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승만이 이끈 반공주의의 세계사적 의의(김광동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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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1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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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만이 이끈 반공주의의 세계사적 의의

김광동 (나라정책연구원장, 정치학박사)

Ⅰ. 제국주의, 전체주의 그리고 공산주의

대한민국이 1948년에 건국되고 자유와 번영의 시대를 만들며 성장한 60년 역사는 전체주의 및 제국주의와의 대결이었다. 대한민국의 건국과 성장은 일본 제국주의로부터의 독립뿐만 아니라 소련 제국주의로부터의 독립과 저항의 결과이기도 했다. 특히 러시아가 만든 소비에트(Soviet) 연방은 제국주의이면서도 인류사가 경험한 가장 혹독한 전체주의였다. 그리고 자유와 민주에 반하는 그 반역사적 제국주의의 명목은 공산주의(Communism) 혹은 사회주의(Socialism)였었고 한국은 공산주의의 파고에 가장 커다란 영향을 받는 나라였다.

제2차 세계대전에서 미국의 對일본전 승리로 일본 군국주의가 물러감으로써 만들어진 동아시아의 질서부재와 권력공백상태에서 미국의 압도적 영향력이 행사된 일본 본토 이외의 지역에 새로운 힘과 질서구조를 메워 넣은 것은 다름 아닌 스탈린(J. Stalin)의 소비에트 적군(赤軍)이었다. 일찍부터 스탈린의 소련은 일본전에 참전하는 대가로 과거 제정 러시아 때인 1905년 러-일전쟁의 패배로 러시아가 일본에게 잃었다고 판단한 동아시아에서의 국익 회수를 요구했다. 소련군의 참전 대가에는 중국 동북부지역과 한반도 및 사할린 열도의 장악과 지배권의 확보가 포함되어 있었다. 소련은 공산주의체제이기 이전에 이미 또 다른 제국주의였던 것이다.

마르크스주의자와 러시아가 만든 공산 제국주의는 훨씬 더 가혹하고 인류역사에 유례를 찾기 힘든 전체주의적 제국주의였던 것이다. 실제 소련은 동유럽이든, 중앙아시아든 아니면 동아시아든 그들이 점령한 지역에 예외 없이 ‘공산혁명’을 내걸며 스탈린과 러시아의 제국을 건설했다. 그 결과 몇몇 서유럽 일부를 제외한 전 유라시아대륙이 공산주의체제이자 소련 제국주의의 희생물로 전락해 들어갔다. 그것이 바로 1945년 대한민국이 일제로부터 해방된 시기 및 그 이후 맞닥뜨렸던 세계사 전개였다.

이승만은 제2차 세계대전 당시에 전쟁의 성격을 가장 분명히 파악하고 있었다. 이에 이승만은 제2차 대전이란 제국주의적 전체주의와 자유민주주의 전쟁이며, 당시 세계에서 가장 자유민주적 체제를 만들어놓고 있던 미국이 자유와 민주주의를 위한 전쟁에 적극적으로 참전해야 한다는 ‘십자군적 참전론’의 논리를 만들어냈다. 이승만은 파시즘이든 군국주의든, 공산주의든 그것은 전체주의로 보았을 뿐만 아니라 공산주의도 자유와 민주를 짓밟는 전체주의임을 가장 심도 있게 꿰뚫고 있었다.

따라서 미국이 일본 등 전체주의와의 대항에서 주도적 역할을 해야 할 뿐만 아니라 공산주의의 확산을 방지해야 함을 역설하였다.『Japan Inside Out』이 출간된 1941년의 시점에도 미국은 일본 및 독일과의 전쟁을 주저하며 바라만보고 있던 상황이었는데, 이승만은 미국의 민주주의란 ‘전체주의 바다’의 한복판에 홀로 떠있는 고도(孤島)에 지나지 않으며 민주주의 수호세력과의 연대 속에서 민주주의를 파괴하는 제국주의와 전체주의자와의 대결에 나서야 한다는 역사적 방향을 제시하였다.

일본․러시아․독일․이탈리아가 서반구를 제외한 나머지 거의 대부분을 실질적으로 지배하고 있기 때문에 미국 민주주의라고 하는 것은 ‘전체주의의 바다’ 한복판에 홀로 떠 있는 고도(孤島)에 지나지 않는다.

