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건국과 이승만 대통령(양동안 교수 발표문)

관리자
2017-1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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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건국과 이승만 대통령


대불총 현대사 재조명 세미나, 양동안 교수의 발표문

 

양동안 한국학중앙국학원 명예교수   


               <목 차>

           Ⅰ. 이승만의 건국구상
           Ⅱ. 이승만의 초기 건국투쟁
           Ⅲ. 선거에 의한 정부수립 노선 관철  
           Ⅳ. 5․10선거와 정부수립
           Ⅴ. 대한민국 건국일 논란                        
           Ⅵ. 결론                                    


 Ⅰ. 이승만의 건국구상

 대한민국은 여러 사람들의 애국적 노력에 의해 건국되었다. 여러 사람들의 건국노력은 이승만이라는 지도자에 의해서 조직되고 독려되었으며, 만일 이승만의 그러한 역할이 없었더라면 오늘의 대한민국은 건국되지 못했을 가능성이 크다. 그래서 이승만은 대한민국 건국에 있어서 결정적인 역할을 한 지도자로 평가된다.  

 이승만은 1945년 10월 귀국과 함께 조속한 독립(건국)을 표방하며 건국운동을 시작하면서 새로운 국가의 건국 추진 방법에 대해서 집중적으로 언급했다. 새로 건국될 국가가 어떤 국가여야 하는가에 대해서 구체적인 언급을 할 경우 정치세력들의 단합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치게 될 것을 우려했기 때문으로 추정된다.

이승만이 귀국과 함께 밝힌 새로운 국가의 건국 추진 방법의 내용은 다음 3가지로 정리될 수 있다.

 첫째, 모든 정치세력의 단합에 의한 건국 추진이다.

 이승만은 귀국 후 가진 최초의 기자회견에서 “우리의 합동통일에 대한 기술을 국외에 보일 필요가 있다.…자주독립의 제1보는 통일 단결이 두 가지 뿐이다.”라고 말했으며,1) 뒤이어 가진 국내 정치인들과 면담에서도 “합동통일을 유일한 방법 수단으로 하여 자주독립의 조급한 실현을 도모할 것만이 우리에게 맡겨진 절대한 과제라는 것을 믿고 오직 이 길을 위하여 단합하는 전진이 있기만 바랄 뿐입니다”라고 말했다.2) 

 이승만은 이러한 민족통합을 위해 공산당에 대해서도 포용적인 태도를 표명했다. 그는 조선독립촉성중앙협의회 준비모임에서 “공산주의든지 민주주의든지 서로서로 악수할 점이 있으면 지금은 무조건 악수하고 나갑시다”라고 말했고,3) 한 방송연설에서“나는 공산당에 대하여 호감을 가지고 있는 사람입니다. 그 주의에 대하여도 찬성하므로 우리나라의 경제대책을 세울 때 공산주의를 채용할 점이 많이 있습니다”라고도 말했다.4) 

 이승만은 조속한 자주독립실현을 위한 정치세력 통합노력이 공산당의 방해로 실패한 후 강력한 반공입장을 표명했다. 이승만의 반공은 조속한 건국을 위해 필요한 정치세력의 단합을 파괴하는 ‘분열지향적 반공’이 아니라, 공산당이 정치세력의 단합을 파괴한데 대한 반발로써 취해진 ‘통합지향적 반공’이었다.

 둘째, 자주적인 건국 추진이다.

 이승만은 귀국직후 신탁통치설이 언론매체에 보도된 후 그에 대한 반대입장을 표명하면서 “미소 양국을 물론하고 우리나라의 자주독립을 방해하면 우리도 이와 싸울 수밖에 없을 것이다”라고 천명했다.5) 그 후 이승만은 기회 있을 때마다 자주독립을 역설했다. 이승만은 “우리가 우리 뜻대로 만드는 것이 우리의 정부이지 미소공위나 만국회의에서 만드는 것은 우리의 정부가 아니다”라고 말했고,6) “우리의 최대 불행은 미소 양국의 이념차이로 인한 혼돈에 아무 관계도 없이 끌려 들어간 것이다. 미소 양국은 각기 자기들의 문제를 혼돈하지 말고 우리로 하여금 국권을 회복하도록 하여야 할 것이다”라고도 말했다.7) 심지어는 그가 희망한 대로 한국문제가 유엔총회에 상정되었을 때도 한편으로는 그것을 환영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우리 문제를 외국손님들이 아무리 좋게 해결하여 주려하여도 한인들의 의사를 모르고는 우리 문제를 좋도록 해결할 수 없을 것이다. 한국문제는 한민족 자신의 역량에 의하여 자주적으로 해결해야 할 것이다”라고 말했다.8) 

 이승만의 민족자주의식은 20대 청년시절부터 품어온 뿌리 깊은 것이었다. 그는 대한제국 말기 러․일전쟁 발발 후 옥중에서 저술한 그의 저서에서 “관원이나 백성이나 국권을 보호하는 일에 대하여 조금이라도 남을 의뢰하든지 혹 남의 힘을 빌어 일을 하고자 하는 자는 곧 나라를 마지막 팔고 천만고에 대역이라 부디 조심, 부디 경계할지어다.”라고 민족자주의식을 역설했다.9) 

 셋째, 민중의 뜻에 따른 선거에 의한 정부수립이다.

 이승만은 귀국 직후  “우리는 하루 빨리 뭉치고 대동단결하여 우리의 자주독립을 얻어야 한다.…한데 뭉치어서 우리 땅을 우리 국가를 찾아 놓고 전인민이 총선거를 단행하여 새 국가를 세우지 않으면 안 될 줄 안다”고 말했다.10) 이승만은 1945년 11월 2일 독립촉성중앙협의회 결성을 위한 정당 단체 대표자들의 회합에서 제시한 자기가 기초한 4대연합국에 보내는 결의문에서 “우리는 임시정부가 연합국의 승인 하에 환도하면 1년 이내에 국민선거를 단행할 것이요.”라고 천명했다.11) 이승만은 또 1946년 4월 제1차 미․소공동위원회 기간 중에 가진 기자회견에서 “제2차 대전이 시작된 이후로 연맹국이 연속 선언한 바와 같이 해방된 나라에서 정부수립과 인선에 대하여 그 나라 민중의 공원(公願)을 따라서 행한다 한 주의를 우리는 고집하려는 결심”이라고 천명했다.12) 

 이승만의 민중의 뜻에 따른 선거에 의한 정부수립론은 미․소의 조정에 의한 통일독립의 가능성이 희박해지자 선거에 의한 남한 과도정부수립론으로 연결되었다. 그는 1946년 12월 미국을 방문하여 미국무성에 제출한 한국문제 해결에 관한 건의서에서 “남조선 지역에서 행정을 담당할 과도정부가 선거에 의해 수립되어야 한다”고 제시했다.13) 

 이승만은 건국추진 방법에 관한 이상과 같은 천명과 더불어 새로 건국될 국가가 어떤 국가여야 하는가에 대해 다음 2가지를 천명했다.

첫째, 통일된 국가여야 한다는 것이다.

 1945년 11월 2일 독촉중앙협의회 결성 집회에서 이승만이 기안한 4대연합국에 보내는 결의문을 통해 다음과 같이 촉구했다.

 “조선을 남북의 양점령구역으로 분할하는 가장 중대한 과오는 우리의 자취한 바가 아니다. 우리나라는 양단되었다.…우리 조선을 마치 양단된 몸과 같이 양단한 것은 우리가 자취한 바가 아니요 귀 열국이 강행한 것을 이에 선명치 않을 수 없다. 이와 같이 양된 몸으로서 어찌 생존하여 적당한 활동을 계속할 수 있을 것인가.…우리의 전민족적 생활을 통일로써 조직하는 기회가 허여되기를 이에 단연코 요구하는 바이다.”14) 

 이승만은 또 1946년 1월 서울에서 미․소공동위원회 예비회담이 개최되었을 때 한 방송연설을 통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미국군대가 점령한 남선일대에는 전부를 개방하여 누구나 자유로 래왕하게 하는데 북선으로는 신문기자나 상인과 농민을 막론하고 래왕을 막아서 한 나라 한 백성으로 하여금 초․월과 같이 막히게 하니 이것을 더 연타(延拕)하면 결국은 한 나라를 두 쪽에 만들뿐 아니라 한 백성을 두 진영으로 나누어 영구히 자립할 역량을 조잔(凋殘)케 하는 것입니다.…이번 미․소협의에 절실히 근본적 해결책을 연구하여 곧 38도의 문제를 취소시켜서 우리 3천만 민중으로 하여금 다시 한 단결을 이루어 장애가 없도록 해야 할 것이다.”15) 

 이승만은 남한지역에 임시정부나 위원회 같은 것을 만들 필요가 있다고 밝힌 정읍발언(1946년 6월 3일)을 한 후에도 남한의 단독정부 수립론을 경계하고 통일독립을 촉구하는 성명을 계속 발표했다. 이승만이 정읍발언 이후 남한의 단독정부 수립론을 경계하고 조속한 통일을 촉구하기 위해 발표한 성명의 대표적 사례로는 아래와 같은 것들을 들 수 있다.

<1946년 6월 12일> “[미․소]공동위원회가 다시 재개될 희망이 없으니 남조선만이라도 정부를 세워야 되겠다고 조급하는 태도를 보이매 이 때가 가장 신중을 기하며 망동과 망언을 삼가야 되겠다.”16) 

<1946년 8월 19일> “혹은 정부를 조직하자 또는 자율적으로 독립을 전취하자 하여 공론이 자못 비등하나 아무리 급하더라도 시기를 따라서 계단을 따라 진행하지 못하면 도리어 위험한 지경에 빠지기 쉬운 것이다. 그러므로 먼저 민족통일을 이룬 후에야 무엇을 하든지 공효가 속할 것이요 통일이 못되면 우리끼리 분쟁분열하는 중에서 아무것도 이루지 못할 것이다.…모든 동포는 독립의 지체되는 것을 걱정하지 말고 민족통일을 속성(速成)하기로만 노력하자.”17) 

<1946년 10월 7일>“좌우합작의 중요목적은 미․소공위를 속개시키어 38선을 철폐하고 남북을 통일한 정부를 수립하자는데 있었기 때문에 나는 무조건으로 지지하고 과거 5개월 동안 정치적으로 침묵을 지켜왔다.…좌우합작이 성립되어 38선이 철폐되고 남북통일정부가 수립되면 그 정부가 어떠한 정부던 그 정부에 들어가는 사람이 어떠한 사람이던 나는 한 시민으로 이를 무조건 지지하겠다.”18) 

 이승만이 남한정부 수립에 관해 최초로 발언한 1946년 6월 3일의 정읍발언에 포함된 남한 지역의 ‘임시정부 혹은 위원회’나, 이승만이 1946년 12월 미국 방문시 미국무성에 제출한 한국문제 해결을 위한 건의서에서 최초로 제시한 ‘선거에 의한 남한과도정부 수립’은 모두가 분단을 위한 남한의 단독 정식 정부가 아니라 통일을 추진하기 위한 ‘임시정부’요 ‘과도정부’였다.  

