고 만들어놓은 단체에 참여하기도 했으나 어떤 단체에서든지 그 단체가 자기 마음에 들지 않는다 하여 탈퇴한 일이 없었다. 이 박사가 통합주의 사상에 입각하여 독립운동을 전개했다는 점을 극명하게 입증해주는 것은 1925년 임시정부 의정원이 그를 탄핵하여 임시대통령 직을 박탈한 후에도 이 박사가 임시정부를 비난하거나 임시정부에서 탈퇴하여 별도의 임시정부를 만들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임시정부 의정원은 이 박사가 국제연맹에 한국에 대한 위임통치를 청원했다는 이유로 탄핵했는데, 그것은 탄핵사유가 될 수 없었다. 일본의 식민지지배를 받는 상황에서 당장 독립을 쟁취할 수 없으면 국제연맹의 위임통치를 받아서 일본으로부터 해방되는 것이 옳은 방법이다. 당장 독립을 쟁취할 수 없는 조건에서는 국제연맹의 위임통치를 받는 것이 일본의 식민통치를 받는 것보다 백배나 좋은 것이며, 국제연맹의 위임통치를 받게 되면 독립도 보다 쉽게 달성할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국제연맹의 위임통치를 탄원한 것은 이 박사에 대한 탄핵의 사유가 될 수 없다. 그것을 이유로 한 임시정부 의정원의 이 박사에 대한 탄핵은 부당한 것이 분명하다. 임시정부 의정원 의원들은 국제연맹의 위임통치를 청원한 행위가 우리 민족의 주권을 포기하는 것이라는 명분론에 사로잡혀 그런 부당한 조치를 취한 것이다.

당시 임시정부 구성원들 가운데는 이 박사에 대한 임시정부 의정원의 탄핵이 부당한 조치라고 판단하고, 이 박사에게 쿠데타로 임시정부의 대통령직을 되찾거나 이 박사의 독립운동 거점인 하와이에 별도의 임시정부를 설립할 것을 권고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임시정부 의정원의 부당성이나 당시 이박사가 가지고 있던 역량에 비추어 볼 때, 이 박사는 별도의 임시정부를 설립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 박사는 별도의 임시정부를 설립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의정원의 탄핵을 수용했으며, 탄핵 당한 후에도 임시정부의 일원으로 행동하면서 임시정부에 독립운동 자금을 보냈다. 이 박사의 통합주의는 그의 강한 반공사상과 자신의 독립운동 노선의 타당성에 대한 확신으로 인해 제약되었다. 그의 강한 반공사상은 그로 하여금 독립운동과정에서의 좌우합작에 대해 부정적인 태도를 취하게 만들었다. 그는 좌익세력의 집요한 분파공작과 자기에 대한 공격에 크게 분노했다. 그는 조국이 해방된 후에 만일 좌우연립정부를 구성해야 한다면 그런 좌우연립정부에 참여하느니 차라리 정계를 은퇴할 작정임을 그의 측근에게 피력할 정도였다.

자신의 독립운동 노선의 타당성에 대한 이 박사의 확신은 이 박사로 하여금 다른 노선을 추구하는 독립운동세력으로부터 독선적이라는 비판을 받도록 했다. 이 박사의 입장에서 보면 민족의 역량과 국제정세에 대한 정확한 지식이 결여된 채로 명분론이나 감정에 사로잡혀 무장투쟁이나 테러활동을 중심으로 독립운동을 전개하자는 주장은 철부지의 억지처럼 보였기 때문에 그런 주장을 일일이 설득할 수도 없어서 무시한 것이다. 반대파들은 그런 이 박사를 독선적이라고 비판했으나, 오늘날의 시점에서 객관적으로 볼 때 이 박사에 대한 그런 비판은 상당 부분 정당하지 못했던 것으로 판단된다.

5. 민주주의

이 박사는 미국으로 유학을 가기 전부터 민주주의를 신봉했다. 이 박사의 민주주의를 신봉하는 마음은 그의 나이 29세이던 1904년 옥중에서 집필했던 그의 저서 『독립정신』에 잘 나타나 있다. 『독립정신』에 서술된 내용을 보면, 당시 영국 독일 일본 등에서 실천하고 있는 입헌군주정을 가장 합당한 정치제도라고 말하면서도 가장 좋은 정치제도는 입헌군주정이 아닌 미국식 민주주의라고 말했다.