나치스 Nazis․ 파시스트 Fascists․ 공산주의 Communists 그리고 기타 파괴적인 분자들은 내가 이해하고 있는 바로는 미국정부 형태를 전복한 다음 그 체제가 어떻든 간에 그들 중 최강자의 정부 제도를 수립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고 있다.

이승만은 제2차 세계대전의 성격을 규정한 이 책 마지막 결론 장을 ‘민주주의냐 전체주의냐(Democracy versus Totalitarianism)’로 명명한 것에서 보듯 세계사가 전체주의와 민주주의, 제국주의와 반제국주의의 대결임을 인식하고 대응하고 있었다. 이승만은 이미 1941년 일본 군국주의뿐만 아니라 독일의 나치스(Nazis)와 이탈리아의 파시스트(Fascists) 그리고 소련의 공산주의(Communists)를 동일한 전체주의로 인식하고 대응할 것을 주장하였다. 공산주의나 파시스트나 모두 민주주의에 반하는 전체주의적 체제임을 분명히 하였고 이에 대항하지 않으면 평화도 없고 민주주의도 없다는 사실을 분명히 했던 것이다.

특히 미국은 전체주의가 일으킨 전쟁에서 국외자적으로 ‘고립된 섬(孤島)’의 영역에 머물 것이 아니라 확산되는 전체주의에 맞서 자유와 민주주의의 영역을 확대하는 것이 곧 세계평화와 민주주의의 안정임을 인식하고 미국에 역설했던 것이다. 그리고 미국도 전체주의의 영향에서 자유로울 수 없으며 ‘평화’와 ‘반전’을 내세우는 세력에 의해 자유와 민주를 수호해야 할 수호자적 역할을 잠식당하고 침해받고 있다고 호소하였다.

따라서 이승만은 일본 군국주의적 전체주의의 실체를 알리고 미국의 세계사적 역할을 촉구하고 자유민주국가의 대응을 호소하기 위한 간절한 마음에『Japan Inside Out』을 써야했다. 이승만은 소련 공산주의적 전체주의의 본질을 알리고 미국의 인식 전환과 공산주의와 대결해야 할 새로운 역할과 실천을 촉구하기 위해 소련 공산주의는 곧 러시아 제국주의임을 호소해야 했다. 그러나 자유민주적 세계와 미국은 그만큼 철저한 인식과 대응을 해나가지 못하고 있었다.

결국 미국과 자유민주적 세계는 일본 군군주의와의 대결에서는 이겼는지 몰라도 공산주의의 본질을 뒤늦게 깨달음으로써 중국과 동유럽을 공산제국주의의 진영에 떨어뜨렸다. 또한 한반도에서 한국전쟁(6.25)이라는 동족간의 대참화를 겪게 한 후에야 비로소 구체적으로 공산주의를 알고 대응하게 되었다. 이승만은 일본 군국주의와의 대결과 소련 공산주의와의 대결과정에서 지도적 역할을 수행하였으며 특히 對소련 전쟁이자 對공산주의 전쟁인 한국전쟁(6.25) 등을 통해 대한민국의 대통령으로서 공산제국주의를 최전선에서 맞아 싸워 이겼던 세계적 지도자적 역할을 하였다.

Ⅱ. 소련 제국주의의의 본질을 꿰뚫고 대응한 이승만

전체주의이자 본질적으로 또 다른 제국주의인 소련의 목표와 전략을 그 당시 세계에서 근본까지 가장 잘 꿰뚫고 바라보고 있던 지도자는 이승만이었다. 이승만은 ‘독립협회’활동을 했던 1898년의 만민공동회 때부터 이미 제국주의적 성향을 갖는 러시아세력의 철수를 요구하였고 러시아가 공산주의혁명을 했다고 해서 제국주의적 성격이 변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제국주의적 성격은 공산주의를 명목으로 더욱 확대될 것임을 파악하고 있었다.

이승만은 공산주의가 전체주의적 제국주의이며 인간 본성에도 어긋난다는 것을 분명히 하였다. 1917년 볼셰비키의 공산혁명에 대해 이승만은 공산주의를 “원래 자유롭게 되기를 원하는 인간의 본성을 거역해가며 국민을 지배하려는 사상체계”라고 규정지었고, 그의 저서 『독립정신』에서는 러시아가 “다른 여러 가지 수단을 부려 한 조각 땅이라도 저의 세력에 넣으면 영원히 제 것을 만들어 장차 온 세상을 다 통일하고자 하는 마음이 커지고” 있다며 러시아의 제국주의적 팽창 야욕을 읽고 있었다. 이승만은 일찍이 1903년 2월 『제국신문』에 쓴 논설에서도 러시아를 “탐욕 있는 호랑이”라 칭하며, “세계를 하나의 고깃덩어리로 본다”며 러시아의 제국주의 성격을 강조한 바 있었다.