둘째, 민주복지국가여야 한다는 것이다.

 좀 더 부연하자면, 민주주의 정치질서, 수정자본주의 경제질서, 일정 수준 이상의 사회복지제도를 가진 국가여야 한다는 것이다. 새로 건국될 국가가 어떤 국가여야 하는가에 대한 이승만의 구체적인 구상은 1946년 2월에 행한 ‘모범적 국가를 만들자’란 제목의 방송연설에 잘 나타나있다. 이승만은 이 연설에서 건국될 새 나라가 취해야 할 기본 정책으로 총 32개항을 제시했다.19) 그 주요 내용을 부문별로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자유민주주의: 모든 국민의 평등, 18세 이상의 모든 남녀의 투표권과 피선거권 보유, 언론 집회 종교 출판의 자유, 정치운동의 자유 보장, 영장 없는 체포 금지,  가정의 보호, 법원의 영장 없는 재산침해 금지, 여행과 물품운송의 자유보장.

 △수정자본주의: 중요한 공업, 광업, 삼림, 은행, 철도, 통신, 운수 등과 모든 공익기관 등의 사업을 국유로 발전시킴, 모든 상업을 정부검열 하에 두어 소비자와 산출자와 무역자에게 균등한 이익 담보, 고리대금 금지, 쌀과 생필품의 가격상한제 실시, 빈궁한 국민은 면세하고  소작인에 대한 추가징세 금지하며 대농장에는 상속세 중과,

 △사회복지: 의무교육제 실시(의무교육비 정부부담), 국민의 문화생활 경비 정부부담, 모든 근로자에 대한 직업보장, 최저임금제 실시, 근로자의 생계보호, 모든 근로자와 농민의 의료비 정부 부담, 14세 이하 남녀의 노동금지, 성인 남자 노동자는 1일 8시간(모든 여성과 16세 이하 남자는 1일 6시간)이상의 노동 금지, 임산부에 대해 모든 의약과 사회적 보조를 제공, 생계를 위한 활동 보호.

 이승만은 ‘모범적 국가를 만들자’에서 통치원리의 항구적 요소들이 내포된 위의 3개 부문 외에 토지개혁과 일제잔재 척결에 관한 정책도 제시했다. 토지개혁과 관련해서는 적몰한 토지는 농민에게 분배할 때 유상으로 분배하고 그 토지대금은 국민을 위한 자금으로 사용함, 큰 농장은 그 지역 농민 다수가 나누어 경작하게 하고 그 토지의 가격은 매년 분할하여 지주에게 상환하도록 함, 모든 몰수 토지는 다시 분배하되 토지소재지 거주 농민이 경작하게 하고 먼 곳에 거주하는 지주에게 주지 않음 등을 제시했다. 일제잔재 척결과 관련해서는 법률 사회 교육 등 모든 기관에서 일본 제국주의 독소를 제거할 것,  일본인이나 친일반역자들이 보유한 재산을 몰수하여 국유화할 것 등을 제시했다.

 이승만은 이상에서 정리한 바와 같은 5가지 요소로 구성된 건국구상에 입각하여 새로운 국가를 건국하기 위한 노력을 전개했다.


 Ⅱ. 이승만의 초기 건국투쟁

 위에서 기술한 건국구상에 따라 이승만이 맨 처음 전개한 건국노력은 1945년 10월 귀국한 직후에 주도했던 독립촉성중앙협의회의 결성이다. 이승만은 귀국직후 좌우진영의 모든 정치세력으로부터 민족의 지도자로 추앙되었다. 이승만은 이러한 위상을 이용하여 모든 정치세력이 단합하여 민족의 조속한 완전독립을 추진하기 위한 기구로 독립촉성중앙협의회의 결성을 유도했다. 이러한 이승만의 유도에 따라 45년 10월 23일 한민당과 공산당을 포함하여 당시 남한에서 활동하던 좌우진영의 모든 정당과 단체가 참여하여 독립촉성중앙협의회를 결성하고 그 회장에 이승만을 추대했다.

 독촉중협은 공산당이 제기한 친일파배제론 때문에 발족과 동시에 활동이 마비되었다. 공산당은 건국추진을 위한 정치세력 통합조직에서 친일파를 배제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주장하면서, 자기들의 그러한 주장이 수용되지 않으면 독촉중협에서 탈퇴하겠다고 협박했다. 공산당의 이러한 주장을 수용하건 반대하건 독촉중협은 마비 혹은 분열될 수밖에 없었다.

 공산당의 주장을 수용하게 되면, 누가 친일파인지를 가려내는 문제로 정치세력 간에 끝없는 논쟁이 계속되면서 정치세력 간의 갈등이 심화되어 독촉중협이 마비되거나 분열될 것이 분명했다. 반대로 공산당의 주장을 수용하지 않게 되면 당시 가장 유력한 정당이었던 공산당이 불참하게 되고 공산당이 불참하면 좌익 전체가 뒤이어 불참하게 되어 독촉중협이 마비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이승만은 공산당의 주장을 수용하지 않기로 결정했으며, 그 결과 공산당을 필두로 좌익진영 전체가 독촉중협에서 탈퇴했다.

 좌익진영의 이탈로 국내 우익진영만의 연대기구로 전락한 독촉중협은 1945년 11월과 12월에 귀국한 임정요인들이 독촉중협을 임정과는 무관한 단체이며 임정과 독촉이 협력할 필요가 없다고 천명함으로써 더욱 무력해졌다. 이승만과 독촉중협은 줄곧 임정봉대를 주장해왔는데 귀국한 임정요인들이 이처럼 독촉중협을 무시하는 태도를 보였으므로 독촉중협은 무기력해지지 않을 수 없었다.  

 독촉중협의 유명무실화로 ‘모든 정치세력의 단합에 의한 건국추진’에 실패한 이승만은 모스크바협정 발표 후 전개된 우익진영의 격렬한 반탁투쟁을 등에 업고 다시 건국운동에 나섰다. 자율정부수립운동으로 호칭되는 이 건국운동은 초기에는 김구가 주도했으나 시간이 흐르면서 대중적 지지도가 높은 이승만이 주도하게 되었다.

 김구세력은 거족적으로 전개된 반탁운동의 열기를 배경으로 우리 민족이 자율적으로 정부를 수립할 것을 천명하면서 그것을 위해 비상정치회의를 구성하고, 이승만의 독촉중협을 비상정치회의에 끌어들여 국회의 성격을 가진 비상국민회의를 구성했다.

 비상국민회의는 이승만과 김구에게 국무회의에 해당하는 최고정무위원회를 조직하도록 위임했으며, 이승만과 김구는 28명으로 구성된 최고정무위원회를 조직했다. 자율정부수립을 위해 구성되었던 최고정무회의는 조직과 동시에 이승만과 미군정의 타협으로 미군정의 최고 자문기관인 남조선 대한민국대표민주의원으로 전환되었다.

  민주의원 의장에 선임된 이승만은 민주의원을 중심으로 반탁투쟁을 조직하고 자율정부수립운동을 전개했다. 이승만이 민주의원의 의장에 선임되면서 자율정부수립운동의 주도권은 김구로부터 이승만에게 넘어갔다. 모스크바협정에 따른 한국문제해결을 위해 1946년 3월 20일부터 서울에서 제1차 미․소공동위원회가 개최되면서 이승만이 김구와 함께 전개한 자율정부수립운동은 소강상태에 빠졌다. 이승만과 김구는 미소공위에 기대를 걸고 지켜보자는 자세를 취했다.

 제1차 미․소공동위원회는 남한의 반탁운동세력을 한반도 통일임시정부 구성의 협의대상에서 제외하자는 소련의 주장에 부딪혀 결렬되었다. 소련은 남한의 반탁운동세력이 공위의 협의대상이 되려면 모스크바협정을 지지하며 공위에 협조할 것임을 서약해야 하며 그러한 서약을 한 후에는 신탁통치 반대를 더 이상 주장하지 않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에 반해 미국은 반탁운동세력이 그런 서약을 한 후라도 신탁통치를 반대할 수 있는 언론자유는 보장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미국과 소련의 이러한 입장차이로 인해 제1차 미․소공위는 무기 휴회되었다.

 제1차 미․소공위가 결렬된 직후인 1946년 6월 3일 이승만은 전라북도 정읍에서 행한 연설에서 “이제 우리는 무기 휴회된 공위가 재개될 기색도 보이지 않으며 통일정부를 고대하나 여의케 되지 않으니 우리는 남방만이라도 임시정부 혹은 위원회 같은 것을 조직하여 38이북에서 소련이 철퇴하도록 세계공론에 호소하여야 될 것”이라고 말했다.20) 

 당시의 한반도정세로 볼 때 이러한 이승만의 발언은 결코 부적절한 것이 아니었다. 북한에는 이미 1946년 2월초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라는 단독정권(북한의 역사책은 그것을 ‘인민민주의 독재정권’이라고 기술하고 있다)21)이 수립되었고, 그 임시인민위원회가 무상몰수 무상분배 방식에 의한 토지개혁 등 북한지역의 사회주의화를 위한 ‘민주개혁’을 실시하고 있었다. 북한에서는 단독 공산정권이 수립되어 있고 사회주의화 작업이 급속히 진행 중인데 한반도 통일임시정부를 구성하기 위한 미․소공위는 결렬된 채 재개될지 여부가 불확실한 상황에서 남한에서만 민족의 주권적 정부가 없이 무한정 미군정의 통치를 받도록 하는 것은 불합리한 일이라 아니할 수 없다.22)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승만의 정읍발언은 남한 지역의 거의 모든 정치세력과 미군정으로부터 비판되었다. 좌익세력은 그 발언을 남한단독정부수립론으로 규정하고 그러한 남한단정론은 민족분열을 초래하는 반민족적인 망언이라고 비난했다. 우익진영의 한독당도 이승만의 발언을 비난했다. 미군정도 이승만의 정읍발언을 비판했다. 미군정장관 러취(Archer Lerch)는 “이 박사가 남조선에 따로 정부를 세워야 된다고 하였다면 그것은 그의 입장에서 한 말이고 군정청을 위해서 한 말은 아니다.…나는 군정장관으로서 남조선 단독정부 수립에 대해서는 전연 반대한다”라고 비판했다.23) 

 정읍발언에 대한 비판이 다방면에서 거세게 일어나자 이승만은 잠시 남한정부수립론을 접고 조속한 통일추진을 역설하면서 자신의 남한정부수립론을 민족분열행위로 몰아가려는 비판들을 잠재웠다. 그러면서 장차 자신의 건국구상을 실천하는데 동원할 대중운동조직을 강화했다. 그는 무기력한 상태에 빠져 있던 독립촉성국민회를 개편․강화했으며, 민족통일총본부라는 새로운 건국운동단체를 결성했다.

