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르조아 민주주의 혁명과정에 있어서 전토지를 國有化하고 이것을 농민의 노력과 그 가족수에 비례해서 재분배함

농지개혁
2020-10-14
조회수 706




         1938.12.    삼천리



[ ...... 「도망한 장교들은 잘했다」고 동료들이 부러워하면서 ........

   ...... 바람이 부러서 창이 덜걱거려도 께페우가 오지 않는가 .........       ]



[ ......  농민은 .... 혁명이전 때가 살기 좋았다 해요. .........

   ...... 부담이 많어서 입는 것은 고사하고 빵문제 해결에도 곤란합니다. ........   

   ...... 지금은 백퍼-센트가 다- 빈민 ....... 만족히다고 볼수 있는 것은 농촌에 있는 청년공산당원 뿐 ........    ]



[ ...... 독신이래도 8시간 勞働이면 겨우 살어갈 정도 ........

  ...... 물건이 니러졌으나 께페우는 재판에 부칠 수가 없으니깐 상점의 책임이 되여서 ........


  ...... 트로키스트 ..... 1937년 1월부터 38년 5월까지 그 명목 하에 검거당한 인수가 전부 2백60만 ........      ]


[ ...... 데파-트 한 집의 상품만 해도  하바롬스크全市에 있는 상품보다 아마 더 많고 ........     ]



삼천리 제10권 제12호    

1938년 12월01일    



蘇聯事情 듯는 座談會, 脫走하여 朝鮮에 온 赤露士官으로부터    


出席者


脫走 赤軍士官 이반 야꼬레비치 나하로프

脫走 赤軍兵 표오톨 마까로비치 이봐노프

權忠一, 朴得鉉, 金漢卿, 朴英熙,

이박게 朝鮮軍 囑託 高井邦彦 



지난번 高鼓峯事件 때 蘇聯 極東軍에서 탈출하여 蘇聯兵 2명이 새로운 살 길을 찾고저 OO에 와 있는 것을 기회로 그들을 中心삼어 이 좌담회를 열었다. 질문한 사람들은 元共産黨 幹部로서 入露의 경험조차 가젔든 몃 분들이다. 우리가 이 좌담회를 개최한 까닭은 蘇聯知識의 一資料를 어드려고 하는 것뿐 아니라 그들 탈주병이 祖國蘇聯을 어떻게 보는가를 알고저 함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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高井. 그러면 나부터 먼저 張鼓峰事件에 현지에서 탈주해 온 蘇聯兵<92> 2명을 소개하겠읍니다. 이분은 나하로푸군 24세올시다. 저쪽 분은 이와노푸군 22才올시다. 양군이 다 歐羅巴 로시아 출신으로 나하로푸군은 8년제 학교를 졸업하고 군대에서는 하사관양성소를 중도에서 퇴소했읍니다. 이와노푸군은 극히 짧게 밖에 학교에 가지모했음으로 무학이라해도 과언이 아입니다. 


나하로푸. 사건이 勃發하기 얼 전에 일인대요. 蘇聯의 장교 6명이 ****?近에 갓는데 수비병들이 확실히 삼림 속에 들어간 것을 보았다고 하지만 장교 6명이 죄다 행방불명이 되었든 것입니다. 내 생각엔 그이들도 滿領내에 탈주한 것 같슴니다. 그때 내가 있든 군대가 1개 연대 출동해서 장교 6명이 들어간 국경 부근의 산을 죄다 찾어 봤으나 발견하지 못하고 말었읍니다. 그때 도라오면서 「도망한 장교들은 잘했다」고 동료들이 부러워하면서 외국의 이야기들을 했는데 그것이 내게 있어서 마음의 파동을 이르게 했읍니다.


記者. 이와노푸군은 어떳습니까.

이와노푸. 나는 個人農임으로 늘 꼬르포-즈에게 압박을 받어 심히 괴로운 생활을 계속하고 있었든 관계로 생각할수록 로서아가 싫어졌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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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와노푸. 우리 가족의 일상생활이란 그야말로 恐怖의 연속이라고 해도 좃습니다. 바람이 부러서 창이 덜걱거려도 께페우가 오지 않는가 하고 신경이 산란해 집니다. 밭에 나가 일을 하다가도 군복을 입은 자가 오는 것을 먼데서 보면 우리들 잡으러 오나부다고 벌벌 떨고 있읍니다. 이것이 우리들 농민의 생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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金漢卿. 소聯學校에서는 東洋事情이라고 할는지 특히 日本에 대해서 어떻게 가르키고 있읍니까?


나하로푸. 4년제의 의무교육학교에서는 日本에 대해서 또는 그 他 다른 외국에 대해서 교육하지 않습니다. 지리는 배워 주나 극히 개략적입니다. 4년제 이상의 학교가 되면 일반정치학을 배워 줌으로 각국의 정치상태, 국내상태 등을 배워 주고 특히 日本에 대해서는 로시아가 본 日本의 나쁜 점에 주력해서 배워 줍니다. 그래서 나는 일본의 농민은 매우 가난하다든가 상품이 없다든가 하는 것을 밤낮 들었든 까닭에 오늘까지 그렇게 생각해 왔슴니다. 그랬으나 현재는<95> 그것이 틀린 것으로 알고 로시아의 교육은 진실하지 못하고 역선전하는 것이라고 알었읍니다. 학교는 상급이 됨에 따라서 정치교육이 진보되고 로시아대외정책이라는데 대해서 가르치고 있으나 제1상급의 대학교 혹은 사범학교에서는 그 경향이 만습니다. 또 그 교재로서는 주로 신문에서 산 재료를 취해서 배워 주긴 하지만 그 신문도 결국은 로시아 신문이 아니면 않되는 것이니까요.

高井. 외국신문은 전혀 볼 수 없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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金. 최근엔 蘇聯政府의 종교에 대한 정책도 엣날과 같이 심하지 않다고 들었는데 어떠읍니까?

나하로푸. 정부는 법률로선 종교의 자유를 인증하면서도 무신론자, 무종교단체라는 것을 맨들어서 그것을 통하여 간접적으로 박멸책을 강구하고 있읍니다. 


權. 현재 소련민중은 종교에 대해서 어떤 感을 가지고 있읍니까? 우리도 들었지만 無神運動者들이 선전하기 위하여 농촌에 가면 농민들이 뫃여들어 때러서 골통을 깨고 도라 온다는데 사실입니까?


나하로푸. 혁명전에 교육을 바든 사람들은 전부 신을 믿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공산주의자들 중에도 맑씨즘에 대해서 의심을 갖게 되는 땐 신앙을 가지는데요. 더구나 부모들의 영향이 있음으로 이런 사람들은 몰내 긔도를 하는 일이 있읍니다.


農民은 極度로 絶望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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金. 농민은 정말 행복합니까.


나하로푸. 개인경영으로선 재산을 빼앗깁니다. 꼴포-즈조직은 월급이지요만 이전은 勤農들에게 매우 환영을 받어답니다. 그러나 현재에 있어선 먼저도 말한 바와 같이 前途의 희망이 보이지 않음으로 蘇聯의 농업자들은 매우 실망하고 있읍니다. 혁명이전 때가 살기 좋았다 해요.


朴得鉉. 그렇게 되면 현재의 농민생활과 혁명이전의 농민생활과의 차는 어떻읍니까?


나하로푸. 帝政時代엔 아주 큰 지주가 있었고 그밖게 농민이 그것과 비교된 때문에 어쩐지 재미없는 일이 많은 것 같았지만 그때도 현재의 농민과는 비교할 배가 아니지요.<98>

이와노프. 문제도 않된다고 하는데요.


나와로푸. 현재 농민과 帝政時代의 농민과를 비교할 만한 정확한 數字는 내가 여기서 말슴하지 못하지만 내 부모든지 또 형제에게서 들은 바에 의하면 帝政時代 世界大戰 당시 이전은 그 지주들이 농민에게 그 토지를 난하줄 운동이 있어서 그래서 농민은 대지주로부터 토지를 가지고 자기의 토지와 재산을 가질 遇境가 있도록 되었다고 합니다. 최근은 꼴푸즈가 되면선 자기의 재산, 자기의 토지라는 걸 가질 수 없고 또 정규수납의 규정이 있기 때문에 부담이 많어서 입는 것은 고사하고 빵문제 해결에도 곤란합니다.