이승만은 1942년 1월 미국 국무부를 방문하여 한국의 독립의 정당성을 강조함과 더불어 이미 소련이 한반도를 지배하도록 해서는 안 된다는 점을 역설하였다. 소련군이 對일본전에 참여하기 3년 7개월 전에 소련은 제국주의적 성향을 갖고 있기 때문에 한반도 및 동아시아에 영향을 미치기 시작할 경우의 문제를 제기하고 대응에 나섰던 것이다. 1942년 12월, 미 국무장관에 보낸 편지에서도 이승만은 소련의 팽창야욕이 견제되지 않는 한 한반도에는 공산국가가 설립될 수밖에 없는 상황으로 가게 될 것이라고 경고하고 대응을 촉구하였으며, 1943년에도 여러 차례 소련이 한반도에 ‘소비에트 조선공화국’을 건설할 것을 추진하고 있고 이는 저지되어야 한다고 지적하고 있었다.

이승만에게 있어 공산주의와 소련은 러시아 제국주의의 외피이자 형식이었을 뿐이었고 소련과 연대하는 것이 바로 공산주의 사상을 받아들여 한국을 노예국화하는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소련과 공산주의로 형식을 갖춘 러시아 제국주의는 결국 영국 처칠수상이 1946년 3월 5일 연설에서 소련이 ‘철의 장막(iron curtain)’을 친다고 소련을 비난하고, 미국 정부가 봉쇄정책(Containment Policy)을 수립하며 1947년 3월 12일 ‘트루먼독트린’을 통해 더 이상의 공산주의의 세계적 확산을 막겠다는 의지를 표명할 때까지 이승만은 독립과 건국과정의 조그만 나라 한국을 이끌며 소련 및 소련 공산주의와 동조하는 좌익을 상대로 한 외로운 싸움을 계속해야 했다.

그러나 결국 한반도의 절반에는 ‘조선 소비에트(Soviet) 공화국’이 건설되었고 또 전쟁으로 귀결되었다. 소련이 對일본전에 참천하기 몇 년 전부터, 그리고 소련이 한반도 북부를 점령하기 몇 년 전부터 소련 공산주의의 제국주의적 팽창과 한반도 지배를 예언하고 걱정하며 대처할 수 있는 지도자가 세계에서 얼마나 있었겠는가? ‘노동자’와 ‘농민’을 내건 러시아와 소련 공산주의의 이와 같은 제국주의적 본질을 세계는 많은 희생을 딛고 많은 세월이 흘러서야 이해하게 되었다. 동유럽의 공산화가 그것이고, 그리스와 터키 등의 내전이 그것이며 중국 본토의 공산화나 한반도 북부지역의 공산화 및 한국전쟁이 그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승만은 소련이 내걸고 있는 공산주의(Communism)란 전체주의의 또 다른 형태이자 제국주의의 또 다른 형태라는 것을 가장 선구적으로 깨닫고 대응해간 지도자였다. 그리고 세계가 그것을 깨닫고 함께 공동 대응하기까지 소련이 참여하는 신탁통치반대와 소련의 한반도 점령반대 그리고 소련의 동아시아전후질서 참여를 일관되게 반대했다. 한국이 해방, 건국되고 공산주의에 맞서야 했던 20세기 역사에서 이승만은 마르크스-레닌이즘에 기반하고 1917년 볼셰비키혁명이 만들어낸 공산혁명의 전체주의성과 러시아의 제국주의성의 결합이 만들어낼 국제질서의 변화를 읽고 대처해나가고자 했던 탁월한 세계적 지도자였다.

특히 이승만은 스탈린의 소련이 제2차 대전에 승전국으로 참여함에 따라 나타나는 국제질서의 성격을 이해하고 소련 공산제국주의의 본질을 꿰뚫으며 이에 대한 미국과 세계의 대응을 선구자적으로 이끌어내고자 했다. 그의 세기적 정치적 식견과 노선은 결국 동유럽의 소비에트화와 중국 공산화를 포함한 소련 공산주의의 팽창과 수많은 희생, 그리고 대한민국의 분단과 한국전쟁(6.25)을 겪고서야 확인되었고 이승만이 건국한 대한민국의 성공 역사로 입증되었다.