 그와 아울러 이승만은 한국문제를 유엔총회에 상정시켜 모스크바협정으로부터 한국문제를 이탈시키려 시도했다. 이승만은 1946년 9월 임영신을 민주의원의 유엔대표로 임명하여 뉴욕의 유엔본부에 파견했다. 그리고 임영신을 통해 모스크바협정의 무효 및 한국 정부의 즉각적인 수립과 유엔 가입을 호소하는 청원서를 유엔에 접수시키는 등 한국문제를 유엔 총회에 상정하려고 노력했다. 한국문제의 유엔총회 상정을 위한 이승만의 노력은 유엔에 의해 무시되었다.

 이승만이 이러한 노력을 전개하고 있는 동안 미군정은 남한에서 미국의 한반도정책에 협조할 새로운 세력을 양성하고 이승만과 김구를 남한정계에서 일시 퇴출시키라는 미국무성의 지시24)를 이행하기 위해 노력했다.
 
미군정은 새로운 협조세력의 양성을 위해 김규식과 여운형의 좌우합작위원회를 적극 지원했고, 좌우합작위원회가 주도할 수 있는 새로운 미군정 최고자문기관인 과도입법의원의 구성을 추진했다. 미군정은 과도입법의원을 구성함에 있어서 민선의원에 당선된 이승만 추종자들의 당선을 무효화하고, 관선의원의 임명에서 이승만과 김구를 비롯한 우익진영 핵심인사들을 배제했다.

  미군정은 또한 입법의원의 설립과 동시에 민주의원의 미군정 최고자문기관으로서의 지위를 박탈했다. 뿐만 아니라, 미국은 미․소공동위원회 재개를 위한 소련과의 협상에서 반탁운동세력의 언론자유가 보장되어야 한다던 종전의 주장을 철회하는 중대한 양보를 단행했다. 이승만은 미군정의 우익진영에 대한 견제가 강화되고 미국의 한반도정책이 자기가 희망하는 것과 반대되는 방향으로 진행되는데 위기감을 느끼게 되었으며, 그러한 위기상황을 돌파하기 위해 1946년 12월초 미국을 방문했다.

  이승만은 미국에서 미국대통령 미국무장관 등 미국정부의 고위관리들을 만나서 미국의 대한정책과 남한정부수립의 필요성을 호소하려 했지만 미국무성의 방해로 인해 미국정부 고위관리는 아무도 만날 수 없었다. 미국정부 고위관리들을 만나지 못하게 되자 이승만은 약 3개월의 미국 체류기간 중 문서를 통해 자신의 입장을 알리는 선전활동에 주력했다.

 이승만은 미국무성에 한국문제 해결에 관한 건의서를 제출했다. 이 건의서에서 이승만은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

“남북조선이 통일되고 뒤이어 남북 총선이 이루어질 때까지 남조선지역에서 행정을 담당할 과도정부가 선거에 의해 수립되어야 한다. 이 남조선지역의 과도정부는…유엔에 가입되어야 하며 한반도에 대한 군사점령 및 기타 중요문제들에 관해 미국 및 소련과 직접 협상할 수 있도록 허용되어야 한다.…남조선지역에 주둔하는 미군은 미․소 양국의 점령군이 한반도에서 동시에 철수할 때까지 주둔해야 한다.”25) 

 이승만은 또 언론 매체들을 상대로 발표한 성명을 통해 “조선인민의 독립요망이 즉시 실시되지 않으면 전쟁이 제래될 것”이라고 말하기도 하고,26) “미국무성 내 일부 분자는 조선에 독립을 수여한다는 미국 측 언약의 실천을 방해하고 있는 것 같다.…이들은 공산주의에 기울어지고 있는 것 같다.…남조선 주둔 사령관 하지 중장은 좌익에 호의를 가지고 있으며, 남조선 미군정 당국은 조선의 공산당 건설과 이에 대한 원조 노력을 계속하고 있다.…하지 중장은 남조선입법의원 관선의원의 상당수를 공산주의자에게 배정 임명했다.”고 주장하기도 했다.27) 

 이러한 이승만의 비난에 대해 미국무성은 무시하는 전술을 취했다. 이승만을 상대로 공식적인 반응을 보이면 결과적으로 이승만의 정치적 위상을 높여줄 것이라는 판단 때문이었다.  하지도 대체로 무시하는 전술을 취했다. 하지는 이승만이 미국에 체류하고 있던 1947년 2월 미국에 가 있으면서 이승만을 만나지도 않았을 뿐만 아니라 이승만의 비난에 대해 아무런 공식적 대응을 하지 않았다. 대신에 하지는 이승만을 견제해줄 재미 한인사회의 반이승만 성향의 지도자를 귀국시키는 공작을 전개했다. 그러한 공작의 일환으로 하지는 서재필을 미군정의 최고의정관으로 임명하여 자기와 함께 서울로 오려 했다.28) 


  Ⅲ. 선거에 의한 정부수립 노선 관철

 이승만은 미국체류기간 중 미국정부의 고위관리들은 만나지 못했지만 미국대통령 트루먼이 미국의 소련에 대한 정책을 종전의 협력기조에서 대결기조로 전환할 것임을 알리는 트루먼 독트린을 발표한 것을 보고 미국의 한반도정책이 남한 정부수립 쪽으로 변경될 것이라는 확신을 가졌다. 그러한 확신을 가지고 1947년 4월 초 귀국한 이승만은 귀국직후 다음과 같은 내용의 성명들을 발표했다.

  “내가 미국에 가서 가장 역설한 바는…하루 바삐 자치 자주하는 정부수립이 필요하다는 것이었고,…미국의 당국자들과 모든 공론이 다 우리의 주장을 옳게 시인하기에 이른 것입니다.…트루먼 대통령이 한국에 민주정체 건설을 절대 지지하며 국무성 당국 모씨는 한국에 총선거로 독립정부를 수립함에 찬성했다.”29) 

 “남한에 있어서 총선거가 지연되고 미군정이 실패한 것은 하지 중장이 공산파와 합작을 고집하였던 때문입니다.…우리 동포는 한데 뭉쳐 임시입법의원으로 하여금 총선거법을 급속히 제정케 하여 남북통일을 위한 남한과도정권을 수립하여야 합니다.”30) 

 1947년 4월말부터 본격적으로 주장된 이승만의 총선에 의한 남한 정부수립론은 3개 방면으로부터 비판․견제되었다.

첫째 좌익과 중간파가 비판했다. 좌익은 이승만의 그런 노력이 이승만-김구-김성수의 세력을 배제한 한반도통일정부를 구성하여 남북한 전체를 공산화하려는 그들의 계획 실천에 방해가 되기 때문에 비판했다. 중간파는 이승만의 노력이 남한에서의 좌우합작과 남북한 정치세력의 합작이라는 2단계 합작을 통해 한반도통일정부를 구성하려는 그들의 계획 실천에 방해가 되기 때문에 비판했다.

둘째는 미군정으로부터 견제되었다. 미국은 유럽지역 정책에는 트루먼 독트린을 적용하면서도 한반도문제에 대해서는 트루먼 독트린 보다는 종전의 미국무성 정책, 즉 모스크바협정의 틀 속에서 소련과 합의하여 해결한다는 정책을 유지하고 있었다. 이승만의 총선에 의한 남한 정부수립론은 미국의 한반도정책 실천을 방해하는 것이기 때문에 미군정은 이승만의 그런 활동을 견제했다.

셋째는 자율정부수립운동의 동지인 김구세력으로부터의 견제이다. 김구세력은 이승만의 방미기간 중 우익진영의 3개 통일전선기구인 비상국민회의, 민족통일총본부, 독촉국민회의를 통합하여, 우익진영의 유일 최고기구로 임시국회 기능을 수행할 국민의회를 구성했다. 그들은 이어 국민의회 대의원대회를 개최하여 임정을 정부로 봉대할 것을 결의하고 임정을 개편 강화하여 임정 주석에 이승만, 부주석에 김구를 선출했다. 그러나 이승만은 귀국 후 임정 주석 취임을 거부하고 총선에 의한 남한 과도정부수립으로 직행할 것을 주장했다. 김구세력은 이승만의 이런 행보가 자기들의 계획을 무산시키는 것이기 때문에 견제했다.

 1947년 5월 21일 제2차 미소공위가 개막되면서 이승만세력과 김구세력은 미․소공위와 미군정을 상대로 공동투쟁을 전개해야 했기 때문에 정부수립 방법을 둘러싼 양측간의 갈등은 노골화되지 않았다.

 제2차 미․소공위는 제1차 미․소공위를 결렬시킨 문제와 본질적으로 동일한 문제(미․소공위의 협의 대상이 되려면 신탁통치 반대를 주장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모든 반탁운동 관련 단체들에서도 탈퇴해야 한다는 소련의 주장과 반탁운동 관련 단체에서 탈퇴하는 것까지 요구해서는 안 된다는 미국의 주장의 대립)로 인해 47년 7월 초부터 교착상태에 빠졌고, 미국정부는 7월말부터 대한정책을 변경하기 시작했다.

 한반도문제를 미․소합의에 의해서 해결하는 것이 아니라 미․영․중․소 4개국 외상회의나 유엔을 통해 해결하기로 한 것이다. 이처럼 미․소공위가 교착→결렬의 단계에 이르고 미국의 대한정책이 변경됨에 따라 이승만의 정부수립노력에 대한 미군정의  견제는 서서히 해소되었다.

 미소공위가 교착상태에 처한 시점인 7월 중순 이승만은 총선에 의한 정부수립을 추진할 정치조직으로 한국민족대표자대회를 구성했다. 독촉국민회 조직을 통해 각 지역에서 대중투표를 통해 선출된 200명의 대표자들로 구성된 민족대표자대회는 앞서 김구세력이 주도하여 구성한 국민의회와 같은 국회의 기능을 염두에 둔 기구였다.