高井. 거기에 내가 한 마디 말슴 더 하겠읍니다. 쏘베-트당국은 농민으로부터 것보리를 1키로 5카페-클을 수납해서 이것을 찟튼지 혹음 제분하든지 해서 1루-부르 카페클 내지 2루-부르 즉 30배 내지 40배의 값으로 팔어 버립니다. 찟는 데라든가 제분하는 비용을 합한다 치드래도 약 20배의 값이 되지요. 우유에 있어서도 1릿토르 15카페-크르를 수납하고 이것을 그대로 1루-부르 50카페클 즉 10배의 값으로 국영상점을 통해서 국민에게 판매하고 있읍니다. 그 差額이 전연방에 쌓이고 쌓여 蘇聯國家 豫算의 반액을 형성하고 있읍니다. 이것을 보드래도 꼴포-즈란 것이 조직적으로 농민을 착취하는 수단에 지나지 않으니까요. 즉 농민은 정부에게 자기의 소득을 10배 많으면 30배 40배식 착취하고 있으니 쏘베-트 농민이 곤궁에 빠질 것은 뻔한 일이 아니겠읍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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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 당신네들이 일상 먹는 음식을 거즛없이 말슴해 주시요. 그것으로 대체를 알 수 있으니까요. 


이와노프. 아츰은 우유와 껌정팡... 우유를 먹을 만하면 상당한 셈죠. 점심은 감자얘요. 고기를 살 수 있으면 먹게 되지만 지금은 닭과 소를 먹이게 못하는 까닭에 소고기 같은 건 도모지 먹질 못해요. 지금은 그런 고기도 없이<99> 대체로 감자와 파를 한데 짓*서 가지고 가*쯔데쯔를 맨드러 먹지요. 거기에 쓰-프 이것도 감자와 카*쯔. 저녁은 차와 껌정빵, 연어같은 *을 먹을 때도 있지만.


權. 나는 1931년. 1932년에 우라지오 太平洋 勞働書記局에 있을 때의 일이지만 그때 *껌정빵이 없어졌단 이얘길 들었는데 아직 있읍니까.

이와노푸. 우리들의 상식 인데요.

나하로푸. 도회엔 한때 없어진 때가 있었을지 모르나 현재 극동에 있어서 蘇聯 농민의 긴요한 양식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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金. 농민은 얼마나 세납을 부담합니까.


高井. 농민이 바치는 세금 중에서 제일 많은 것은 소득세입니다. 이것을 소득률에 따라 지불*니까 여기서 구체적으로 말할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나하로프. 그다음에 문화세 같은 것이 십수종이나 됨니다. 

高井. 그 밖에 보험료가 있읍니다.

나하로프. 세금 외에도 여러가지 돈을 많이 냄니다. 먼저 의무적으로 채권을 사야 됨니다. 그밖에 스페인 전쟁 때문에 자기들이 동지를 구조할 자금이라든가 사변 때문에 곤란을 받고 있는 支那의 자제들을 구조할 자금이라든가 혹은 각국 혁명 때문에 타국에 있는 사람들을 구조할 자금이라든가 여간 많은 것이 아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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權. 농민들은 현정부의 정책에 대하야 만족*하는 모양이지요.


나하로프. 만족이란 蘇聯에는 없읍니다. 농민들은 결코 만족하여 있지 안슴니다. 혁명이전에는 농촌에 *는 빈민 라고 돈이 없기 때문에 해도 약 15퍼-센트밖에 안되고 그 외의 85퍼-센트는 지금보다 훨씬 나은 생활을 하고 있었읍니다. 그러던 것이 지금은 백퍼-센트가 다- 빈민이 되였읍니다. 물론 한사람도 신정부의 정책에 만족하는 사람은 없읍니다. 다만 만족히다고 볼수 있는 것은 농촌에 있는 청년공산당원 뿐으로 그 사람들은 꼴포-즈의 근육노동에 참가할 필요가 없고 다만 선전이라든가 세금 독촉에<100> 한목 끼여서 일할 뿐인 고로 筋肉勞働을 안 하게되니깐 만족해 하지요.


都市의 勞働者 生活


金. 도시 勞働者들은 어떳슴니가.

高井. 도시 勞働者들의 생활이라고 말하면 勞働法에 따라서 勞働時間은 8시간이라고 제한되여 있기는 하지만 8시간의 勞働으로선 가족을 부양해 나갈 수가 없읍니다. 제한되여 있어도 가족들 때문에 3시간 내지 4시간을 연장하야 11시간 12시간의 勞働을 하지 않으면 안되는 것입니다. 


記者. 월급이 아니고 일한 분량대로 주는군요.

이봐노프. 독신이래도 8시간 勞働이면 겨우 살어갈 정도입니다.


金. 그래도 勞働者가 농민보다 생활이 행복함니까.


이봐노프. 물론 勞働者는 농민보다 생활이 양호함니다. 그러나 혁명전에 勞働과는 비교도 될 수가 없읍니다. 싸베트에서 비교적 행복되게 뵈는 것은 勤務員입니다. 그 중에서도 학문이 있고 또 특수한 기술이 있는 사람들입니다. 스탈린은 기술은 모든 것을 해결한다. 간부가 모든 것을 결정한다는 표어를 늘 쓰고 있습니다. 그러니 거기 해당하는 기술자, 학문이 있는 사람들이 비교적 유복하게 생활하고 있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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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하로프. 물론 다 그러타고 할 수는 없겠지요. 그러나 공산주의는 공산주의자에게만 조치요. 왜 그러냐하면 그들은 공산주의를 표방함으로써 좋은 지위도 어들 수 있고 비교적 넉넉한 생활을 할 수가 있으니깐요. 그러니깐 그런 사람들은 공산주의는 아주 좋은 것인 줄 알지요. 그러고 일반 청년은 반동적으로 여기 대하야<101> 공산주의라는 것은 공허한 것이다. 그것은 공산주의자의 것이지 우리의 것은 아니라는 그런 생각을 가지고 있읍니다.


肅淸工作의 一例들 들음


記者. 여기서 문제을 박궈서 스탈린의 숙청공작에 대하야 즘 이야기합시다. 싸베트 건설공로자를 투옥한다거나 살해한다거나 하는 스탈린의 숙청공작에 대한 蘇聯내의 일반사회의 공기 같은 것은 어떳습니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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酒井. 당신도 3년 징역 살었다지요.(笑聲)

나하로프군이 처형 바덧다는데는 금일의 싸베트를 잘 나타내고 있는 무슨 사정이 이슬 듯하니 좀 들어봅시다. 


나하로프. 생각해 내는 것만 해도 실증이 남니다만 나는 3년간의 强制勞働에 복역하였읍니다. 감옥에 드러 가기까지는 나는 어떤 상점 발송계에서 일을 보고 있었읍니다. 그 상점이라는 것은 지배인과 야체-카와 께페우의 3세력이 주장이 되여 있어서 내가 발송계니깐 물건을 어디로 보내라구 명령을 바더서 그대로 보낼야구 하면 금방 또 께페우에서 그 물건은 어디로 보내라구하는 주문이 드러옴니다. 나는 명령이니깐 께페우의 주문대로 했드니 처음 보낼 작정이든 그 곳에서는 물건이 안 오니깐 그것이 분실되였다구 말이 되는 것임니다.


高井. 께페우가 중간에서 주문을 했다는 것은 비밀이니깐 결국 죄는 발송계에 씨여지지요


나하로프. 물건이 니러졌으나 께페우는 재판에 부칠 수가 없으니깐 상점의 책임이 되여서 보내야 할 걸 보내지 않은 발송계의 책임이 되는 것임니다. 그 때문에 국가에 손해를 끼첫다는 의미로 재판에 걸닌 것입니다. 나는 국가의 유해자라구 하야 그때 처벌당한 것입니다.


記者. 재판 현황을 하나


나하로프. 내가 처형당한 재판소는 인민재판소였읍니다. 그 재판은<102> 재판장과 판사장 앞에 내가 서고 또 검사가 있읍니다. 거기다 또 배심원이라고 해서 농민출신이 한 사람, 勞働者출신이 한 사람, 이 밖에 여자 서기가 1명 이것으로 구성된 데서 재판을 바덧는데 별로 조사도 없어 그냥 인정서를 가지고 약간 물어 본 후 그냥 그 조서를 認定식히고 단 10분도 안돼서 징역 3년 强制勞働이 회부한다는 판결을 바든 것입니다. 그리고 3년의 强制勞働을 모스코바 마보루가에서 지냈읍니다.