Ⅲ. 대한민국 건국과 자유를 위한 이승만의 반공투쟁

대한민국의 건국은 곧 반공(反共)투쟁의 결과다. 이승만은 우리 민족이 일본 제국으로부터 벗어나 다시 소련 제국의 노예가 되지 않기 위해서는 공산주의의 길을 거부해야 한다는 가장 분명한 민족사적 노선을 만들고 실천하였다. 소비에트 연방의 일부로 들어가야 한다는 박헌영의 주장처럼 공산주의에 경도되어 있던 제2차 대전 후 한반도 상황에서 이승만은 소련과 연대하자는 것은 곧 소련의 노예국가로 가자는 것이고 사상적으로 공산주의란 곧 소련의 노예국가로 가기 위한 사상임을 역설하였다. 소련이 한반도를 점령하거나 영향력을 미치기 시작하면 그것은 곧 한반도가 소련 제국의 변방이자 속국이 되는 것이며 내전(內戰)으로 전개될 것임을 일찍부터 예상하고 있었다.

이승만은 한국이 독자적으로 對일본전쟁에 참여하지 않으면 향후 소련의 한국 지배로 이어질 것이란 동아시아 국제질서의 성격을 완벽히 읽어낸 거의 유일한 지도자였다. 그에 따라 이승만은 소련의 제국주의적 팽창을 막는 유일한 방법은 한국이 독립을 인정받고 對일본전쟁에 상징적으로라도 참여하는 것이라고 판단하고 미국의 인식전환과 협조를 강하게 요청하였다. 이승만은 한국 독립을 미국이 미리 승인함으로써 이런 움직임에 대하여 먼저 손을 쓰지 않으면 일본 패망 뒤 소련이 반드시 동아시아질서와 한반도에 끼어들어 한국을 강점할 것이라고 단언하였지만 결국 그 뜻을 이룰 수는 없었다.

미국의 對일본전 승리 이후 이승만이 해야 했던 것은 소련의 한반도 개입을 막는 일이었다. 소련에 의한 공산화의 또 다른 이름인 신탁통치(信託統治) 반대에 민족의 운명을 걸었다. 신탁통치가 소련의 한반도 개입에 길을 열어주는 것임을 알았기 때문이다. 이승만은 한반도에 대한 신탁통치가 거론되기 시작한 1942년부터 어떤 형식을 취해서든 소련의 개입이 곧 한반도의 공산제국주의화임을 알리고 소련의 한반도 점령과 신탁통치가 좌절되게 하고자 적극 반대하였다. 일례로 이승만이 1945년 8월 27일 맥아더장군에게 보낸 전문을 보면 다음과 같았다.

우리는 공동 점령이나 신탁에 반대한다. 만약 점령이 필요하다면, 미국이 흘린 피 값과 소모한 막대한 비용의 대가로 미군만의 단독 점령을 환영한다. 대일본전은 민주주의를 위한 세계 안보를 달성하기 위해 승리한 것이다. 왜 우리가 러시아로 하여금 한국에 들어와 공산주의 정부를 수립하고 한국에서 유혈내전의 씨앗을 뿌리도록 허락해야 하는가?

그 외에도 이승만은 1945년 12월 17일과 19일 ‘공산당에 대한 나의 입장’이라는 방송연설을 통해 한국은 공산당을 원치 않는다는 것을 세계 각국에 선언한다고 명백히 밝히고 향후 대한민국은 공산주의의 길로 가서는 안 된다는 것을 분명히 하였다. 이승만은 소련의 사주를 받는 공산주의자들의 신탁통치론은 “영원히 우리 반도와 국민을 팔아먹으려는 가증스러운 행동”이라고 비판하였고 공산주의자들의 목표는 “소련의 위성국”을 만드는 것이라고 경고했다.