 이승만은 김구세력이 주도하는 국민의회를 통해서는 총선직행 방식에 의한 정부수립을 관철할 수 없다고 판단, 민중의 뜻에 기초한 새로운 ‘대의기구적 단체’를 구성한 것이다. 이승만이 민대를 통해 총선을 통한 정부수립을 적극적으로 추진하자 국의-임정을 통한 정부수립을 추구해온 김구세력은 그에 반발했다.

 미국이 한반도문제를 유엔총회에 상정한 47년 9월 이후 이승만은 총선을 통한 정부수립운동을 더욱 강화했다. 유엔총회가 1947년 11월 14일 유엔감시하의 남북한 총선을 결의한 직후 이승만은 유엔결의안의 이행 준비를 위해 유엔한국임시위원단이 한반도를 방문하기 전에 그들에게 민중의 뜻을 올바로 전달한 민족대표단을 구성하기 위한 총선을 조속히 실시하자고 주장하면서 총선을 통한 정부수립운동에 박차를 가했다. 이승만의 총선을 통한 정부수립운동 강화는 반대세력으로부터의 반발 강화를 초래했다.

 좌익은 이승만의 총선에 의한 정부수립 추진을 남북분단 영구화 음모라고 비난하고, 미소공위를 사수할 것과 한국문제의 유엔이관을 반대했으며, 한국문제를 유엔에서 처리하지 말고  미․소 양군을 조기에 철수하여 한국인들끼리 통일정부수립문제를 해결토록 하자는 소련의 제안을 지지했다.

 중간파는 한국문제의 유엔이관문제와 미소양군조기철수문제에 대해 분열된 입장을 표명했다. 김규식과 안재홍 등 중도우파는 한국문제의 유엔총회상정을 지지하고, 소련이 제안한 미소양군 조기철수는 남북한을 모두 공산화할 위험이 있다는 이유로 반대했다.31) 그에 반해 근민당, 조선공화당, 사회민주당 등 중도좌파계 군소정당들은 한국문제의 유엔이관에 반대하고 소련의 미․소 양군 조기철수론을 지지했다.

 그들은 또 남북한의 영구분단을 막기 위해 남북정당대표회의(남북협상)를 개최하여 통일정부수립문제를 타결하자고 제안하면서32) 남한의 정부수립에 반대했다. 김규식과 안재홍 등도 시간이 지나면서 중도좌파들의 주장에 동조했다.

 김구세력은 한국문제의 유엔총회 상정을 지지하고, 미소 양군 조기철수론을 반대하면서도, 이승만-김성수세력의 정부수립노력에는 반대하는 태도를 취했다. 한독당은 47년 10월 중순 중앙집행위원회에서 민대와의 관계를 단절할 것과 남북대표회의(남북협상)를 조직할 것을 결의했다. 남한에서의 정부수립 방법을 둘러싼 이승만세력과 김구세력간의 갈등이 두 세력의 결별로 확대될 가능성이 드러난 것이다.

 이승만은 좌익과 중간파의 비판은 무시했으나 김구세력의 비판․견제에 대해서는 크게 우려하면서 김구를 끌어안으려는 노력을 적극적으로 전개했다. 이승만은 김구세력을 끌어안기 위해 민대의 간부들을 소집하여 민대를 해체해서라도 국의와의 통합을 이룩하라고 촉구했다. 이러한 이승만의 적극적인 김구 끌어안기가 효과를 나타냈으며, 유엔총회가 유엔감시 하의 남북한 총선 실시를 결의한 지 2주 후인 1947년 11월 30일 이승만-김구 양인은 회담을 갖고 정부수립에 관한 두 지도자의 노선이 일치한다는 사실을 확인하고, 우익진영의 단합을 위해 국의와 민대를 통합할 것을 합의했다.

 김구는 다음날 그러한 합의를 확인하기 위해 이승만의 정부수립노선을 지지하는 다음과 같은 성명을 발표했다. “유엔결의안을 지지하는 바이다.…만일 일보를 후퇴하여 불행히 소련의 방해로 인하여 북한의 선거만은 실시하지 못할지라도 추후 하시든지 그 방해가 제거되는 대로 북한이 참가할 수 있게 하는 것을 조건으로 하고 의연히 총선거의 방식으로 정부를 수립하여야 한다. 그것은 남한의 단독정부와 같이 보일 것이나 좀더 명백히 규정하자면 그것도 법리상으로나 국제관계상으로 보아 통일정부일 것이오 단독정부는 아닐 것이다. 이 박사가 주장하는 정부는 상술한 제2의 경우에 치중할 뿐이지 결국에 내가 주장하는 정부와 같은 것인데 세인이 그것을 오해하고 단독정부라고 하는 것은 유감이다.”33) 

 이와 같은 이-김의 합의에 따라 국의와 민대의 통합교섭대표단은 12월 2~3일 회합을 개최하여 통합에 합의하고, 통합을 위한 양측의 합동대회를 12월 12일에 개최할 것 등에 합의했다. 국민-민대 통합합의가 이루어진 다음날 김구는 “국민의회와 민족대표자회의와의 완전합작은…심히 경하할 일이다. 나와 이승만 박사는 조국의 자주독립을 즉시 실현하자는 목적에 완전 합의를 보았다. 나도 이 박사를 존경하는 한 사람이므로 양인 간에는 본래 다른 것이 없는 것이다”라는 성명을 발표하여 총선에 의한 정부수립문제에 대한 양인 간의 입장일치와 협력을 재확인했다.34) 

 이승만의 김구 끌어안기가 성공함으로써 총선에 의한 남한 정부수립에 대한 우익진영의 단합적 노력은 밝은 전망을 갖게 되었다. 그러나 그러한 전망은 47년 12월 2일에 발생한 장덕수 암살사건과 그로 인한 김구세력과 김성수세력 간의 감정대립으로 인해 무산되었다.

 장덕수 암살의 배후에는 김구세력이 연루된 것으로 추정되었고, 미군정 경찰은 국의측 간부(곧 김구세력에 속하는 사람들) 몇 사람이 장덕수 암살사건에 연루되었다는 이유로 국의-민대합동대회의 집회를 허가해주지 않았으며, 그에 따라 앞서 합의된 국의-민대합동대회가 개최되지 못했다.

 설상가상으로 민대는 12월 20일 김구세력의 국의 측 분노를 폭발시키는 조치를 취했다. 민대는 다음 해 1월 초순에 남북한 총선실시 준비를 위해 서울에 올 예정인 유엔한국임시위원단에게 우리 민족의 의견을 대변하고 그들과 협조할 한국민족대표단의 명단을 발표했는데, 국의 측과 사전 협의 없이 발표한 그 명단은 민대계열 인사들 위주로 선정되었다. 이러한 민대의 행동은 국의를 이끄는 김구세력의 분노를 폭발시켰다.

 그 분노 폭발은 남한총선노선에 대한 김구의 비판성명으로 나타났다. 민대의 민족대표단 명단 발표가 있은 지 이틀 후 김구는 “우리는 여하한 경우에든지 단독정부는 절대 반대할 것”이라고 선언했다.35) 

 김구의 폭탄선언이 있은 후 이승만은 김구와 거의 연일 접촉하면서 민대의 경솔한 행동을 사과하고 김구를 달랬다. 이승만의 이러한 노력으로 이-김은 국의-민대의 조속한 통합 실현과 민족대표단의 재구성에 합의했다. 그러나 이처럼 봉합된 듯 했던 이-김 동반관계는 김구를 남북협상에 끌어들이려는 남북한의 남북협상 추진세력의 치열한 공작에 밀려 1948년 1월 하순 다시 균열되고 말았다.
   

 Ⅳ. 5․10선거와 정부수립

 유엔총회의 한국문제 결의의 이행을 준비하기 위해 1948년 1월 초 서울을 방문한 유엔한국임시위원단은 남한주둔미군사령관과 북한주둔소련군사령관에게 각자의 관할지역에서의 유엔위원단 활동에 협조해줄 것을 요청했다. 남한주둔미군사령관은 그 요청을 수락했으나, 북한주둔소련군사령관은 그 요청을 거부하면서 유엔위원단의 북한지역 방문을 허락하지 않았다. 북한에 들어갈 수 없게 된 유엔위원단은 자기들의 향후 활동방향에 대한 지침을 유엔소총회에 물었고, 유엔소총회는 1948년 2월 26일 총선실시가 가능한 지역(곧 남한)에서 유엔감시 하에 총선을 실시하도록 결의했다.

 이러한 유엔소총회의 결의가 있은 후 유엔위원단과 미군정이 협력하여 1948년 5월 10일 남한에서 정부수립을 위한 총선을 실시하기 위한 제반 준비조치들이 취해졌다. 이승만의 선거에 의한 남한정부수립 노력은 이제 5․10선거를 통해 결실을 맺게 되었다.  

 5․10선거는 내전상태와 유사한 상황에서 진행되었다. 내전상태와 유사한 상황은 좌익세력이 남한정부수립을 저지하기 위해 무장 폭력투쟁을 포함한 다양한 공격을 전개한 데서 비롯되었다. 좌익의 폭력적 선거저지투쟁은 유엔소총회가 남한에서 총선을 실시하도록 결의하면서부터 본격화되었다. 좌익은 유엔소총회의 결의를 ‘조국을 국토양단 민족분열 시키며 남조선을 식민지화 군사기지화 하려는 미제의 노골적인 단정계획’으로 규

정하고 그러한 계획을 분쇄하기 위한 ‘성스러운 전인민적 항쟁에 전국의 동포와 일체의 애국자가 총동원 궐기할 것’을 촉구했고, ‘단선단정 분쇄하고 양군철퇴로 민주주의인민공화국을 전취하자’고 선동했다.36) 좌익세력은 그와 동시에 남북협상에 동조하는 중도파 및 김구세력 등과 연대하여 남한 총선을 저지하기 위한 정치적 선전공세를 전개했다.