犯罪, 乞食, 賣笑婦


記者. 그러면 이쯤에서 화제를 돌여서 이번에는 일반사회 사정을 들읍시다.


朴英熙. 싸베트에서 어떤 범죄가 제일 만습니까.


高井. 그것은 무엇무엇해도 지금 유행하고 있는 트로쯔키스트의 검거일 걸요.(笑聲)

나하로프. 범죄라고 하기엔 안됐지만 국가에 손해를 준다든가 혹은 국가가 원치 안는 자는 다- 싸베트의 범죄자로서 트로쯔키스트의 명목으로 검거당하는 것이 제일 만슴니다. 그 다음이 公金消費입니다. 그밖에는 뭐 다 그러치요. 살인은 도회에 많고 절도 같은 것은 농촌에 많은 것같이 보힘니다. 


高井. 그것은 농촌이 얼마나 貧하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暫間 소개함니다만 범죄의 이야기가 나왔으니 말이지 싸베트에서 제일 많은 범죄는 지금 유행하고 있는 트로키스트라고 생각함니다. 1937년 1월부터 38년 5월까지 그 명목 하에 검거당한 인수가 전부 2백60만9천인이나 됨니다. 그리고 本年度 內務人民委員部豫算의 강제노역소 경비를 정하는 기초로 되여였는 정부측의 자료에 의하면 강제노역소 재감자 수가 6백11만2천4백3십2인 약 1천만인입니다. 이중의 대부분을 정부측에서 소위 트로쯔키스트라고 보는 자들이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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貧弱한 民衆娛樂


金. 蘇聯의 민중오락이란 어떠한 것입니까?


이와노. 도시에는 여러 가지 있읍니다마늘 우리 농촌에는 手풍금에 맟어 딴스를 하는 것쯤 한 정도이고 혹 휴일에는 술도 먹습니다.

나하로. 다른 것은 없어도 술만은 잘 공급하여 줍니다. 따라서 농촌의 오락으로서는 딴스와 술의 정도입니다.

權. 우리들이 로시아에 있을 때의 영화는 5箇年計劃의 선전영화가 대부분이고 다음은 모다 아메리카의 희극 같은 것이였는데. 

나하로. 공개영화는 이전에는 獨逸 것도 있는 모양이였으나 지금은 주로 아메리카영화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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記者. 일본에 물자가 많은데는 저 三等大將 류시코프도 놀난 모양인데 대체 로시아의 현상은 어떠하십니가.


나하로프. 蘇聯의 물자란 대체 빈약합니다. 있기는 있드래도 불필요한 것이 많고 필요한 것은 적습니다. 워드카 같은 것이 많지요. 그러나 팡 같은 것은 적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나는 이곳에 와서 데파-트를 구경하였는데 그 데파-트 한 집의 상품만 해도 하바롬스크全市에 있는 상품보다 아마 더 많고 민중이 즐겨할 것도 더 많으리라고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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朴得鉉. 蘇聯의 兵役은 自由兵役입니까. 强制兵役입니가?


나하로프. 蘇聯의 兵役은 형식으로는 自由兵役이여서 징병한다 하드래도 徵兵檢場에 査가면 나도 그랬지만 징병관이 「당신은 兵役에 종사하겠느냐」고 묻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당신의 자유다.」라고 하는데 그 徵兵官의 골 속에는 「兵役을 기피하는 者 國賊이다.」라고 하는 큰 글자가 씨어저 있읍니다. 그것을 보고는 모다들 자진하여 지원합니다.(笑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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記者. 日本에 와저 제일 감탄된 것이 무었입니가. 어데 간단히 대답하여 보시요.


이하노프. 제일 감탄한 것은 전쟁 중인데도 극히 평온한 것 그리고 日本은 전쟁을 하고 있기 때문에 물자가 없다는 것을 蘇聯에서 들었고 로시아는 물자가 아주 풍부하다고 하는 것이 전혀 그 반대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또 한가지는 日本 사람들은 퍽 친절하다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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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박사 재임 중 국회는 지주 출신이 다수를 점하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이 박사가 공산주의자였던 조봉암을 농림장관에 임명해 농지개혁을 강력히 추진했다는 점은 대단히 높은 평가를 받아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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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전쟁 전에 분배가 단행될 수 있었는가?


이러한 여러 가지 증거들로 미루어 볼 때 한국전쟁이 터지기 전에 농지의 상당 부분이 분배되었다는 사실은 부인되기 어려울 것 같다. 문제는 어떻게 관련법규가 정비되기도 전에 정책이 먼저 시행되는 일이 발생했는가이다. 정상적인 근대국가에서는 생각하기 어려운 일이 1950년 봄 한국에서 발생되었다. 이것이 어떻게 가능했을까?

 

이러한 헤프닝이 벌어질 수 있었던 것은 무엇보다도 소관부처의 행정적 판단과 李承晩의 독려가 어우러졌기 때문이다. 정부는 1949년 6월 21일 우여곡절 끝에 농지개혁법(당초법안)을 공포하지만, 그 법안은 내용상 논리적 모순을 안고 있었기 때문에 곧 이어 국회에서 개정작업에 들어갔다. 이 때 행정부의 관련부처에서는 개정안의 국회통과가 시간 문제일 뿐 반드시 이루어진다는 판단 아래 시행령과 시행규칙을 마련하기 위해 애썼다. 그 결과 세부규칙들은 형식상 공포되지 않았을 뿐 내부적으로는 이미 분배 시행 훨씬 전인 1949년 후반에 마련되어 있었다. 1950년에 들어서자마자 농지개혁 시행에 관한 통첩뿐 아니라 그에 필요한 각종 용지 등이 일선 행정관서에 보내질 수 있었던 것도 이 때문이다.(김성호 외,『농지개혁사연구』, 서울 : 한국농촌경제연구원, 1989, pp. 648, 998~999)

 

주무부서인 농림부로서도 농지개혁 사업이 순조롭게 추진되려면 농지분배가 늦어도 보리수확 및 모내기 작업이 시작되는 6월 이전에 끝마쳐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렇지 않으면 농민들이 곧 누구의 소유가 될지도 모를 농지에 파종하려 들지 않아 올 한 해 농사가 망쳐질 우려가 있었다. 또한 농림부는 농민들에게 서둘러 농지를 분배하고 그들로부터 하곡을 대상으로 상환을 받아야 한편으로는 곧 닥쳐올 지주들에 대한 보상에 충당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당시 식량수급과 관련하여 중요한 행정수단인 양곡수집을 제대로 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한편 이러한 관련 부서의 과잉신속을 부추긴 것은 李承晩의 독려였다. 당시 李承晩이 농지분배를 조속히 시행토록 재촉한 증거는 여러 곳에서 나타나고 있는데, 여기서는 1950년 2월 22일에 있은「서산군 농지개혁 사무 주무자회의 서류」와 1950년 4월 25일 농림부에서 작성한 「농지개혁지침」의 해당내용을 소개해 보겠다.