특히 이승만은 폴란드 및 동유럽에서의 사례를 언급하며 공산주의의 위협에 대해 연설했는데, 이는 결국 소련의 사주에 의해 한반도에 공산정권이 수립되는 것을 막고자한 민족지도자로서의 행동이었다. 미국이 임시정부 불인정 방침을 계속 고수하고 특히 미국이 임정 내부의 분열을 문제 삼자, “미국이 소련과의 협조를 우선시한 나머지 한국인에게 무분별한 좌우합작을 강요하는 경우 전후 한국에는 폴란드의 루블린(Lublin)정권과 비슷한 친소 괴뢰정권이 탄생할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전체주의이자 제국주의 국가인 소련의 전략상 한반도에 친소정권이 세워질 경우, “한반도에는 민족주의자와 공산주의자 간에 내전이 불가피할 것”임을 이승만은 경고하고 이를 막기 위해 모든 노력을 다했던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노력은 미국의 협조부족으로 적어도 한반도 북부에서는 실패할 수밖에 없었다.

결국 한국전쟁(6.25)으로 이승만이 예언했던 공산주의와 민족주의의 전쟁, 그리고 소련의 제국주의전쟁은 현실화되고 말았다. 6.25 전쟁이 발발하자 이승만은 전쟁의 성격을 ‘한국 대러(對露) 전쟁’이라고 명확히 규정하였다. 그리고 “소련이 군기, 군물을 주어서 침략군들이 들어오게 하였으니” 6.25 전쟁은 곧 “한국과 아라사가 싸우는 전쟁”이라고 규정하고 자유민주사회의 공동대응을 촉구하였다. 아울러 이승만은 소련이 북한 공산주의자들을 앞세워 우리나라를 “크레믈린 독재자의 지배하에 넣도록” 만들고 있다고 비난하였다.

이승만에게 제2차 대전이란 “자유민주주의 세력이 일본인들을 그들의 섬나라에 다시 잡아넣을 것”이고 그 방법만으로 “평화는 다시 찾아올 것이다”라는 성격규정과 마찬가지로 한반도에서 전쟁을 방지하고 평화와 통일을 추구하는 것이란 소련과 공산주의를 그들 나라로 ‘다시 잡아넣는 것’이었다. 그렇지 않으면 궁극적으로 공산주의를 붕괴, 해체시키는 수밖에 없었던 것이었다. 그것은 40여년이 지난 1991년 소련 공산주의의 해체 및 북한 공산주의가 만든 변태적 잔존과 문명궤멸 현상으로 나타난 세계역사의 전개로 입증되었다.

이승만은 공산 제국주의와의 싸움을 통해 그가 그다지도 염원하던 명실상부한 ‘민주공화제(民主共和制)’ 국가를 한반도 땅에 건설하는데 성공하였다. 동유럽부터 중국까지, 그리고 평양까지 주변의 모든 나라가 전체주의적 공산주의의 길을 갔지만 대한민국만은 그 길을 가지 않았다. 오히려 공산주의의 길을 갔던 나라들에게 새로이 가야할 방향과 이정표(里程標)를 제시하였다. 1948년 8월 15일 건국 초대대통령으로서 이승만은 대한민국 건국정부수립을 기념하며 “민주 정체 요소는 개인의 근본적 자유를 보호하는 것”이며 그것이 국가의 의무임을 분명히 함으로써 민주공화제적 근대국가를 한반도에 한민족이 한반도에 건국하였다는 것을 밝혔다.

Ⅳ. 자유와 평화, 민주주의를 위한 이승만의 투쟁

공산제국주의의 시대에 자유와 평화, 그리고 민주주의를 지키는 가장 구체적인 실천이란 바로 공산주의와 싸우는 것이고 공산주의로부터 인민을 구출하는 것이다. 이승만은 『Japan Inside Out』에서 제2차 대전에 참전을 꺼리고 있는 미국에게 미국은 평화와 민주주의를 위해 싸워야함을 역설하고 미국에게 평화를 호소하면서 참전을 막고자하는 ‘반전론자’들을 향해서 ‘평화’를 말하면서 평화와 민주주의를 파괴하는 ‘제5열(fifth columnists, 간첩)’과 같다고 지적하였다.

또 이승만은 자유(Liberty)는 싸우지 않고 얻어질 수 없는 것이라고 하였다. 그리고 “자유를 즐기는 사람은 많지만 자유를 위하여 생명을 걸고 싸우려고 하는 사람은 드문 것이다(Everyone likes to enjoy liberty, but few are willing to fight for it with their lives)”라고 하였다. 그러면서 전체주의와 대결하기 위해서는 미국이 자유와 민주주의를 향한 투쟁에 나서야 함을 촉구하였다. 그리고 미국도 전체주의와 싸우지 않으면 “비적(匪賊) 국가의 기계화된 육․해군 앞에서는 제2의 중국, 제2의 프랑스 또는 제2의 그리스로 전락할 수밖에 없다”고 지적하고 자유와 민주주의를 향한 미국의 역할을 제기하면서 전체주의와 대결하지 않으면 곧 전체주의화될 수밖에 없음을 분명히 하였다.