 3월 29일부터 선거인 등록이 개시되자 좌익은 본격적인 무장투쟁에 나섰다. 그들은 “미제와 그 앞잡이 이승만 김성수 등 매국노 한민당계열의 지지 밑에 국토를 양단하고 민족을 분열하며 조국을 영구히 미제의 식민지화 하려는 단정단선을 인민의 힘으로 분쇄하자”고 선동하며,37) 선거인등록을 방해했다. 남로당은 4월 1일부터 무장폭동 및 무장유격대 활동을 위한 선전선행대(宣傳先行隊)를 조직하고, 그와 병행하여 각 지구 각 분야별로 소규모의 보조적 무장투쟁조직으로 백골대․유격대 등을 조직하여 선행대와 함께 무장투쟁을 전개하도록 했다.38) 좌익의 무장투쟁조직은 전국 각지에서 선거인 명부작성의 기초가 되는 호적서류가 있는 면사무소, 선거인 등록업무를 취급하는 선거사무소, 경찰관서와 우익인사의 가옥 등을 습격․방화하고, 선거업무 관련 인사와 경찰관 및 우익인사 등을 협박하고 살해하며, 교통․통신기관과 시설들을 파괴하면서 선거인등록업무를 방해했다.39) 

 좌익은 이처럼 남한선거 저지투쟁을 전개하면서 그와 병행하여 북한정권이 마련한 인민민주주의 헌법 초안을 지지하는 캠페인도 전개했다. 북한정권은 2월 13일부터 4월 25일까지 남북한 전역에 적용될 인민민주주의 헌법초안40)을 북한주민에게 알리고 주민들의 지지를 확보하기 위한 선전활동을 대대적으로 전개했다. 남로당과 남조선민전은 북한에서 만든 통일헌법 초안에 대한 지지를 선동하면서 그 헌법초안에 대한 남한 좌익세력의 지지 연판장을 만들어 북조선인민회의에 보냈다.41) 북한정권은 4월 9일 이 헌법에 따라 한반도의 중앙정부를 수립하기로 결정했으며,42) 북조선인민회의는 4월 29일 조선임시헌법제정위원회가 만든 통일정부 수립을 위한 헌법초안을 원안대로 통과시켰다.

 남한좌익세력이 북한정권의 통일 헌법초안을 지지하는 캠페인을 전개하면서 남한에서 정부수립을 위한 선거를 저지하는 투쟁을 전개했다는 것은 그들의 선거저지투쟁이 남북한공산화통일, 곧 남한 공산화를 목적으로 한 것임을 분명히 해준다.

 1948년 4월 평양에서 남북협상이 개최된 이후 5․10선거 반대투쟁은 단선반대투쟁 전국위원회를 중심으로 전개되었다. 평양의 남북협상에서는 남북협상에 참여한 모든 정당과 단체들이 단선반대투쟁전국위원회에 참여하기로 결정되었으며, 그에 따라 남로당은 신속하게 단선반대투쟁 전국위원회와 도․시․군 지부를 결성하여 그 위원회의 명의로 5․10선거 저지 투쟁을 선동했다. 이 위원회는 투표일을 5일 앞두고 “남조선의 진상은 미국인들이 자유환경 아래서 선거를 준비하는 것이 아니라 강압과 위협의 환경에서 이를 준비하고 있으며, 단선을 반대하여 일어난 제주도 인민투쟁을 피바다에 잠그고 있다.…어떤 강압과 위협에도 굴종하지 말고 단선 보이코트에 대한 남북조선 제정당사회단체 연석회의의 결정을 실천하며 남조선 단선을 결정적으로 파탄시키자”고 선동하면서 총선반대 진영의 모든 조직에게 총선파탄 총동원령을 내렸다.43) 

 남로당은 투표일 직전인 8일과 9일 전조직을 동원하여 교통․통신기관의 시설 파괴 및 파업을 전개하여 국가마비상태를 초래하려고 노력했고, 투표일에는 투표소를 습격하고 투표에 참여하려는 주민들의 마을을 공격했다.

 좌익의 극렬한 5․10선거 저지투쟁은 남북협상에 동조한 중도파와 김구의 세력에 의해 정치적으로 지원되었다. 그들은 좌익의 남한 총선 저지투쟁에 발맞추어 남한총선을 비난했으며, 남한총선을 저지하기 위한 남북협상에 참여하여 남한의 민중으로 하여금 투표참여를 망설이게 했다. 또한 단선반대투쟁 전국위원회에 참여하여 좌익들의 선거저지를 위한 무장투쟁을 정당화했다.

 남한정부 수립운동을 전개해온 이승만 중심의 우익진영과 미군정청은 남한정부 수립을 위한 5․10선거를 저지하려는 좌익의 무장폭력투쟁과, 좌익과 중도파 및 김구세력이 연대하여 전개한 선전공세로부터 선거를 보호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전개해야 했다. 우선 이승만과 하지는 민중들이 선거에 참여하는 의욕을 가지도록 계몽하는 활동을 전개해야만 했다. 좌익과 중도파의 선거에 대한 악선전으로 인해 민중들이 선거를 오해하고 있을 가능성이 컸기 때문이다.

 이승만은 남한총선 실시가 확정되자 한국역사상 최초로 실시되는 민주선거가 세계의 모범적 선거가 되도록 하기 위해 국민들이 선거에 많이 참여할 것과 유권자들이 올바른 기준에서 후보자를 선택할 것을 호소했다. 이승만은 3월 하순부터 투표일인 5월 10일까지 기회 있을 때마다 성명을 발표하고 기자회견을 해서 유권자들의 선거인등록을 촉구하고, ‘선거 후 미국이 남한에 고등판무관을 두고 한국내정을 좌우할 것’이라느니 ‘한국이 유엔의 신탁통치를 받게 될 것’이라는 등의 좌익과 중도파 및 김구세력 등의 선전이 거짓임을 설명했다.

 그는 또 기만적인 남북협상에 동요하지 말고 투표에 참여하라고 국민들에게 호소했다. 하지는 선거일 발표 이후 총선과 관련된 특별성명을 빈번히 발표했다. 그런 성명을 통해 남북협상을 추진하며 총선을 방해하려는 세력들이 전개하는 선거와 미국의 정책에 관한 각종 거짓 선전들을 반박하면서 대중은 그들의 거짓선전에 속지 말고 선거인 등록을 하고 투표에 적극 참여하라고 당부했다.

 이승만과 하지가 이런 계몽담화를 발표하는 동안 독촉국민회를 비롯한 우익진영의 각 정당과 단체들도 유권자들을 직접 접촉하며 계몽활동을 전개했고 공무원들과 경찰관들도 그런 계몽활동을 지원했다.

 건국운동세력과 미군정은 좌익의 선거저지․파탄투쟁으로부터 선거를 물리적으로 보호하기 위해 향보단(鄕保團)을 조직․운영했다. 선거를 저지하려는 좌익 주도의 파업과 폭동 및 무장투쟁으로 치안혼란이 심각해지고 경찰 및 우익인사들의 사상자가 증가하자 건국주도세력과 미군정은 물리적 차원에서 선거를 보호하는 문제를 놓고 고심했다.

 당시 미군병력은 일반 치안문제에는 개입하지 않았으며, 선거보호를 위해 미군병력이 직접 개입하게 되면 선거의 공정성이 훼손될 우려가 있었다. 선거보호를 위해 동원될 수 있는 공권력은 한국인 경찰뿐이었으며, 한국인 경찰은 총 3만5천여명에 불과했다. 이러한 경찰병력만으로 호적서류를 보관하고 있는 면사무소 1천4백여개소와 유권자 등록 및 투표를 관리하는 선거사무소 1만3천8백여개소, 그리고 좌익이 공격대상으로 삼는 수많은 우익인사들을 보호할 수 없었다.

 그렇다고 자유선거를 실시해야 할 처지에 계엄령을 선포하여 미군과 국방경비대를 동원할 수도 없었다. 이러한 악조건에서 건국주도세력이 도출해낸 아이디어가 향보단이다. 미군정은 건국주도세력의 건의를 수용하여 미군정 경무부장에게 총선보호를 위한 한시적 조직으로 향보단을 조직하도록 했다.

 향보단은 각 지역의 주민들이 경찰의 협조하에 행정단위 별로 조직한 자율적 향토방위조직이다. 18세 이상 55세 미만의 남자 주민들이 참여하는 향보단은 전국적 조직이나 중앙의 지휘부는 두지 않는 단순한 지역주민의  조직으로 운영되었으며, 경찰은 향보단의 조직을 지원하고 해당지역에 사태가 발생할 경우 향보단의 활동을 지휘할 뿐 평소의 활동에는 개입하지 않도록 했다.44) 

 건국운동세력과 미군정의 선거보호노력과 계몽활동으로 인해 4월 9일에 마감된 선거인등록에서 매우 많은 유권자들이 등록했다. 유권자들의 선거인등록률은 96.4%에 달했다.45) 선거인등록률에 관해 유엔한국임시위원단은 79.7%로 계산되는 통계를 소개하고 있다.46) 설사 유엔위원단의 통계를 타당한 것으로 받아들인다 하드라도 당시 전개되었던 좌익세력․중도파․김구세력의 치열한 선거인등록방해 노력에 비추어볼 때 79.7%라는 등록률은 매우 높은 것이다.

 5․10선거에는 다양한 정치성향의 많은 후보자들이 입후보 했다. 입후보자 총수는 948명이었으며, 5․10선거의 평균경쟁률 4.7 대 1은 한국의 역대 국회의원선거 평균경쟁률 4.6 대 1과 비슷한 수치이다. 5․10선거 입후보자들의 소속 정당과 단체는 48개나 되었고, 무소속 출마자도 417명이었다. 입후보자의 소속 정당에는 한독당 청우당 등 남북협상에 참여한 정당도 있었고 민중당과 민족사회당 등 중도파 정당도 있었다.47) 

 무소속 출마자 중에는 조봉암(인천) 김약수(부산) 등 중도파 정치인들이 매우 많았다. 5․10선거에 입후보한 무소속 가운데 중도파 인사들이 많았다는 사실은 중도파 인사들의 증언과 5․10선거에 당선된 무소속의원들의 사상성향에 관한 미군정 정보팀의 분석이 입증해준다.

 5․10선거 불참을 선언했던 독립노농당의 간부 하기락 등의 증언에 따르면, 독립노동당 당원이 당명을 어기고 무소속 등으로 선거에 입후보하여 당선된 사람이 14~15명에 달했다.48) 미군정 정보팀은 5․10선거에서 당선된 무소속 의원들 가운데 조봉암이 이끄는 52명은 ‘좌익’(필자의 판단으로는 ‘중도좌파’가 보다 적절할 듯)의 정치성향을 가진 것으로 분석했다.49) 

 5․10선거의 분위기는 정치상황이 안정된 민주국가에서의 선거분위기만큼 완벽하게 자유롭고 평온하지는 못했다. 그러나 당시 선거저지를 위한 좌익세력의 무장폭력투쟁이 격렬하여 전체 사회분위기가 내전상태와 유사했었다는 점을 고려하면 5․10선거의 분위기는 공명하지 않았다거나 자유롭지 못한 분위기였다고 말할 정도는 아니었다. 이는 5․10선거를 감시했던 유엔한국임시위원단의 5․10선거에 관한 보고서의 다음과 같은 결론에서 확인된다.