 

 농지개혁 사무는…예산의 불성립과 지방기구 및 각급 농지위원회 미구성으로 천연 중이었던 바 대통령각하께서는 이에 대하여 각별히 진념하시어 작년 12월 13일 국무회의에서 특별 교시로 금년 춘경기 이전에 완수하게 하라는 분부가 있었고 또 1월 17일에는 국회의장에게 공한을 보내시어 농지개혁관계 추가예산안을 우선 상정케 하라 하였으며…사무추진에 적극 매진함을 요함(「서산군 농지개혁사무 주무자회의 서류」, 김성호 외,「농지개혁사연구」, 서울 : 한국농촌경제연구원, 1989, p.936에서 재인용)

 

 춘경기(春耕期)가 촉박하였으므로 추진상 불소(不小)한 곤란이 유(有)하였으나, 만난(萬難)을 배제하고 단행하라는 대통령각하의 유시를 받들어 정부로서는 최선을 다하여 실행단계에 돌입한 것이다. 제1단계로서는 소작인에게 파종기전, 즉 4월 10일까지 농지분배 예정통지서를 교부하여 장차 자기 농지가 된다는 것을 전제로 하여 안심하고 파종하라는 것이다.(「농지개혁지침」4쪽, 김성호외, 위의 책 p603에서 재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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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李承晩대통령과 농지개혁 3

한국전쟁 전에 농지의 상당부분이 분배되었다
김일영 성균관대학교 교수. 정치학





          1948.12.    조봉암


[ ...... 形式만은 無料로 준다는 것이나  現物로 더 걷어가는 實情에 있으니  結局 農民들은 좋와 안는다. .......       ]



              남조선민보  


 米糓買上은 樂觀

              曺農林長官壯言 


     1948년 12월 29일


【開城廿七日發合同】 農林長官 曹奉岩氏는 지난 廿五日 開城方面 米糓買上 督勱次 來到하였는데 記者와 會見하고 다음과 같은 一問一答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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問  北韓의 土地改革과 南韓의 改革과는 어떠케 다르다고 보는가


答  北韓은 「볼세뷔키」方法이고  南韓은 民主主義方法이다.  北韓처럼 無償分配라해도  農民들은 고마워하지 안을 것이다.  왜냐하면 形式만은 無料로 준다는 것이나  現物로 더 걷어가는 實情에 있으니  結局 農民들은 좋와 안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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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45.10.3.     해방일보


[ ...... 전토지를 國有化하고 이것을 농민의 노력과 그 가족수에 비례해서 재분배함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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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공산당 중앙위원회 명의로 발표된 〈土地는 農民에 適正分配-공산당의 토지문제에 대한 결의-〉에서 “부르조아 민주주의 혁명과정에 있어서 전토지를 國有化하고 이것을 농민의 노력과 그 가족수에 비례해서 재분배함으로써 완전 해결되는 것이다”(〈해방일보〉 1945.10.3)라 했다. 이것이 좌익계 문서에서 토지개혁이 곧 ‘國有化’임을 노출해 버린 유일의 기록이고, 여타의 경우는 모두 농민에게 ‘소유권’을 준다고 위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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國史館論叢 第25輯   >   農地改革硏究 (金聖昊)  




             1949.4.


[ ...... 말이 유상분배지 실은 무상분배의 가면을 쓴 다른 지역의 그것보다도 훨씬 유리한 것임 ........     ]


[ ...... 상환액을 완납 ..... 임의로 농업에서 이탈하기로 되어 있으니 북한처럼 국가의 소작인과 같은 구속은 받지 않는다. .......     ]


[ ...... 농지를 상실한 지주로서 상업능력이 있는 이에게는 공업생산, 광산개발, 수산개발 등 근대산업에 우선 알선 .......     ]



<농지개혁의 근본이념:농림부 농림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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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히 농지를 상실한 지주로서 상업능력이 있는 이에게는 공업생산, 광산개발, 수산개발 등 근대산업에 우선 알선케 하였으니 지주들로 하여금 가일층 진실한 인간적인 생활과 유효적절히 역할할 수 있는 기회를 부여한 것이니 소극적인 지주의 구제책이라기 보다는 그들의 비약적인 발전에 길을 열어 준 것이라고 할 수 있는 일이다. 


더욱이 老·幼·婦女子로서 농지상실로 인하여 그 생활방도가 難免한 지주에게는 생활비와 아동의 교육비로 農地代價보상금 외에 특별보조금을 지불할 것도 고려하고 있는 바이다.


국회를 통과한 농지개혁법안의 지주에 대한 지가보상은 평년작 주생산물·생산량의 15할로 결정되고 농지를 분배받은 농민에게는 이보다도 낮게 12할 5푼의 상환율로써 매년 생산고의 2할 5푼 정도를 5년 간 年賦償還하기로 되었다. 말이 유상분배지 실은 무상분배의 가면을 쓴 다른 지역의 그것보다도 훨씬 유리한 것임을 알아야할 것이다. 더구나 소지주에게 대하여는 3할 정도 지가보상에 첨가케 하였으니 이 얼마나 상식적이고 온정적인 것인가?


또 교육재단에 있어서는 그 재정기초에 동요가 없게끔 특별취급을 하기로 하여 文敎발전에 지장이 없게 하였으며 篤農家를 고려하여 자작농지를 3정보까지 보유케 하였다.


농지의 분배를 받은 농민은 상환액을 완납하기까지에는 임의처분을 하지 못하나 그 이후나 일정한 수속을 밟아서 임의로 농업에서 이탈하기로 되어 있으니 북한처럼 국가의 소작인과 같은 구속은 받지 않는다. 물론 분배받은 농지를 소홀히 하여 경작에 무성의하거나 상환금·조세 등 농지에 따르는 당연한 부담을 태만히 하여 국민된 도의에 어그러질 때는 모처럼 분배받은 혜택을 상실할 것이니 농민은 생산증강에 힘써야 할 것이다.


이미 처분된 귀속농지에 있어서는 경지면적에 아무런 변동은 없으나 상환율에 있어서나 연한에 있어서는 동일히 취급하기로 되어 있다.


요컨대 남한 농지개혁의 중요한 특징은 종합적인 산업재건의 기초를 수립하려는 것과 지주의 민족자본과 그 역량을 건국경제에 유효 적절히 활용하려는 점, 지주에게는 15할을 보상하면서 대지주에 대한 체감율과 귀속농지 수익으로써 충당하여 농민의 상환율을 2할 5푼이나 싸게 해서 국가의 세농민에 대한 온정을 보인 것 등 그 特點이 다른 어느 지역에서 실시한 것보다도 다른 점이 있는 것이다. 또 본법의 국회통과에 際하여 소작권 박탈과 부재지주 농지의 매매금지 등 말썽 되던 농지개혁임시조치법의 삽입된 데 크나큰 이채를 가지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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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9년 04월 27일    

주보 제6호, 3~8쪽    

<농지개혁의 근본이념:농림부 농림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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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남한의 농지개혁이 북한보다 못했다는 얘기가 있었는데.


 “중국이나 북한에서 농민에게 분배된 토지는 곧 집단농장으로 바뀐다. 중국은 덩샤오핑(鄧小平)의 개혁에 이르기까지 수천만 명이 굶어 죽었다. 북한은 오늘날까지 만성적 식량 부족에 시달린다. 참으로 아이러니한 대비다.


대한민국 건국과 농지개혁, 한국전쟁이 전개된 과정을 새롭게 조명해야 한다. 이승만 정부의 농지개혁으로 땅을 갖게 된 수많은 자영농의 자발적 중노동과 창의력이, 또 그들의 교육열이 오늘 대한민국의 자본주의 경제발전 기적을 만든 에너지의 원천이다. 위대한 나라가 탄생했다. 대한민국 건국이야말로 우리 민족 역사에서 가장 큰 사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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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국은 우리 민족사 가장 큰 기적 … 진보도 인정해야”
[중앙일보] 입력 2013.04.10

주대환 사회민주주의연대 대표가 보는 현대사 논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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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지개혁의 의미는….


“1950, 60년대 우리나라 토지 소유의 평등지수는 세계 1위였다. 그만큼 세계사로 봐도 가장 철저한 농지개혁이 이뤄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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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의 ‘무상몰수 무상분배’에 비해 한국의 농지개혁은 효과가 작았다는 주장들이 있었다.


“농지개혁법은 농민에게 지극히 유리한 조건이었다. 소출의 30%를 5년만 정부에 내면 소유권을 갖도록 했다. 한 해 10석이 나는 땅이라면 매년 3석씩 5년간 내라는 거다. 일제강점기 한 해 5석씩 소작료를 내던 농민이 3석씩 5년 동안만 내면 내 땅이 된다는데 누가 포기하겠는가. 지주들에게는 국채를 줬는데 전쟁 통에 인플레이션으로 휴지조각이 됐다. 그래서 지주들이 쫄딱 망했다. 북한은 1950년대 중반부터 집단농장을 만들면서 국유화했다. 그 결과는 모두 아는 바와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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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워인터뷰]  주대환 부회장  “죽산이 추진하고 인촌이 도운 농지개혁, 평등과 번영 이끌어”

조종엽 기자      2019-04-05 




[ ...... 지주가 사전 방매한 토지의 가격이 법정 상환가격보다 높지 않음이 일반적 .......