일본 패망 이후 소련 공산제국주의의 확산 앞에 직면함에 따라 대한민국 건국에 있어 주도적 역할을 하고 초대 대통령이 되었던 이승만에게 반공주의가 곧 독립국가를 유지하는 최선의 방안이고 한국민이 자유민주주의 체제에서 살 수 있는 유일한 방안이었다. 때문에 이승만의 첫 번째 사명은 공산주의로부터 대한민국을 건국하고 수호하는 일이었다. 건국을 전후하여 제주 4.3 사건 발생시 ‘공산주의자의 만행’과 ‘제주도에서의 반란’을 진압하고 연이은 여수․순천에서의 제14연대 반란 등을 진압하기 위해 이승만은 계엄령과 국가보안법으로 맞섰다. 이승만은 추상적 민주주의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공산주의로부터의 침략과 위협으로부터 한국이 이제 막 시작한 민주주의제도를 온존시키고 정착시키는 것이 곧 한국적 상황에서의 가장 ‘구체적이고 실천적인 민주주의 투쟁’이었다.

이승만은 건국을 전후한 공산주의자들의 행위를 “남의 나라에 제의 조국을 부속시키고 그 노예가 되자는 불충불의한 언행으로 도당을 모아 … 남녀를 참혹하게 학살하고 내란을 이르켜 정부를 전복하려는 음모”라고 규정짓고 대응하였다. 특히 이승만은 공산주의자들의 통일론을 논박하며 대한민국은 인권 보장을 위해 공산당과 싸우는 것이며 공산주의자들이 말하는 통일은 언제든지 할 수 있는 것이고 “그것은 공산당에 맡기면 될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그런 통일을 원치 않는다”고 대한민국이 가야할 통일의 방향까지도 명확히 설정하였다.

일본 군국주의의 대미 제국주의전쟁을 예언하고 공산주의자들의 대남침략을 예상했듯 이승만은 결국 공산주의자들에 의한 대한민국 침략전쟁을 온 몸으로 견뎌내야 했다. 이승만은 대한민국을 이끌며 전체주의와 제국주의에 맞서 자유와 민주주의를 확산시키는 선구자적 역할을 피하지 않았다. 그는 1954년 미국 방문 시 미 의회연설에서 한국전쟁(6.25)의 성격을 말할 때도 전쟁의 성격과 함께 한국은 자유를 향한 전쟁의 최전선에 있음을 인지시키고자 하였다.

한국 전선은 우리가 승리하고자 하는 전쟁 즉, 아시아를 위한 전쟁, 세계를 위한 전쟁, 지구상의 자유를 위한 전쟁 중 작은 일부일 뿐입니다.

공산전체주의 세력에 의한 6.25 전쟁이 발생한 이상 이승만은 최소한 한반도 북부에 있는 우리 민족도 소련과 공산 제국주의의 노예(奴隸)상태로부터 해방시켜 자유와 민주주의를 누릴 수 있도록 만드는 것을 또 하나의 과제로 생각했다. 이 같은 맥락에서 이승만의 ‘북진통일론’은 자유민주체제의 확산을 의미했지만, 미국의 망설임과 공산주의 중국의 개입으로 또다시 좌절되었다. 하지만 이승만은 적어도 공산주의체제로 가기를 원하지 않는 사람에게는 자유를 부여해야 한다는 소신은 관철시켰다. 공산주의를 거부하며 공산체제로 돌아가는 것을 거부한 반공포로를 석방하는 역사적 결단은 자유를 사랑하고 민족을 사랑하는 이승만이 아니면 내릴 수 없는 것이었다.

대한민국을 공산주의로부터 수호하고 자유민주주의 세계를 지키기 위한 또 다른 과업은 자유민주체제의 최전선에 있는 한국을 미국과 동맹체제로 구축하는 일이었다. 이승만에게 있어 아시아 반공전선에 미국을 참여시키고 결속시키는 구체적 방안은 한국전쟁까지 겪고 나서도 군사동맹을 꺼리는 미국을 대상으로 한-미동맹체제를 이끌어내는 것이었다. ‘전체주의 바다’ 속에 유일한 자유민주체제였던 미국으로 하여금 對일본전에 나서도록 했듯이 이번에는 한국과 동맹을 맺고 함께 공산주의와 대결하는 것이 세계적 차원의 민주주의를 확립하고 한국을 자유민주국가로 존속할 수 있도록 하는 유일한 대안임을 역설했던 것이다.