“위원단은 [5․10선거에 대해] 다음과 같은 견해를 얻었다. (A)선거준비기간과 선서실시 당일에 있어서 남조선에는 언론 출판 집회의 자유 등의 민주주의적 제권리가 인정 및 존중된 상당히 자유로운 분위기가 존재하였었다. (B)재조선미주둔군 및 남조선과도정부는 선거수속에 관한 위원단의 건의에 응하였으며, 선거실시는 일반적으로 선거법 및 선거규정에 부합되었다. (C)선거는 조선독립재건에의 일단계로 간주되고 있었는데 이것이야말로 선거인들 앞에 제시된 유일한, 본질적인 문제였으며 등록과 투표의 양면에 있어서 우수한 성적을 얻게 된 원인이었다. (D)선거감시반의 보고서도 고려하고 또 조선국민의 전통적 역사적 배경을 고려한다면 1948년 5월 10일 선거투표의 결과는 조선의 [선거가] 가능한 부분이며 조선인구의 약 3분의 2를 차지하고 있는 지역에 있어서의 선거인의 유효한 자유의사의 표현이며 그들의 자유의사를 정확히 표시한 것이다.”50)   

 좌익의 선거저지 무장폭력투쟁에 대한 미군정․경찰․향보단․건국운동세력의 선거보호활동과 계몽활동으로 인해 5월 10일의 투표는 제주도의 2개 선거구를 제외한 모든 선거구에서 차질없이 진행되었으며, 투표율은 95.5%였다.51) 이날의 투표에 의해 당선된 198명의 당선자들을 정당․단체별로 분류하면, 무소속 85명, 독촉국민회 54명, 한민당 29명, 대동청년단 12명, 기타 군소 정당․단체 소속 18명 등이다.52) 

 5․10선거에서 당선된 제헌의회 의원들은 5월 31일 국회를 개원했으며, 이승만을 국회의장으로 선출했다. 제헌의원들은 6월 3일부터 헌법 제정작업을 개시하여 7월 17일 헌법을 제정했다. 이 건국헌법의 기본정신은 “정치적 민주주의와 경제적․사회적 민주주의와의 조화를 꾀하는데 있다.…민주주의의 근원이 되어 온 모든 사람의 자유와 평등과 권리를 위하고 존중하는 동시에 경제적 균등을 실현해 보려고 하는 것이 이 헌법의 기본정신이다.…모든 사람의 자유와 평등을 기본원리로 하면서 이 자유와 평등이 국가 전체의 이해와 모순되는 단계에 이르면 국가권력으로써 이것을 조화하는 것”이었다.53) 이러한 기본정신에 입각한 건국헌법의 구체적 조문들은 이승만이 일찍이 1946년 2월말에 발표했던 ‘모범적 국가를 만들자’라는 제목의 방송연설에서 밝혔던 내용과 거의 동일한 것이었다. 이승만이 건국하고자 희망했던 국가의 상(像)이 대한민국의 건국이념이 된 것이다. 이 건국헌법은 또 정부형태를 이승만의 주장에 따라 대통령중심제로 채택했다.

 제헌의회는 7월 20일 헌법에 규정된 대통령 선거를 실시하여 건국운동의 주역 이승만을 대통령으로 선출했으며, 이승만은 7월 24일 대통령에 취임했다. 이승만은 8월 4일까지 국무총리를 비롯한 각부장관을 임명하여 행정부를 구성했고, 이승만정부는 8월 15일 대한민국정부수립 선포식을 거행함으로써 대한민국의 건국과정을 완료했다. 이승만은 이날 선포식 식사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이 식은 우리의 해방을 기념하는 동시에 우리 민국이 새로 탄생한 것을 겸하는 것입니다.…정부가 가장 전력하려는 바는 도시에서나 농촌에서나 근로하며 고생하는 동포들의 생활정도를 개량하기에 있는 것입니다. 기왕에는 정부나 사회나 가장 귀중히 여기는 것은 양반들의 생활을 위했던 것입니다. 지금부터는 이 사상을 다 버리고 새 주의로 모든 사람의 균일한 기회와 권리를 주장하며 개인의 신분을 존중히 하며 노동을 우대하며 법률 앞에 다 동등으로 보호할 것입니다. 이것이 곧 이 정부의 결심이므로 전에는 자기들의 형편을 개량할 수 없던 농민과 노동자들에게 특별히 주의하려는 것입니다.”54) 


  Ⅴ. 대한민국 건국일 논란

 이승만의 주도적 노력에 의해 대한민국은 이렇게 건국되었는데, 건국을 마무리하는 단계에서 이승만은 사소한 실수를 범했으며, 이 실수가 훗날 대한민국의 건국일을 둘러싼 엉뚱한 논란을 불러일으키는 빌미로 악용되었다. 대한민국 건국일을 둘러싼 시비를 초래한 실수란 이승만이 대한민국 건국을 ‘건국’이라고 말하지 않고 ‘민국의 부활’이라고 말한 것과,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건국을 선포해야 할 날에 건국을 선포하지 않고 정부수립을 선포한 것을 말한다.  

 이승만은 새로 수립될 정부가 우리 민족의 ‘독립정신’과 항일투쟁노선을 계승해야 한다는 점을 강조하고 싶은 생각에서, 그리고 자신이 3․1운동 후 수립된 임시정부들 가운데 정당성이 가장 강하다고 믿는 한성 임시정부55)의 적통자이며, 김구중심의 임시정부주도세력이 이탈했어도 대한민국은 임시정부를 계승한 정통정부라는 점을 과시하고 싶은 생각에서 ‘민국부활론’을 주장했다. 이런 민국부활론에 입각해서 이승만은 제헌국회 국회의장 취임연설에서 새로 수립될 정부가 ‘민국임시정부의 계승’이고, ‘민국이 부활’한 것이며, ‘민국연호를 기미년부터 기산할 것’을 주장했다.56) 이승만은 또한 건국헌법 심의과정에서 헌법 전문에 ‘대한민국은 기미 3․1운동으로 대한민국을 건립하여 세계에 선포한 위대한 독립정신을 계승하여 지금 자주독립의 조국을 재건함’이라는 문구를 삽입토록 하고, 대한민국이라는 국호를 채택하도록 적극 유도했다.57) 나아가서 대한민국이 건국된 후 상당기간 정부 문서에 1919년부터 기산하는 연호표기를 하도록 했다.

 이승만의 이러한 실수를 악용하여, 훗날 대한민국의 정당성을 훼손하고자 하는 사람들은 이승만의 제헌국회 개원연설, 건국헌법 전문의 ‘조국 재건’문구, 건국 후 정부문서에 1919년부터 기산한 연호표기 등을 내세워 대한민국 건국의 지도자인 이승만이 대한민국은 1919년에 건국된 민국을 재건한 것이라고 했으니, 대한민국은 1948년 8월 15일에 건국된 것이 아니라고 주장하면서, 상해 임시정부가 수립된 1919년 4월 13일이 대한민국 건국일이라는 억지소리를 하고 있다. 또한 그들은 1948년 8월 15일에 선포된 것은 대한민국 건국이 아니라, 대한민국 정부수립이므로, 대한민국의 건국은 1919년 상해 임시정부 수립 때 이루어진 것이라고 주장한다.  

 국가의 건국이란 영토, 국민, 정부, 주권의 4개 요소가 완비되는 것을 말한다. 따라서 1919년 상해에서 선포된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은 그 4개 요소 중 어느 것도 갖추지 못한 독립운동 조직의 결성이다. 상해 임시정부는 대한민국이라는 국호를 가진 국가의 건국을 추진하기 위한 준비기구이지, 대한민국이라는 국가 그 자체는 아니다. 상해 임시정부는 국가가 갖추어야 할 4개 필수 요소들 단 하나도 확보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정부마저도 정식 정부가 아니고 임시정부였다. 임시정부 구성원들은 그러한 사실을 잘 이해하여 ‘대한민국의 건국’을 선포하지 않고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수립’을 선포했던 것이다. 오늘날 상해 임시정부 수립을 건국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사회과학적 지식이 매우 부족했던 90년 전의 독립운동가들도 이해했던 것을 이해하지 못하는 저능한 사람들이다.

 우리 민족은 1910년 일본의 강제에 의한 한일합방조약 체결로 국가를 상실했다. 주권과 정부가 없어진 것은 물론이고, 영토는 침략국 일본의 식민지가 되었고, 우리 영토에 살고 있는 민족 구성원들은 일본의 정치적 노예로 전락했다. 8․15해방과 함께 우리 민족에게는 국가를 건국하는 데 필요한 영토와 국민이 제공되었다. 비록 미군 점령지역과 소련군 점령지역으로 나누어지긴 했지만, 어쨌든 국가를 건국할 수 있는 기본 요소 두 가지는 확보된 것이었다.

 그러한 조건에서 북한 지역에서는 소련군의 조종 하에 공산세력이 일찍부터 건국노력을 전개했고, 남한에서는 이승만 중심의 건국주도세력의 노력 끝에 1948년 8월 15일 정부와 주권을 동시에 확보함으로써 새로운 국가가 건국되었던 것이다. 대한민국이 국가형성에 필수적인 4 요소를 모두 갖추었던 1948년 8월 15일에 대한민국 건국이 공식적으로 선포되지 않았다고 하여 그날 대한민국이 건국된 사실이 부정될 수는 없다.

 인간이면 누구나 다 생일이 있으며, 그 생일은 그가 출생한 날이다. 출생환경이 불우했던 사람들 가운데는 생일을 모르는 사람들이 있을 수 있다. 그의 출생이 세상에 공포(출생신고)되지 않았거나 그의 생일을 기억해주는 사람이 없기 때문이다. 생일을 모른다고 그가 출생한 사실이  부정될 수 없는 일이며, 실질적인 생일은 분명히 존재한다. 생일을 알지 못하는 사람은 그의 병원출생기록 등과 같은 것을 추적하여 그의 정확한 생일을 찾아줄 수 있다.