이 박사는 미국식 민주주의에 대해 “어느 누구도 백성들의 권리를 침해할 수 없으며, 어느 누구도 힘없는 백성이 배상을 청구할 수 있는 권리를 거부할 수 없다. 그러한 나라야 말로 행복하고 평화롭다 할 것이니 이것이 바로 지상낙원이다.”라고 극찬했다. 이 박사가 『독립정신』에서 입헌군주정을 가장 합당한 정치제도라고 말하는 것은 당시 대한제국이 군주정을 취하고 있어서 미국식 공화제 민주주의를 가장 합당하다고 주장하면 반역죄로 처벌될 위험성이 있어서 그렇게 말한 것이다. 그러나 그의 마음속의 진심은 공화제 민주주의를 도입하는 것이었다. 그의 그러한 희망은『독립정신』에서 미국의 국민들이 누리는 권리, 미국의 역사와 남북전쟁 등을 소상하게 서술하고, 그에 덧붙여 미국국민들이 그 같은 행복을 누리는 것은 “그들의 조상이 압제를 더 이상 견디지 못하고 궐기하여 자손들에게 무궁한 기초를 물려주기 위하여 한없이 피를 흘리고 많은 재물을 바치는 것을 감수했으며, 그 후손들은 그 기초를 잘 지키고 보존했기 때문이다.”라고 서술한 데서 잘 나타난다.

이 박사를 비판하는 사람들은 이 박사가 미국식 민주주의를 추구한 것은 그가 미국에서 활동하면서 미국의 영향을 받았으며, 미국의 앞잡이기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그가 미국으로 유학가기 전부터, 서울에서 정치범으로 복역하면서 쓴 저술에 미국식 민주주의에 대한 강한 희구를 밝히고 있는 것을 보면 그러한 이 박사 비판자들의 주장은 실제와 맞지 않는 엉터리 주장임을 알 수 있다. 물론 미국인 선교사들의 영향을 어느 정도 받은 것은 틀림 없겠지만, 이 박사의 민주주의에 대한 신념은 그의 내면적 각성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미국에 유학하기 전부터 민주주의를 강하게 신봉한 이 박사이므로 미국에 유학하고 난 후부터, 그리고 미국에 거주하면서 독립운동을 전개하는 동안 이 박사의 공화제 민주주의에 대한 신념은 더욱 철저해질 수밖에 없다. 이 박사는 독립운동을 전개하면서 조국광복이 이루어지면 반드시 한국에서 미국식 민주주의를 실천하려는 확고한 계획을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독립 후의 건국구상을 밝힐 기회가 있을 때마다 미국식 민주주의국가 건설을 거듭해서 밝혔으며, 해방 후 귀국하여 첫 번째 밝힌 정치적 포부에서도 미국식 민주주의 정치제도 도입을 말했다.

이 박사는 정치제도에 대해서는 이처럼 미국식 민주주의를 강하게 추구했으나 경제·사회정책 면에서는 고전적 자유주의를 신봉하지 않았다. 그가 밝힌 경제·사회정책의 구상을 보면, 그가 수정자본주의 혹은 사회민주주의 틀에 입각한 복지국가론을 따르고 있었음이 확인된다. 이 박사의 뇌리에는 정치적으로는 미국식 공화제 민주주의를 실천하고 경제·사회적으로는 빈곤층 내지 사회적 약자에 대한 배려를 많이 하는 인간적 자본주의를 실천하려는 구상이 자리 잡고 있었다. 이 박사가 이처럼 정책과 관련하여 이데올로기적 경계를 초월한 것도 그의 실용주의적 사상과 연관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6. 반공주의

미국식 민주주의를 최고의 통치제도라고 확신하는 이 박사의 신념은 자연히 공산주의에 대한 반대로 연결된다. 공산주의는 자본주의를 부정하고 프롤레타리아트독재를 추구하기 때문에 이 박사가 추구하는 미국식 민주주의의 실천과 양립할 수 없는 것이다. 이 박사는 인간의 자유 보장은 미국식 민주주의에 의해서만 최고로 보장될 수 있다고 확신했으며, 평등의 실현에 있어서도 자본주의 경제체제를 유지하면서도 자유민주주의 정치제도를 잘 운영하면 정치적 평등은 물론 일정 수준 이상의 경제적 평등도 실현 가능하다고 믿었다.