   ..... 사전 방매도 결국 개혁의 강제성 때문인 만큼 크게 보아 농지개혁의 효과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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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지개혁의 효과에 관해서는 1980년대까지만 해도 비판적인 견해가 우세했습니다. 정부가 직접 수용하여 분배한 토지가 전체개혁 대상의 절반도 되지 않은 가운데, 많은 토지가 지주에 의해 은닉되거나 사전에 소작농에게 고가로 강제 처분되었다는 것이죠. 그런데 최근의 여러 구체적인 연구는 지주가 사전 방매한 토지의 가격이 법정 상환가격보다 높지 않음이 일반적이었으며, 또 대량의 사전 방매도 결국 개혁의 강제성 때문인 만큼 크게 보아 농지개혁의 효과로 간주해야 한다는 견해를 제시하고 있습니다.


《재인식》에 실린 장시원 교수의 논문, <농지개혁ㅡ지주제 해체와 자작농체제의 성립ㅡ>은 이러한 새로운 동향의 연구 성과를 잘 대변하고 있습니다. 어쨌든 농지개혁으로 지주제가 소멸하고 전 경지의 96%가 자작지로 바뀌었습니다. 농지개혁의 효과는 어느 정도 국가체제가 안정된 1950년대 말부터 나타나기 시작합니다. 자신의 농지를 소유하게 된 농민들의 생산의욕으로 농업생산력이 부쩍 증가하기 시작했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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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영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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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45.10.5.    미군정청   법령 9호


[ ...... 군정청에서는 농민의 번영과 보호를 꾀하고자 최고 소작료를 전 수확의 3분지1로 제정 .......    ]


법령9호 공포    


자유신문  1945년 10월 11일    


군정청에서는 농민의 번영과 보호를 꾀하고자 최고 소작료를 전 수확의 3분지1로 제정하여 다음과 같이 발표하였다.


5일밤 군정장관으로 발표된 법령에는 소작인과 지주간의 현존하는 계약과 협정이 개정되었다. 따라서 소작인이 지불할 최고소작료는 소작인이 경작한 토지의 총수확물의 3분지1로 협정되었다.
그러므로 토지에서 산출된 전수확의 3분지1 이상의 소작료에 대하여는 여하한 새로운 규정된 계약도 실시되지 못한다. 그럼으로 이 법령에 위반하여 작성된 계약도 소작인을 보호하기 위한 것이면 그 효력이 계속되고 지주가 법령에 위반할 때는 그 1할을 감한다.

그리고 지주는 재판후에 결정되는 이외에 현재의 소작관계를 해약하지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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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미군정에서도 나중에 3.1제를 실시 .......

  ...... 농민들이 고마워했다. 농민들이 3.1제도 좋아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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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7제와 3.1제, 농민과 해방의 의미


프레시안 : 지방 상황을 조금 더 짚어보자. 소작료 문제에서도 적잖은 변화가 이뤄졌다.


서중석 : 앞에서, 많은 한국인이 해방의 뿌듯한 감격을 (본격적으로) 맛본 건 8월 16일부터 치안대가 각지에서 활동하는 걸 보면서였다고 말했다. (그에 못지않은 것이) 3.7제였는데, 이건 인민위원회가 활동할 무렵 실시됐다. 3.7제는 소작료를 소출의 3할로 하라는 것이었다.


당시 한국인 대다수가 농민 아니었나. 3.7제가 실시되니까 농민들은 '이게 진짜 해방'이라고 느꼈다. '우리가 소작농으로 설움을 얼마나 많이 받았느냐. 그렇게 힘들게 농사를 지어도 다 소작료로 빼앗기지 않았느냐. 그런데 7할을 우리가 차지하고 3할만 지주한테 주면 된다? 아, 이런 세상을 만나게 됐으니 이거야말로 해방된 세상 아니냐', 이런 기쁨을 느꼈다는 것이다.


그래서 미군정에서도 나중에 3.1제를 실시한다. 무슨 이야기냐 하면, 해방을 맞은 한국 농민들의 그 기쁨을 미국도 묵살할 수 없었다는 것이다. 해방 후 한국인들이 스스로 누리고 있던 자유를 (미국이 아주) 묵살할 수는 없었던 것하고 똑같은 일이 여기서도 일어난 거다.


3.1제는 (소출의) 3분의 1만 지주한테 주고 3분의 2는 농민이 차지하라는 거다. 66퍼센트를 농민이 차지하게 됐으니 3.7제랑 비슷한 것이다. 그래서 그것에 대해선 농민들이 고마워했다. 농민들이 3.1제도 좋아했다. (해방 공간을 살필 때) 이런 점도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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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중석 : 한민당도 토지 개혁에 직접 반대한 적은 없다. 다만 어떤 식으로 하느냐를 가지고 실질적인 반대를 한 것이다. (이와 달리) 한민당의 김병로 같은 사람은 이미 1945년에 '소작료와 소작제, 이거 완전히 없애버려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뿐만 아니라 (토지를) 무상 몰수, 무상 분배해야 한다고도 이야기한다. 아, 한민당 중진이 이렇게까지 발언하는 것을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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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有價買收한 토지를 무상분여한다는 것은 국가의 재정적 파탄 ........

  ...... 재정적 파탄을 면하려면 부득이 농민에게 중세를 과하게 될 것 .........    ]


좌우합작 7원칙과 입법기관의 설치에 대한 각계 견해    


동아일보, 서울신문 1946년 10월 09일    


左右合作의 7원칙 발표에 대한 일반의 반향은 어떠한가?

각 정당의 견해는 대략 다음과 같다.


◊ 탁치반대를 재성명 韓民黨


“합작 7원칙중 모호한 점이 있는 것이 유감이다.


1) 제1조에 있어서 3상회의 결정에 의하여 민주주의 임시정부 수립을 기함에 운운한 것은 한민족의 치명상인 신탁통치문제에 대하여 하등 언급한 바 없으므로 本黨은 이에 전민족의 총의를 대표하여 신탁통치 반대의 태도를 재해명하는 바이다.


2) 제3조에 있어서 토지제도를 개혁하여 경작농민에게 분배하는 것은 본당의 원래부터 주장하는 바이나 有價買收한 토지를 무상분여한다는 것은 국가의 재정적 파탄을 초래하게 될 것이요 이 재정적 파탄을 면하려면 부득이 농민에게 중세를 과하게 될 것이며 또 무상분여한 토지는 결국 경작권만을 인정하고 농민의 소유권을 부정하는 결과가 되고 말지니 이는 농민에 대한 일시 기만책이 됨을 不免할 것이다. 이에 본당은 단호 반대하는 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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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獨立硏究所 梁又正


“1) 토지개혁에 있어 有條件 몰수를 하여 무상분여를 한다는 것은 국가경제관념의 몰상식한 소치요 일시적으로 농민의 환심을 사려고 한 기만정책이다. 유조건 몰수한 토지대금은 무슨 돈으로 지불될 것인가? 정부가 토지에 대한 절대권능을 가지고 정부라는 새 지주가 농민을 착취함으로써 이러한 지지를 補塡하지 않으면 아니될 것이다.


1) 3상결정에 의한 임시정부 수립은 정당한 해석이다. 미소공위는 반탁자 배제안을 소련이 고집함으로써 결렬된 것이니 미소공위의 속개 요청조건은 찬탁으로써만 성립될 것이다.”

(동아일보 1946. 10.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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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47.3.8.  동아일보


[.....토지를 국유화하야.... 농민을 노동자화하려는 것 .......

 .....경작권을 확립하는 데 불과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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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그 차이점은 전자는 사유재산을 부인하기 위한 것이요 , 후자는  사유재산을 보유하기 위하여서다. 즉, 공산주의자가 토지를 농민에게 무상분배한다는 것은 농민의 토지소유욕을 만족시키려는 것이 아니라 , 토지를 국유화하야 국영농장 혹은 공동농장을 만드러서 농민을 노동자화하려는 것이다.


그러나 경작권을 확립하는 데 불과하는 무상분배란 소련의 농민이 실허하는 것과 같이 조선의 농민도 이것을 실허할 것이며 설혹 이것을 권력으로 강제한다 하더래도 그에 순응할만한 도덕심이 수반되지 않기때문에 국가적견지에서 우려되는 것은 소유욕의 압살에 의한 생산감퇴의 현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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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우리가 유의하지 않으면 안될 것은 기계적 토지국유화로서는 농업생산을 증대시킬 수 없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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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기에 박헌영씨가 조선의 소련방가입을 운운한 것은 , 일시적 실언이 아니라 박씨의 신념인 것이며 조선이 소련방에 가입한다는 것은 비단 박씨뿐이 아니라 , 공산주의자라면 최대의 영광으로 생각하는 바일 것이다. 박씨가 소련방가입 운운을 부인하는 것은 민족적 감정에 대한 전술적 도회에 불과한 것이다. 