 대한민국이 국가라면 건국일이 있는 것이 당연하다. 대한민국이라는 국가가 존재하는데 건국일이 없다면, 마치 출생하지 않은 인간이 실존하는 것과 같은 성립불가능한 말이다. 대한민국의 건국이 선포되어야 할 날에 그것이 선포되지 않았다 하여, 대한민국은 건국일이 없다고 주장한다거나 대한민국의 건국일을 엉뚱한 날로 정하는 것은 문명세계에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역사기록을 통해 대한민국이 국가형성의 4개 요소를 모두 갖춘 날을 확인하면 그 날이 바로 대한민국의 건국일인 것이다. 역사기록은 대한민국 정부가 1948년 8월 15일에 수립되었고, 그 대한민국 정부는 그날 밤 자정을 기해 미군정으로부터 주권을 인수했다. 즉 이날로써 대한민국은 이미 확보하고 있던 영토와 국민에 더하여 정부와 주권을 확보하여 건국의 필수 요소들을 모두 확보한 것이다. 곧 건국된 것이며, 그 날이 바로 대한민국 건국일인 것이다.

 대한민국의 건국일은 이와 같이 객관적 사실에 의해 명확하게 확인되었지만, 이승만이 ‘민국부활’론을 주장하고 그것을 건국헌법전문에 삽입하도록 만들고, 1948년 8월 15일에 건국을 선포하지 않고 정부수립을 선포한 것은 실수인 것만은 분명하다. 우리 민족의 장래를 위해 귀중하기 짝이 없는 대한민국 건국을 완수해놓고 그런 실수를 한 것은 옥의 티와 같은 것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Ⅵ. 결 론

 지금까지의 서술에 비추어볼 때, 대한민국의 건국과 관련된 이승만의 활동과 대한민국 건국과정에 대한 기존의 통설 및 평가들은 대폭 수정되어야 할 것으로 본다.

 첫째, 이승만은 완고한 반공주의자로서 자신의 정권장악을 위해 민족의 분열도 불사한 정치인이라는 기존의 평가가 수정되어야 할 것으로 보인다. 이승만은 적어도 해방정국에서는 기본적으로 통합주의자였으며, 통합을 위해서 공산주의자도 포용할 수 있는 융통성을 가진 정치인이었다. 그의 반공노선은 공산당의 통합파괴(독촉중협파괴) 행동에 대한 반발로서 취해진 통합지향적 반공이었지 분열지향적 반공이 아니었다. 이승만은 좌우합작에 대해서도 지지하는 입장을 취했다. 이승만은 김규식에게 좌우합작을 주도하도록 요청했었고,58) 좌우합작이 진행되는 동안 좌우합작에 대한 지지의사를 천명하기도 했다. 이승만은 좌우합작이 성공할 가능성에 대해서는 회의적이었지만 좌우합작위원회가 당초의 목적과는 달리 별도의 정치세력을 형성하려는 움직임을 보이기 전까지는 좌우합작을 지지했다.

 둘째, 이승만이 미국에 의존하여 정권을 잡기 위해 민족자주성을 외면했으며, 심지어는 신탁통치에 대한 반대태도도 확고하지 않았던 정치인이라는 기존의 평가는 수정되어야 할 것으로 보인다. 기존의 평가와는 반대로 이승만은 민족자주의식이 매우 강한 정치인이었고 한반도에 신탁통치를 실시하려는 미국의 계획에 대해 시종일관 강경한 반대입장을 견지해왔다. 이승만이 남한에서 정부를 조속히 수립하려고 했던 원인의 하나도 미국이 세계의 다른 지역에서의 미국의 국익추구를 위해 한국을 소련과의 흥정대상으로 삼을지도 모른다는 의구심이었다. 이승만이 미국에 대해 의구심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은 그가 미국인 친구 올리버 박사에게 보낸 편지에서 “미국 관리들은 한국문제는 그 자체로서 볼 때 중요한 것이 아니라고 넌지시 말합니다. 소련과의 폭넓은 관계 속에 세계적으로 보다 광범위한 각도에서 고려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이것은 소련으로부터 다른 어떤 지역을 양보받기 위해서, 미국이 아무리 싫어도 한국을 희생시킬 수밖에 없다는 것을 단적으로 의미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라고 말한 데서 잘 확인된다.59) 이승만은 한반도의 비공산독립, 적어도 남한의 비공산독립을 위해서 미국의 지원을 확보하려 하면서도 미국을 전폭적으로 신뢰하지는 않았다.

 셋째, 이승만이 분단지향적인 정치인이며, 분단의 원인 제공자라는 기존의 평가는 수정되어야 할 것으로 보인다. 이승만은 미․소가 38선을 경계로 한반도를 분할점령한 것에 대해 처음부터 반대했으며, 해방정국에서 남한 정치인들 가운데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을만큼 자주 그리고 강력하게 38선철폐와 민족통일을 주장했다. 그가 최초로 남한에서의 정부수립을 주장한 정읍발언도 북한에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라는 단독정권이 수립되고 그것에 의해 북한의 사회주의화가 급속히 추진되고 있으며, 소련이 한반도 통일임시정부 구성에서 남한의 우익세력을 배제하려는 완고한 입장을 취한 후에 나온 것이다. 이승만은 자신의 정읍발언으로 인해 마치 자기가 분단지향적인 남한단독정권수립론자로 규정되는 것을 피하기 위해 정읍발언 이후 1946년 11월말까지 남한정부수립을 주장하지 않고 오히려 조속한 통일만을 주장했다. 또한 이승만은 1946년 12월 이후 선거에 의한 남한정부수립을 주장하면서도 그 남한정부의 성격을 통일추진을 위한 ‘과 도정부’ 혹은 ‘임시정부’로 규정했으며, 그 자신의 입으로 남한만의 분리 건국의 뉘앙스를 가진‘단독정부’란 용어를 사용한 적이 없다.60) 

 넷째, 대한민국 건국과 관련하여 미국이 이승만의 건국노력을 전폭적으로 지원했으며, 미국의 지원으로 이승만의 건국노력이 쉽게 성공했다는 기존의 평가는 수정되어야 할 것으로 보인다. 미국이 이승만의 건국노력을 전폭적으로 지원한 것은 매우 짧은 기간의 일이며, 주한미군정과 이승만이 우호관계에 있었던 기간은 갈등관계에 있었던 기간보다 길지 않다. 그리고 미국이 이승만의 건국노력을 지원한 목적은 이승만의 건국목적과 상이했다. 이승만은 남한에 안정된 국가를 건설해서 북한을 통일하려는 목적을 추구한데 반해 미국은 주한미군을 조속히 철군하는 것을 목적으로 남한정부수립을 지원했던 것이다.

 다섯째, 남한정부수립과 관련하여 이승만과 김구가 지속적으로 대립적이었다는 기존의 평가는 수정되어야 할 것으로 보인다. 반탁투쟁 직후부터 김구진영이 추진해온 자율정부수립운동은 현실적으로 남한정부수립운동이다. 김구세력은 우리 민족이 자율적으로 정부를 수립하여 미군정으로부터 행정권을 접수하려 했는데, 그 경우 자율정부는 남한에서의 정부일 수밖에 없었다. 이승만과 김구는 그러한 자율정부수립운동 과정에서 지속적으로 협력해왔으며, 1947년 12월초까지는 남한정부수립을 위한 이․김간의 협력관계가 유지되었다. 1947년 12월 하순이후 김구가 건국진영으로부터 이탈하기 시작한 이후에도 이승만은 김구를 끌어안으려 지속적으로 노력했으며, 이승만의 김구 끌어안기는 김구가 남북협상회의 참여를 위해 평양으로 가기 직전까지 계속되었다.

 여섯째, 대한민국 건국을 위한 5․10선거가 좌우익 가운데 우익, 그리고 우익 가운데서도 일부만이 참가한 ‘반의 반쪽짜리 선거’였다거나, 유권자들에게 자유로운 선택의 기회가 주어지지 않은 선거였다거나, 강압적 분위기에서 실시된 경쟁다운 경쟁도 없고 비민주적인 선거였다는 기존의 평가는 수정되어야 할 것으로 보인다. 5․10선거에 대한 이러한 평가들은 우선 당시 5․10선거를 감시했던 유엔한국임시위원단의 보고서와 너무 반대되는 것이다. 유엔위원단의 보고서를 무시한다 하더라도, 5․10선거에 대한 기존의 부정적 평가들은 5․10선거에 많은 중도파 정치인들이 무소속이나 기타 정당 단체 후보로 입후보했고, 전체 입후보자수가 국회의원 정원의 4.7 배나 되었다는 사실, 선거결과 우익진영의 정당 단체 소속이 아닌 입후보자들이 총 당선자의 50%를 초과(무소속 85명, 기타 18명)했다는 사실 등에 비추어볼 때 타당성을 갖지 못한다. 또한 5․10선거의 분위기가 ‘강압적’이었다는 평가는 그 선거를 저지․파탄시키려는 세력과 그들의 선동․회유․협박에 넘어간 사람들의 입장만을 생각하는 평가라고 할 수 있다. 5․10선거가 선거를 저지․파탄시키려는 세력과 선거를 보호하려는 세력 간의 내전에 가까운 치열한 물리적 충돌 속에 전개된 선거였기 때문에 선거에 참여하려는 유권자들의 입장에서는 경찰과 향보단 등의 활동이 자기들을 보호해주는 ‘고마운’ 것이었고 선거저지세력과 그에 동조하는 유권자들의 입장에서는 ‘강압적인 것’이었을 것이다. 이러한 두 측면을 생각하지 않고 선거반대자들의 입장만을 대변하여 5․10선거의 분위기를 강압적이고 비민주적이었다고 평가하는 것은 균형을 상실한 것이라 아니할 수 없다.

 일곱째, 이승만에 의한 대한민국의 건국은 1948년 8월 15일에 완수되었으며, 그날 대한민국의 건국이 선포되었느냐 여부와 상관없이 그날이 대한민국의 건국일이다. 1910년 대한제국이 강압에 굴복하여 일본에 합방됨으로써 국가가 존재하지 않게 되었던 한반도에 대한민국이라는 한민족의 새로운 국가가 1948년 8월 15일에 건국된 것이다. 우리 민족의 새로운 국가 대한민국은 상해 임시정부 구성원들의 다수가 참여하여 건국되었고, 이념 면에서는 상해 임시정부를 거의 전부 계승했지만, 조직 면에서는 상해 임시정부와는 직접 연결되지 않은 국가였다.