나아가 이승만은 공산주의와 대결하기 위한 자구책으로 아시아반공연맹을 조직하는데 나섰다. 강고한 스탈린 군과 소련공산제국주의의 확산에 따라 밀려나거나 위협 받고 있던 대만, 필리핀 등과 반공연맹을 조직하고자 하였다. 1949년 서유럽에서 미국을 포함한 12개국이 NATO를 결성하여 소련제국주의와 공산주의에 맞섰듯 동아시아에서도 ‘태평양동맹(Pacific Union)’과 같은 집단안전보장체제를 구축하고자 하였고 이에 필리핀의 퀴리노(E. Quirino)와 대만의 장개석(張介石)이 의견을 함께했다.

이승만은 한국전쟁(6.25)이 발발하기 1년여 전인 1949년 8월 6일 한국 진해(鎭海)에서 대만의 장개석과 2차에 걸친 회담을 갖고 8월 8일 공동성명을 발표하였고 그 내용은 국제공산주의의 위협에 공동으로 대처하는 집단안보체제를 추진하기로 했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승만이 추진하고자 했던 반공반소(反共․反蘇) 집단안보체제는 소련의 스탈린과 모택동의 중국 공산당에 의해 공산화되고 있는 중국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동아시아에서 공산주의의 위협을 정확히 파악하고 있지 못했던 미국이 집단안보체제에 참여를 반대하고 오히려 미국정부는 애치슨 선언을 통해 한국을 미국의 태평양 방위선에서 제외시키며 대만문제에 대한 미국의 불개입 입장을 천명하면서 좌절되었다. 물론 그 결과는 공산주의에 의한 확산전쟁이 한국전쟁(6.25)로 귀결되었다.

미국의 반대에 따른 집단안보조약이 좌절된 후 이승만과 한국정부가 주도하여 만든 국제반공조직이 바로 아시아민족반공연맹(The Asian People Anti-Communist League: APACL)이다. 이승만 정부는 한국전쟁 직후인 1953년 12월부터 1954년 5월까지 대만뿐만 아니라 동남아시아에 반공전선 연대기구를 조직하기 위해 3차에 걸쳐 사절단(백낙준/이범녕/이범녕 단장)을 파견해 동남아시아민족반공대회를 서울과 진해에서 각각 개최할 수 있도록 관철시키면서 아시아반공지도자의 위상을 분명히 하였다. 이승만 대통령은 1954년 6월 진해에서 한국, 대만, 필리핀, 태국, 베트남 5개국 및 기타 지역대표가 참여한 가운데 아시아민족반공대회를 개최하였고, 미국과 일본의 참여가 없는 상황에서도 1959년까지 5차에 걸쳐 아시아민족반공대회(APACL)를 이끌어나갔다.

이승만은 아시아민족반공대회를 통해 ‘반공 십자군’을 형성하고 반공이념의 통일과 군사력 협력을 위한 아시아차원의 국제적 조직이 필요함을 강조하였다. 그 기구는 박정희 정부에서는 특별법인체로 발전하여 ‘한국반공연맹’(한국자유총연맹)으로 변화하였고, 1967년 제13차 대회에서는 세계 64개국 대표가 모여 ‘세계반공기구’(WACL)를 발족시키며 세계 반공 연맹을 주도하였다. 그 때 만들어진 세계반공기구는 다시 소련을 비롯한 공산주의의 소멸과 함께 1990년 세계자유민주연맹으로 개칭되어 활동하고 있다.

Ⅴ. 결론: 이승만 반공주의의 세계사적 의의

제국주의와 전체주의의 시대를 살며 대한민국을 독립․건국하고 존속․발전시키고자 했던 이승만에게 공산주의는 가장 커다란 적이자 장애였다. 그 과정에서 이승만은 첫째, 공산주의가 파시즘이나 나치즘 혹은 일본의 군국주의와 본질적으로 동일한 것임을 파악한 세계적 지도자였다. 특히 소련의 공산주의는 전체주의일 뿐만 아니라 제정 러시아로부터 출발한 러시아 제국주의이자 공산전체주의 체제에 기반한 또 다른 제국주의임을 분명히 하고 이에 대한 세계적 대응을 주도하였다.