이러한 반공주의 노선으로 인해 이 박사는 독립운동을 전개한 전기간을 통하여 좌익세력으로부터 계속 정치적 공격을 받아왔고, 그 자신도 좌익세력과 연합하려는 시도를 한 번도 하지 않았다.

이 박사가 빈한한 양반 가정 출신이고, 소시적에 가난 때문에 많은 고통을 겪었으며, 자본주의-제국주의 국가의 지배를 받는 식민지 출신 지식인이라는 점을 생각하면, 그리고 미국에서도 대공황이후 공산주의 사상이 지식인 사회에 크게 확산되었다는 점을 생각하면 이 박사가 공산주의에 대해 그토록 강한 반대 입장을 가지게 된 원인이 무엇인지 궁금해진다. 그 가장 큰 원인은 아마도 그의 독실한 기독교 신앙과 민족자주정신이었을 것으로 판단된다. 이 박사는 감옥살이를 하던 24세 때 기독교에 귀의했으며, 그 이후 서거할 때까지 독실한 기독교인으로 살아왔다. 이러한 기독교신앙은 그로 하여금 공산주의의 폭력혁명론을 받아들일 수 없게 했을 것이다. 또한 그가 젊은 시절부터 가지고 있었던 강한 민족자주정신은 소련을 조국으로 간주해야 하고 소련공산당에 맹종해야 하는 공산주의운동과 양립할 수 없었던 것이다.

이 박사의 반공주의 사상은 러시아에 대한 반감과도 연결되어 있다. 이 박사는 러시아가 공산화되기 이전에도 러시아를 싫어했다. 그는 제정 러시아의 동진정책을 크게 경계하고 있었으며, 러시아가 ‘동양 천지를 마음대로 호령하고자’하는 야욕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의 저서 『독립정신』은 여러 열강국들에 대해 언급하고 있는데, 그중에서 가장 나쁘게 서술하고 있는 것이 러시아이다. 이 박사는 당시까지만 해도 일본에 대해서조차도 그리 나쁘지 않게 평가했다. 러시아에 대한 이 박사의 혐오감·공포심은 공산화된 러시아에 그대로 이전되었다. 공산화된 러시아가 세계혁명을 추진하고 있으며, 세계혁명 계획의 틀 속에서 식민지 공산주의자들을 지휘하고 있으니 그러한 공포심이 생기지 않을 수 없는 일이다.

이 박사도 독립운동을 하면서 한 때 소련과의 협조를 생각한 적이 있었다. 전술한 바와 같이 1933년 제네바에서 개최된 일본의 만주침략을 규탄하기 위한 국제연맹회의가 개최되었을 때, 이 박사는 그 회의가 한국문제를 논의해주도록 호소하기 위해 제네바에 갔었으며, 그 때 미국 중국 한국 소련이 연대하여 일본을 제압하자는 구상을 관계국 외교관들에게 피력한 바 있으며, 그러한 구상 하에 모스크바를 방문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 박사가 모스크바에 도착한 날 저녁에 소련정부는 이 박사에게 비자를 발급한 것이 착오였다고 주장하면서 즉시 출국하라고 명령, 이 박사는 모스크바에 도착한 지 37시간 만에 모스크바를 떠났다. 이러한 경험은 이 박사로 하여금 소련에 대한 혐오감을 더욱 강하게 가지도록 했을 것으로 보인다.

이 박사는 제2차 세계대전 말기 미국의 루즈벨트 행정부가 유럽지역에서 미국의 이익을 확보하기 위해 한반도를 소련에 팔아먹었지 않는가를 줄곧 의심했다. 이러한 의심은 그의 반소입장을 더욱 강하게 만들었다. 이 박사는 이러한 의심을 공재적으로 천명함으로써 미소협력에 의해 전후문제를 처리하려는 정책을 추구하는 미국무부의 미움을 사기도 했다.