 한편, 이승만의 정치철학과 관련하여 새로이 조명되어야 할 부분이 있는 것으로 판단된다. 그것은 이승만이 정치 엘리뜨보다는 민중을 더 중요시하며, 사회적 약자 즉 농민과 노동자들의 지위향상과 생활개선에 대해 강한 의지를 가지고 있었다는 점이다. 이승만은 귀국직후부터 정부수립 때까지 시종일관 정치 엘리뜨간의 협의에 의한 정부수립에 반대하고 민중의 뜻에 따른 정부수립을 주장했고, 그 주장을 관철시켰다. 이승만은 1946년 2월 말에 행한 ‘모범적 국가를 만들자’라는 제목의 방송연설에서 장차 남한에서 취해져야 할 정책의 기본방향을 제시하면서 사회적 약자들의 지위와 권리를 보호하는 항목을 매우 많이 제시했으며, 그러한 이승만의 의견은 건국헌법에 대폭 반영되었다. 이승만은 또 대한민국정부수립선포식 기념사에서도 새로운 정부가 가장 열심히 노력할 것으로 노동자와 농민의 생활정도를 개선하는 일임을 천명했다. 이승만은 기본적으로 자본주의를 지지했지만 그의 자본주의에 대한 태도는 ‘공산주의도 경제정책과 관련해서는 수용할 점이 많다’라고 말할 정도로 수정적인 것이었다.

 이승만이 이처럼 정치 엘리뜨보다는 민중을 중시하고 사회적 약자들의 지위와 권리 향상에 많은 관심을 가졌다는 점은 이승만에 관한 기존연구들에서는 거의 전적으로 무시되어왔다. 이승만의 정치철학에 내포된 그러한 점들을 재조명해보면, 해방공간에서 좌익과 중도파의 이승만에 대한 격렬한 악선전에도 불구하고 이승만에 대한 대중의 지지도가 높았던 사실, 이승만이 다양한 장애를 극복하고 자기가 뜻한 바대로 대한민국을 건국하는데 성공하게 된 사실을 설명할 수 있는 단서의 일부를 찾을 수 있을 것으로 생각된다.<끝>  





1) 우남실록편찬회,『우남실록』(서울: 열화당, 1976), 308쪽, 


2) 위의 책, 313쪽.


3) <매일신보> 1945, 10, 25.


4) 『우남실록』, 314쪽.


5) 위의 책, pp.316.


6) <경향신문> 1947, 8, 12.


7) 『우남실록』, 471쪽.


8) 위의 책, 484쪽.


9) 리승만,『독립정신』(서울: 정동출판사, 1993), 229쪽.


10) 양우정 편, 『이승만대통령 독립노선의 승리』(서울: 독립정신보급협회출판부, 1948), 93~96쪽.


11) 『우남실록』, 325-326쪽.


12) 위의 책, 392쪽.


13) Robert Oliver, Syngman Rhee: The Man Behind Myth(New York: Dodd Mead and Company, 1960), p,232.

14) 『우남실록』, 324-325쪽.

15) 위의 책, 373쪽. 


16) 위의 책, 402쪽.


17) 위의 책, 406쪽.


18) <조선일보> 1946. 10. 9.


19) 『우남실록』, 382-384쪽.


20) <서울신문> 1946, 6, 5.


21) 김한길, 『현대조선력사』(평양: 사회과학출판사, 1983), 228쪽.

22) 그러한 점은 중도파 정치지도자 김규식이 이승만의 정읍발언이 있기 약 20일 전인 5월 중순에 남한에서의 정부수립의 필요성을 주장하는 연설을 했다는 사실에 의해서 부분적으로 확인된다. 다만 김규식은 자기의 연설이 논란의 대상이 되자 그것이 남한단정론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고 서둘러 변명했고, 당시로서는 김규식의 정치적 비중이 빈약했던 탓으로 좌익이 김규식의 발언을 크게 문제 삼지 않았을 뿐이다. 남한 정부수립의 필요성을 주장하는 김규식의 연설내용은 <한성일보> 1946. 5. 14를 참조.  

23) <서울신문> 1946, 6, 12.

24) 미국무성이 이러한 지시를 미군정에 하달했다는 사실은 U.S. Department of State, Foreign Relations of the United States(略:FRUS) 1946, VIII(Washington D.C.: U.S. Government Printing Office,  1971), pp. 645-646와 pp.698-699에서 확인된다.  

25) Oliver, op. cit., p,232.

26) <동아일보> 1946. 12. 11.


27) <동아일보> 1947. 1. 26.


28) 정병준, 『우남 이승만 연구』(서울: 역사비평사, 2005), 651쪽. 서재필은 건강악화로 인해 하지와 함께 오지 못하고 1947년 7월에 귀국했다.


29) <경향신문> 1947. 4. 26. 여기서 말하는 미국무성의 모씨는 이승만이 방미시 면담했던 미국무성 차관보 힐드링(John Hilldring)을 지칭하는 것인데, 힐드링은 자기가 이승만과의 면담에서 한국에서 총선거로 독립정부를 수립할 것에 찬성한 것은 미․소공동위원회가 소집되지 못할 경우를 전제로 한 것이었으며, 당장 총선거에 의한 독립정부수립을 찬성한 것이 결코 아니었다고 해명했다. 따라서 이승만의 이러한 발언은 과장된 것으로 보인다.FRUS(1947) Ⅵ, pp.647-648 참조.


30) <동아일보> 1947. 4. 29.


31) 김규식은 “만약 (미소양군의)공동철퇴가 실천된다면 북조선의 공산세력은 남조선과 북조선을 점령하고 조선을 적색세력권 내에 함입시킬 것이다”라고 단호하게 말했다. <동아일보> 1947. 9. 28.

32) <경향신문> 1947. 11. 19.


33) <동아일보> 1947, 12, 3.


34) <서울신문> 1947. 12. 5.


35) <조선일보> 1947, 12, 23.


36) <노력인민> 1948. 3. 8.


37) <노력인민> 1948. 4. 3.


38) 대검찰청수사국, 『좌익사건실록』제1권(서울: 대검찰청수사국, 1965), 395-396쪽; 김점곤, 『한국전쟁과 노동당전략』(서울: 박영사, 1973), 112-113쪽.

39) <동아일보> 1948. 4. 18에 게재된 조병옥 경무부장의 발표; 대검찰청수사국, 앞의 책, 396-398쪽.>

40) 북한에서는 1947년 2월에 북한 지역의 최고의결기관(남한의 국회에 해당)인 북조선인민회의를 구성하고 북조선인민회의는 북한의 정식정부인 북조선인민위원회를 구성했다. 북로당 및 북조선인민회의는 47년 11월 유엔총회의 한국문제결의채택과 때를 같이 하여 남북한 통일국가의 강령이 될 임시통일헌법을 제정할 것을 결정하고, 그 결정을 실행하기 위해 조선임시헌법제정위원회를 구성했다. 헌법제정위원회는 사회주의로 가기 위한 과도적 체제인 인민민주주의 원리에 따라 작성된 헌법초안을 1948년 2월 6일 북조선인민회의에 보고했다.

41) <노력인민> 1948. 3. 8.; 김광운, 『북한정치사연구』Ⅰ(선인, 2003), 629-630쪽.


42) <김광운, 앞의 책, 630쪽.> 인민민주주의 헌법에 입각한 남북한 전체의 통일정부 수립을 결정하면서 북로당 중앙위원회는 “우리가 수립할 정부는 남북조선의 선거를 통하여 우익 중간을 물론하고 인민들의 각계각층이 참가할 것이다.…우리가 수립할 진정한 통일적 조선인민의 정권인 민주주의인민공화국 중앙정부는…유일한 주권임을 인정한다.”라고 주장했다.


43) 김남식, 『실록 남로당』(서울: 신현실사, 1975), 387-388쪽.


44) 조병옥, 『나의 회고록』(복쇄본)(서울: 해동, 1986), 186-188쪼; <서울신문> 1948. 4. 20과 21.


45) 중앙선거관리위원회, 『대한민국선거사』제1집(중앙선거관리위원회, 1992), 73쪽.  


46) 국사편찬위원회 편, 『대한민국사자료집: UN한국임시위원단관계문서』Ⅱ(국사편찬위원회, 1988), 755쪽.

47) 중앙선거관리위원회, 앞의 책, 1083-1085쪽에 게재된 제헌국회의원선거의 ‘정당단체별의원후보자와 당선자수 대비일람’ 참조.


48) 한계레신문사,『발굴 한국현대사 인물』2(한겨레신문사, 1992), 60쪽.


49) 미군정 정보보고서(일월서각 영인본) 통권 제15권 206쪽, 1848년 6일 18일자 보고<정태영 외 편, 『죽산 조봉암 전집』 2권(서울: 세명서관, 1999), 91쪽과 336쪽에서 재인용.> 


50) 국제신문사 출판부 역, 『유엔조선위원단보고서』(서울: 국제신문사 출판부, 1949), 180~181쪽.


51) 중앙선거관리위원회, 앞의 책, 73쪽. 5․10선거 투표율도 유엔한국임시위원단의 통계에 따르면 다른 수치가 나온다. 유엔위원단의 통계에 따르면 선거인등록자 대비 투표율은 89.8%이고 총유권자 대비 투표율은 71.6%가 된다. 국사편찬위원회 편, 앞의 책(1988), 755쪽 참조. 


52) 중앙선거관리위원회, 앞의 책, 616-617쪽;  중앙선거관리위원회, 『대한민국정당사』(1968년 증보판)(서울: 중앙선거관리위원회, 1968), 178쪽. 중앙선거관리위원회의 두 자료는 1949년 5월에 실시된 제주도의 2개 선거구의 선거결과를 포함시켜 당선자 200명의 정당․단체별 분류를 하고 있어서 본문의 통계와 다른 수치(독촉국민회 55명, 기타 19명)를 기록하고 있다.


53) 건국헌법 초안 작성자 유진오의 설명의 설명. 유진오, 『헌법기초회고록』(서울: 일조각, 1981), 236쪽.


54) 『우남실록』, 565-567쪽.


55) 한성 임시정부는 1919년 4월 23일 서울에서 13도 대표 25명이 모여 선포한 임시정부이다. 이승만은 1919년 4월 10일 상해에서 선포된 임시정부나 1919년 9월 6일 상해에서 구성된 통합 임시정부보다 한성 임시정부를 중요시했다.


56) <동아일보> 1948. 6. 1.


57) 유영익,「이승만 국회의장과 대한민국 헌법 제정」,『역사학보』제189집(2006년 3월), 120-122쪽.


58) 이정식, 『김규식의 생애』(서울: 신구문화사, 1974), 140쪽.


59) 로버트 T. 올리버 저, 박일영 역, 『이승만비록』(서울: 한국문화출판사, 1982), 151쪽.


60) 이런 사실은 이승만 자신이 1948년 3․1절 기념사에서 확인했다. <동아일보> 1948. 3. 2. 


[양동안 한국학중앙국학원 명예교수: http://www.nabuco.or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