일반적으로 공산주의자가 민족을 문제시한다는 것도 그 민족의 유지와 발전과 번영을 과제로 하는 것이 아니라 , 무산계급의 독재정권수립을 위하야, 세계혁명을 위하야 그 씨족을 여하히 유도할 것인가가 문제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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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46.1.5.   소련 , 조만식 연금

   1946.3.5.   북조선 토지개혁에 대한 법령

   1946.3.23.  김일성 20개조 정강




          1946   북한


國史館論叢 第25輯   >   農地改革硏究(金聖昊)  >   Ⅱ. 南北分斷과 土地改革   >   2. 北側土地改革과 分斷固着  


2.  北側土地改革과  分斷固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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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토지의 무상분배는 곧 土地國有化를 전제(〈해방일보〉1945.10.3.) 註 005
하는 소비에트 경제체제이므로 남한의 자본주의 경제체제와는 전연 다르다. 이러한 체제의 분단상황에서 미·소협상에 의한 남북단일의 임시정부는 이미 물건너 간 것이었다.


그럼에도 소련군은 예정일보다 16일이나 뒤늦게  서울에 와서 제 1차 미소공위(1946.3.21)에 참가하여 협상의 전제조건으로 반탁파의 제거를 요구했다. 그러나 이 요구는 ‘정치적 중립’을 전제로 했던 미군측으로서는 도저히 받아 드릴 수 없는 조건임에 따라 제 1·2차 미소공위는 필연적으로 실패할 수밖에 없었다. 결국 신탁안은 겉으로 ‘정치적 중립’을 표방하면서 실제로는 이를 파기한 소련측의 이중노선에 의해 이미 부정되었던 것이다. 그러면서도 추진한 미군과의 협상은 이를 성공시키 위해서라기보다 북한의 소비에트화에 의한 남북분단을 고착시키고 아울러 미소공위를 처음부터 와해시키려던 소련측의 각본으로 보아야 비로소 소련측이 이중노선을 밟은 이유가 해명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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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46.3.20.     스티코프


[ ...... 民主主義制 건립을 방해하는 反逆者와 또는 反民主主義的 악질분자들의 반대 .......


  ..... 모스크바 三相會議의 결정을 지지하는 각 민주주의적 정당과 사회단체를 망라한 대중단결의 토대위에서 창설되어야 할 것 .........


  ...... 朝鮮은 미래에 蘇聯을 침범함에 필요한 요새지와 근거지가 되지 않을 것을 기대합니다 ........      ]



덕수궁 석조전에 제1차 미소공위 개최
 

 
서울신문

1946년 03월 21일

 


莫府三相會議 결정에 따라 朝鮮에 관한 제3조 제2항에 의한 朝鮮臨時過渡政府 조직에 협력하여 이에 적응한 제방책을 준비 작성하려는 美蘇共同委員會는 3천만 待望裡에 20일 드디어 개막되었다. 同會議가 朝鮮의 진로를 좌우하는 중대한 관건을 쥐고 있는 만큼 그 추이는 자못 3천만 민중의 주목의 集點이 되고 있다. 이런 의미에서 3천만의 감격과 흥분은 격앙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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全世界 環視裡에 美蘇共同委員會 제1차 회담은 新粧한 德壽宮石造殿에서 20일 오후 1시 5분 역사적인 막을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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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지將軍 開會辭


쉬티코프將軍 共同委員諸位 及 本 開會式에 참관하시는 여러분! 


나는 큰 즐거움과 기대를 가지고 모스크바 三相會議에서 결정된 조항을 이행하기 위하여 朝鮮 서울에서 개최되는 美蘇共同委員會 開會式에 蘇聯代表를 환영합니다. 오늘은 朝鮮歷史上 중대한 날입니다. 이날이야말로 全朝鮮民族이 朝鮮國家의 장래를 위하여 큰 희망을 가지고 기다려 오던 그날이오 또 朝鮮歷史上 신기원의 출발일로 장래에도 경축할 그날이올시다. 全世界와 朝鮮人의 안목이 이 자리에서 되는 우리의 심의를 지켜보고 있습니다.


세계의 2대 강국이 압박과 학살을 타파하고 얻은 그 승리를 善用하여 원만한 노력을 하느냐 또한 불행하고 오래 압박을 받은 나라를 自由列國中의 1개 獨立自主國으로 회복시킬 능력이 있느냐는 이 共同委員會의 결과가 증명할 것입니다. 이 위원회가 성공하여 성과를 거두면 이것은 朝鮮의 장래와 세계의 평화 행복에 恒久한 결과를 남길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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쉬티코프 蘇聯首席代表 人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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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全朝鮮民衆의 내부생활을 점차 民主主義化시키는 도움에는 곤란한 점이 있습니다. 곤란한 民主主義制 건립을 방해하는 反逆者와 또는 反民主主義的 악질분자들의 반대로 인하여 생기는 것입니다. 共同委員會의 과업은 朝鮮人民들이 국내의 부흥과 民族民主主義化 실천사업을 능히 실행할 그런 民主主義的 朝鮮臨時政府를 창건함에 幇助할 것입니다.


 미래 민주주의적 조선임시정부는 모스크바 三相會議의 결정을 지지하는 각 민주주의적 정당과 사회단체를 망라한 대중단결의 토대위에서 창설되어야 할 것입니다. 다만 이러한 정부라야만 朝鮮의 經濟, 政治 各 部門에 잠복된 과거 日本通治殘滓要素를 영영 숙청할 능력을 가질 것이며 국내 反動分子들과 反民主主義的 惡黨들과 경쟁적 투쟁을 할 수 있을 것이며 人民經濟 회복과 朝鮮人民들에게 정치적 자유와 極東의 평화건설을 위한 투쟁에서 적절한 대책을 취할 수 있게 될 것이다.


蘇聯은 朝鮮의 진실한 民主主義的 獨立國家가 되기를 기대합니다. 그리하여 朝鮮은 미래에 蘇聯을 침범함에 필요한 요새지와 근거지가 되지 않을 것을 기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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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46.5.12.  獨立戰取國民大會


[ ...... 애국렬에 불탄 10여 만의 애국시민은 서울동쪽언덕에 운집하여  하늘이 찢어져라 부르짖은 .......      ]


[ .....  38의 絞首線問題도 蘇聯의 거부에 의하여 장벽이 상존한 채 철폐가 무망이니 .......

  ...... 국제적 公理인 의사발표의 자유까지도 부정한 蘇聯의 독단을 .......   ]


[ ......  敵은 우리 墻內에..... 惡質共系의 叛逆言動을 일소하여 民族綱紀의 숙청을 .......   ]



조선일보, 동아일보 1946년 05월 13일    


독립戰取국민대회가 개최


반 만 년의 찬란한 역사와 한 피로 자라온 배달민족의 명예를 피와 땀으로 뭉치고 뭉쳐 우리의 살길을 찾기 위하여 수 개월을 두고 세계공약에 의하여 우리의 자주정부를 수립하여 줄 미소공동위원회의 추이를 고대하고 은인자중하여 오던 애국렬에 불탄 10여 만의 애국시민은 서울동쪽언덕에 운집하여 하늘이 찢어져라 부르짖은 (略)


 獨立戰取國民大會는 12일 오후 1시 반부터 서울운동장에서 개최된 바 대회는 먼저 국기에 경례를 하고 애국가 합창에 이어 선열에 대한 경건한 묵도를 드린 다음 대회 회장인 吳夏英으로부터


 “우리는 미소공동위원회에서 어떤 기쁜소식이 나오지나 않나 하여 매일같이 라디오 신문에 온 신경을 총집중하였던 것이나 오늘날에 접한 소식은 과연 우리를 기쁘게 하였던가. 해방이래 9개월이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오늘 바라고 바라던 기쁜소식은 어디로 사라졌는지 이때 우리는 다시 한 번 각성하고 주먹을 힘있게 쥐어 싸워 나가지 않을 터인가.