둘째, 전세계적으로 ‘전체주의의 바다’가 확산되는 역사적 상황에서 이승만은 자유민주국가로서 미국과 자유세계가 맡아야 할 역사적 역할을 분명히 제기하고 촉구하였다. 제2차 대전에의 참전을 꺼리고 실제 일본의 진주만 폭격까지 직접적 개입을 자제하던 미국을 대상으로 전체주의의 확산에 맞서 ‘고립된 민주주의 섬’과 같은 미국이 자유와 민주주의 확산을 위한 전쟁에 나설 것을 촉구하였다. 이승만의 인식과 제안은 일본의 태평양전쟁으로 구체화되었고 미국도 국제적 차원의 민주주의 없이 미국의 민주주의도 지켜질 수 없는 것임을 알게 되었다.

셋째, 이승만은 대한민국의 해방과 독립, 그리고 건국이란 곧 소련 공산주의의 영향력을 차단하는 것임을 명확히 하고 소련의 노예국가이자 공산 식민지가 되지 않는 길을 만들고 이를 관철시켰다. 이승만은 소련의 점령이나 미소 공동신탁통치 등 그 어떤 형태로든 소련의 한반도 문제 개입은 곧 한반도 전역은 물론 유라시아대륙의 공산화임을 파악하고 신탁통치반대에 이은 반소․반공노선과 공산주의자들의 반란과 전쟁에 단호히 맞서며 한-미동맹체제로 자유민주적 대한민국의 건국을 일구어냈다.

넷째, 이승만 대통령은 민족사 최초의 민주공화제를 만든 대한민국에 민주공화제가 계속되고 자유와 번영의 토대이자 근간을 지키는 것이란 곧 공산주의의 위협을 막아내는 것이라는 입장에서 대한민국 정부를 이끌고 동일한 인식하에 국제적 연대를 이끌었다. 한국만 아니라 세계적으로 민주주의 존속과 성숙이란 곧 반공주의로 가능한 것이었다. 이승만은 아시아민족반공대회와 세계반공기구를 이끌고 구성하는데 주도적 역할을 하고 필리핀, 대만, 베트남 등으로 더 이상의 공산주의 확산을 막고 공동 대응하는데 주력하였다.

이승만은 1910년 일본의 강제적 한국합방과 1917년 러시아 공산주의혁명이라는 세계를 떠도는 두 개의 전체주의이자 제국주의 세력에 분연히 맞서 자유민주적 세계가 가야 할 방향을 제시하고 싸워야할 대상을 명확히 하며 최선두에 서서 싸웠다. 세계와 대한민국이 가야할 이정표를 만들어 세웠던 것이다. 그리고 이승만은 결국 대한민국을 독립, 건국시키고 민주공화제적 나라를 만들어 세계적 모델국가를 만드는 토대를 제공하였다. 일본 군국주의에 이은 소련 제국주의이자 공산제국주의에 대한 반제, 반공노선과 실천은 1978년 중국의 개혁개방과 1991년 소련의 해체, 그리고 공산주의 북한의 문명궤멸로 빛을 발했다. 그리고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체제에 의한 대한민국의 기적 같은 발전으로 구체화되었다.

칼 포퍼(K. Popper)의 지적대로 이승만은 결코 다른 지도자들처럼 하기 쉬운 ‘추상적 선(善)’을 말하지 않았고 오직 ‘구체적 악(惡)’과 맞섰고, 싸웠고, 이겨냈던 것이다. 그렇기에 1965년 이승만 대통령 서거 후 박정희 대통령도 이승만을 기려 “역사를 헤치고 나타나, 자기 몸소 새 역사를 짓고 또 역사위에 숱한 교훈을 남기고 가신 조국근대화의 상징적 존재”라고 표현하고 조의를 표했다. ‘역사를 헤치고 나타나, 새 역사를 짓고, 역사적 교훈을 남겼다’는 표현 그대로 우남 이승만 대통령의 반공주의적 정치노선과 대한민국 건국은 세계사적 의의를 갖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승만은 세계사와 세계인이 가야할 길을 밝혔고 민족사의 새로운 장을 만들어 낸 세기(世紀)적 인물이자 세계사(世界史)적 인물이었던 것이다.(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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