이 박사가 반공주의 노선을 취했다고 해서 사상으로서의 공산주의를 전면적으로 부정했던 것은 아니다. 그는 공산주의 정책 가운데는 부분적으로 취할만한 요소도 있다고 생각했다. 이 박사는 해방과 함께 귀국한 후 발표한 성명들에서 그러한 입장을 누차 천명했다. 이 박사가 발표한 건국후의 정부정책에 대한 구상을 보면 이 박사가 노동자 농민을 비롯한 사회적 약자들의 불우한 상태를 개선하고자 하는 의지를 상당히 강하게 가지고 있다는 점을 알 수 있으며, 대통령이 된 후에 농지개혁을 적극 추진한 것도 그 연장선상에서 이해할 수 있다. 이 박사는 국가를 파괴하려는 공산주의자들의 행동에 대해서는 단호한 반대 입장을 취했지만 정책적 사고에 있어서는 큰 유연성을 가지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가 싫어하는 것은 공산주의의 폭력혁명과 소련에 대한 맹종노선이었던 것이다.

7. 결어

20세기 전반기의 동아시아의 역사와 우리 민족의 해방에 관한 역사는 이 박사의 이러한 독립운동 지도사상이 타당했음을 잘 말해주었다. 우리 민족은 무장군사투쟁이나 폭력투쟁에 의해 일제로부터 해방된 것이 아니라 연합국이 일본을 패망시키고 한반도를 해방시켜주기로 약속함에 따라서 해방되었다. 이러한 사실은 그의 실용주의적 외교중심 독립운동이 타당했음을 확인해준다.

그리고 해방 후의 민족분단은 이 박사의 통합주의-민주주의-반공주의 독립운동 노선이 타당했음을 확인해준다. 만일 우리 민족의 독립운동세력이 모두 통합주의, 민주주의, 반공주의를 지도사상으로 하여 독립운동을 전개하고 해방 후 미국과 소련에 대응했더라면 우리 민족은 분단과 북한의 공산화를 피하고 통일된 민주주의국가로 독립했을 것이다. 불행하게도 우리 민족의 독립운동세력 혹은 정치세력 중에는 이 박사의 그러한 독립운동 지도사상에 반대하는 세력이 상당히 많아서 우리 민족의 분단을 초래하는 것을 막지 못했다.

이 박사 비판자들은 이 박사의 반공주의가 민족분단을 초래했다고 비판한다. 그들은 민족분단의 진정한 원인은 소련의 한반도정책과 소련에 맹종적인 공산주의자들이었다는 사실을 외면하고 그런 주장을 한다. 그들은 또 만일 이 박사가 확고한 반공노선을 취하지 않았더라면 한반도 전체가 공산화되는 결과를 초래했을 것에 대해서는 생각하지 못하고 그런 비판을 한다. 실제 있었던 일을 토대로 해서 정확하게 말한다면, 민족분단은 소련과 소련에 맹종적인 국내 공산세력 때문에 비롯된 것이며, 이 박사의 확고한 반공주의가 없었더라면 남한마저 공산화되었을 것이다. 이렇게 볼 때, 공산화통일을 바람직하게 생각하는 사람들에게는 이 박사의 반공주의가 민족분단의 원인이라고 말하는 것이 타당할 수 있으나, 공산화통일을 반대하는 사람들에게는 이 박사의 반공주의가 민족분단의 원인이라는 주장은 결코 타당할 수가 없다.

이 박사는 해방 후 귀국하여 건국운동을 전개할 때도 독립운동을 전개할 때 존중했던 4가지 지도사상을 그대로 받들었다. 그가 준수한 그러한 지도사상이 타당했기 때문에 좌익세력의 반대, 김구 등 일부 비현실적 민족주의자들과 김규식 등 기회주의적 중간파 세력의 반대, 소련의 반대, 미국 정부와의 마찰 등을 여러 가지 장애들을 모두 극복하고 민주주의 대한민국이 건국될 수 있었던 것이다. 만일 독립운동 과정에서부터 이 박사가 실천해온 사상이 올바르지 못한 것이었고 그것에 대한 민중의 신뢰가 강하지 않았더라면, 한반도 전체가 공산화되는 것을 피할 수 없었을 것이고, 오늘날 남한에 살고 있는 우리도 북한 주민들과 같이 무인권과 빈곤의 고통 속에 살고 있을 것이다.<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