 오늘 이 자리에 모인 여러분은 사느냐 죽느냐 하는 이 중대한 시기를 당하여 우리의 나라를 우리의 손으로 완전자주독립시켜 4천년래 이어받은 혁혁한 역사를 자손만대에 물리지 않을 터인가.

자! 전취하자. 완전자주독립을” 


하는 열열한 개회사가 있자 곧 이어 咸尙勳으로부터 미소공동위원회진상보고가 있고 뒤따라 조선민주당 白南弘의 서북조선진상보고가 있었으며, 선언문을 申均이 결의문을 朴永昌이 각각 낭독하였다. 그리고 다음의 순서로 각 단체대표의 결의를 표명하고 동 오후 4시 경에 만세 3창으로 뜻깊은 대회를 마치었다.


◊ 各團體代表 決意表明


大韓獨立促成全國靑年總聯盟 韓旻洪, 基督敎全國靑年聯合會 姜元龍, 大韓獨立促成愛國婦人會 黃基成, 大韓獨立促成勞動總聯盟 金龜, 大韓獨立農民總聯盟 方致規, 美蘇共同委員會對策全國國民總聯盟 金一, 反託學生總聯盟 李哲承, 大韓獨立促成國民會 李重根, 新朝鮮建設同盟 李康勳, 文學家協會代表, 學生獨立戰線代表


◊ 大會宣言


모 단체 고집으로 인하여 우리의 절실한 요구는 위기를 통하여 흐르는 先代의 긍지를 받들어 깊이 자손만대의 번영을 염원하는 우리는 이에 獨立戰取國民大會를 개최하고 3천만 대중의 이름으로써 밖으로 34隣諸邦의 숙고를 구하고 안으로는 혈족동기의 궐기를 촉하여 엄숙히 선언하는 바이다.


國際公約에 의하여 보장된 우리 臨時政府의 수립을 위하여 개최되었던 美蘇共同委員會는 蘇聯의 번복에 의하여 시일을 徒費한채 무기로 정회되었으니 세계의 公眼은 이를 어떻게 보려고 하는가 國土와 國民을 兩斷하고 나아가 國是와 國權을 兩分케 한 38의 絞首線問題도 蘇聯의 거부에 의하여 장벽이 상존한 채 철폐가 무망이니 세계의 公議는 이를 어떻게 논하려 하는가?


자주독립의 이념과 배치되는 신탁관리를 우리에게 강요하려는 蘇聯의 權謀와 인류적 특권이오 국제적 公理인 의사발표의 자유까지도 부정한 蘇聯의 독단을 어디다 문책하며 어떻게 규정할 것인가?


外力의 제압에 血과 肉이 제물이 되었던 40년 통한을 回憶하고 다시금 外力의 方寸에 形과 體가 左右되려는 현하의 苦境을 직시할 때 우리는 他를 책하여 허물을 3자에게 찾기 보다도 源由를 자신에게 살피어 內省할 필요를 느끼나니 究其本源의 길이 여기에 있다고 믿는 까닭이다. 보라! 來寇보다도 敵은 우리 墻內에 있고 外傷보다도 菌은 우리 體內에 있으니 시공이 자별한 민족적 독자성을 무시하는 叛逆徒黨의 존재가 그것이며 他方에 追尾하여 外侮를 誘致한 惡質共系의 언동이 그것이다. 민족적 자아의 존엄을 모독하여 受託의 妄論을 공언하고 민족적 巨役인 광복의 전야에 처하여 분쟁을 시사하니 이를 가히 참을 수 없다 할진대 무엇인들 못참을 것이랴?


실리만을 취하여 互全에 苟安함이 본래 우리의 義가 아니오, 명분만을 위하여 玉碎로 나감도 우리의 策이 아니나 그러나 民族正氣의 주축은 부동이라 行坐進退의 한계가 자재하여 자율정체의 주권과 독립국가의 면목을 고수할 背水陳頭의 일선이 있으니 이는 곧 우리의 생명이다.


이를 世界에 명시하여 輿論을 수긍케 할 자가 누구이며 이를 永劫에 護持하여 만민을 일관케 할 힘이 무엇인가! 오직 自我요 오직 自力이다. 自尊·自持의 기초가 바로 여기에 있고 自立·自行의 진로가 바로 여기에 있으며 自助·自勉의 방책이 바로 여기에 있다. 전지 전능을 이 일점에 응결시키고 총의 총력을 이 일선에 集注시키어 解放朝鮮을 거룩하게 하고 光復朝鮮을 빛나게 하자. 이에 5개 조의 결의를 들어 3천만 겨레의 심장에 격한다.


獨立戰取國民大會

決意5箇條


1) 美蘇共同委員會의 책임을 규명하여 국제여론의 심판을 구함

2) 自主政府의 자율적 수립을 촉진하여 民意의 歸一을 기함

3) 38장벽의 철폐를 목표로 國民動員의 실적을 擧함

4) 惡質共系의 叛逆言動을 일소하여 民族綱紀의 숙청을 圖함

5) 友邦善隣의 협력하에 경제건설의 매진을 요함


大韓民國 28년 5월 12일

獨立戰取國民大會





        1948.3.22   미군정청  귀속농지불하


[ ...... 농민들의 호응은 열광적이었다. ........

   ...... 귀속농지 불하는 급속도로 추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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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總選擧 이전에 小作農家 절반가량이 농지 불하받아

  

  3월 22일자로 발족된 중앙토지행정처는 설립과 동시에 행정기구 개편과 농지매각에 관한 실무자 교육을 실시하여 4월 8일에는 토지분양개시식을 거행하고, 서울에서 가까운 양주군과 고양군의 100여 농가에 매호마다 450여평씩 15정보가량을 분양했다.19) 그리고 전국적으로는 5,000호의 경작농가에 양도증서를 교부하고 등기절차를 끝냈다. 


농민들의 호응은 열광적이었다. 4월 1일부터 시작된 귀속농지 매각은 급속도로 진행되어 4월 13일 현재 양도수속이 완료된 건수는 토지행정처 서울지청 관할이 8,162건, 대구 관할이 8,343건, 부산은 937건, 그리고 이리는 무려 20만 5,775건에 이르렀다. 한편 신한공사 토지의 전 면적 가운데 절반가량을 차지하는 전남북의 일부 지주는 귀속농지 불하에 대해 맹렬한 반대운동을 벌였다.20)
 


이 조치에 좌익 정파들의 입장은 민주주의민족전선의 논평에 집약적으로 표명되어 있다.
 

  “이번 군정당국이 동척(東拓)의 후신인 신한공사 소유지를 비롯하여 일본인이 강점했던 전답을 방매 처분하게 된 것은, 첫째로 괴뢰적 반동 단정 조작을 위한 남조선 단선을 앞두고 농민의욕을 사서 득표를 노리자는 것이요, 둘째는 전농안(全農案)에 표시된 민주적 토지개혁을 요망하여 투쟁하고 있는 남조선인민의 투쟁의욕을 토지를 농민에게 준다는 허울 좋은 기만으로 거세하자는 것이요, 셋째는 반동적 기만적 토지개혁의 전례를 만들 음모로써 소위 ‘입법의원토지개혁안’과 같은 지주의 특권 옹호적 반동 토지개혁을 실시하여 봉건적 지주토지제도를 영구화하여 지주를 미제의 침략과 식민지화의 앞잡이로 충실화하여 괴뢰 단정의 물질적 토대를 튼튼히 닦자는 기만적 모략적 술책이다. …”21) 

 
  그러나 귀속농지 불하는 급속도로 추진되어 총선거 이틀 뒤인 5월 12일 현재 전 농가의 44.6%가 귀속농지를 분양받았고, 8월까지는 86%의 농지가 불하되었다. 그리하여 정부수립 이후에 실시해야 된다는 명분으로 반대하던 우파인사들도 이를 기정사실로 받아들이고 농지개혁의 기념행사에 참여하는 등 협조적인 반응을 보였고, 좌익 그룹은 이에 대한 반대 캠페인의 시간적 여유도 갖지 못했다.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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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3년 수확물과 동일가격(평년소출의 20%를 15년간 현물로 분납)으로 농지를 구입하게 된 농민들은…낮은 가격을 기뻐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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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법의원의 와해로 ‘토지개혁법안’이 유산되자 미군정은 1948년 3월 22일자로 歸屬農地賣却令 및 新韓公社解散令을 공포, 이 날짜로 商法體制였던 신한공사를 정부기구로서의 中央土地行政處로 재발족시켰다. 이러한 재발족에 앞서 이미 5일간(1948.3.16∼20)에 걸쳐 직원들에게 토지매각 요령을 특별히 교육시키어, 4월 8일부터 토지매각을 개시했다. 이와같이 미군정이 토지매각을 서두른 이면에는 철군 외에 또 다른 목적이 있었다.


즉 군정당국은 5·10총선을 앞두고 이 사실을 알리기 위해 수 십만장의 항공삐라를 농촌 전역에 살포하고 또한 전국적으로 포스터를 부착했다. 그런데 “이 항공삐라와 포스터에는 귀속농지를 경작하는 농민들에게 그 토지를 시세에 합당한 가격으로 팔 것이며, 상세한 내용은 지방토지행정처나 마을의 農監들에게 문의하라고 했다.


이에 대한 농민들의 반영은 대단했다. 여러 곳의 행정처 앞에는 설명을 듣기 위한 농민들의 행렬이 줄을 이었다”(C.C. Mitchell, 1949, p.127). 이와 같이 군정당국은 5·10총선의 弘報物에 토지분양을 함께 선전했다. 말하자면 귀속농지가 미군정의 5·10총선에 선물로 이용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5·10 총선까지 적어도 10만호에 토지를 분양할 목표였다. 이것이 어떤 목적이었는가는 다음의 G-2 보고서에 잘 나타나 있다.


…귀속농지의 대부분은 신속히 판매될 전망인데 그 이유는 대부분의 경우 종래의 小作契約을 賣買契約으로 대체하면 되고 또한 1948년 첫번째 수확까지 상환이 유예되었기 때문이다(4월 9일자). 

…중앙토지행정처는 土地分讓式을 거행하여 이 날로 5,000 농가에 경작농지의 양도증서를 교부했다. 이 계획에 대한 농민들의 반응은 대체로 열열하며…3년 수확물과 동일가격(평년소출의 20%를 15년간 현물로 분납)으로 농지를 구입하게 된 농민들은…낮은 가격을 기뻐했다. 실제로 남한의 공산주의자들은 매각계획에 대해 비난성명을 발표했지만 이 계획에 대한 농민들의 호의적인 반응으로 공산주의자들은 수세에 몰리게 되었다(4월 23
일자)

…4월 한 달에 10만 농가의 목표를 훨씬 초과하여 16만 농가에 농지를 매각했다…이 계획을 불신시키려던 공산주의자들의 노력은…소유권을 인수 하려는 농민들의 열망에 직면하여 명백히 실패했다. 또한 우익 지도자들의 초기저항도 점차 사라졌다(5월 7일자). (〈미군정정보보고서〉《자료집》6, pp. 151∼1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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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48.1.22.


유엔소련대표 그로미코, 조선위원단의 북한 입경 정식 거부


조선일보, 서울신문 

 1948년 01월 25일 


22일 UN에서는 蘇聯이 UN朝鮮委員團의 蘇占領下의 북조선 入境要求를 거절하였다고 발표하였다. 사실에 있어 남조선 美軍占領下에 있어서의 위원단의 노력을 제한하는 蘇聯의 태도는 蘇聯外相代理 그로미코로부터 UN事務處長 트리그브 리 補佐 안드류 코이어에 대하여 전달된 1월22일부의 書翰中에 표명한 것으로서 동 書翰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北朝鮮蘇聯軍司令官 訪問의 희망을 표명한 朝鮮委員團 임시의장으로부터 서한 원문을 전달한 1948년 1월 18일부의 서한에 관련하여서는 우리는 貴下에게 1947년의 제2차 UN定期總會 석상에서 UN朝鮮委員團 수립에 대하여 이미 소련정부에 의하여 표명된 부정적 태도를 想起함이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바이다.

[레이크썩세스 14일발 AP 合同] 

(조선일보, 1948. 1. 25) 




          1948.3.


[ ...... 새로운 희망을 안고 남북통일의 날을 기다리며 .......


 ...... 남하하는 동포는 매일 8백명 내지 1천명으로 날마다 그 수가 늘어 .......       ]


38선 월남자수 급증 


동아일보 

1948년 03월 04일 



3천만 민족이 갈망하던 조선중앙정부수립을 위한 총선거가 국제연합소총회에서 가결 결정되어 오는 5월9일 조선위원단 감시 밑에 그 실시를 보게 되었거니와 이 반가운 소식이 電波를 통하여 북조선 동포들에게 알려져 그 모진 억압속에서도 새로운 희망을 안고 남북통일의 날을 기다리며 또 한편 성급한 겨레들은 보따리짐짝이나마 죽음의 고개 38선을 넘어 오고 있는데 요즈음 開城 議政府 春川 注文津 등 각처 수용소를 통하여 남하하는 동포는 매일 8백명 내지 1천명으로 날마다 그 수가 늘어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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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48.3.


[  ...... 월남동포가 약 150만 명이고 그후도 계속적으로 매달 2, 3만 명이 월남중 .......      ]


월남자 140만 명, 귀환동포 200만 명 등 이재민 실태 


대한일보 

1948년 09월 11일 



해방 이후 해외 각지로부터 귀환한 해외동포, 38이북으로부터 남하한 월남동포 또는 그 동안 마비상태에 빠진 각 생산공장에서 수없이 밀려나온 실업자군, 기타 친족·가족 등을 잃어버리고 거리를 방황하는 어린이·노인 등 300여만 명이 지금 남조선 각지에서 조국애도 동포애도 인정도 모르는 채 정처없이 헤매이고 있다.


즉 그 동안 보건후생부·외무처·노동부 등에서 지난 3월말까지 조사한 숫자로만 보더라도 월남동포가 약 150만 명이고 그후도 계속적으로 매달 2, 3만 명이 월남중에 있다고 하며 해외귀환동포는 모두 212만 7,503명, 세궁민이 약 1백만 명, 실업자가 약 103만 명 그밖에 孤子·불구자 등의 구호를 요하는 자 약 21만이라고 하는데, 그 중에서 구호를 요하는 자 수는 실로 남조선 총인구의 약 15%에 해당하는 300만 정도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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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48.4.


[ ...... 이북동포의 90%가 李박사 노선을 지지하는 우익이고 나머지 10%가 공산주의자들이다. ........    ]


월남한 북로당원 유재민, 이북실정 폭로
 

 
동아일보

1948년 04월 30일

 

 
북조선인민위원회의 일요인이며 북로당원의 일인인 柳在敏은 북조선의 金日成정책이 비민족적임을 지적하고 25일 월남하여 시내 모 여관에 여장을 풀고 있는데 氏는 왕방한 기자와 다음과 같은 문답을 하였다.


(問) 귀하가 월남한 이유는 무엇인가 


(答) 나는 북로당원의 일원이며 북조선인민위원회의 일인이다. 그러나 그들의 목표는 조선을 적화하려는 소련의 의도를 그대로 계승하여 인민의 생활문제를 도외시하고 있어 인민들은 의식주 안정을 찾기 위하여 남하하는 것이다. 나도 유엔조위의 來朝에 많은 기대를 가지고 북조선의 유엔위원단에 대한 불협조에 불만을 품고 그리운 고향을 뒤로 남하하였다.


(問) 이북동포들은 남북협상을 어떻게 보는가 


(答) 이북동포들은 남북협상에 하등 기대를 가지지 않고 있는데 도리어 남조선 동포들이 기대를 가지고 있다는 것은 기괴한 일이다. 하여간 이북동포들은 여러번이나 북조선인민위원회의 모략 선전에 속아왔기 때문에 이번 남북협상도 기대하지 않고 솔직히 말하면 총선거의 반대 공작이라는 것은 이북동포들도 잘 알고 있다.


(問) 金九씨는 현재까지 공산주의자들과 적대시하여 왔으며 북조선인민위원회에서는 金九타도라는 구호를 부르짖어왔던 것인데 최근의 金九씨 태도를 이북동포는 어떻게 보는가 


(答) 남조선동포들은 북쪽 동포를 전부 공산주의자들이라고 보는 듯하나 이북동포의 90%가 李박사 노선을 지지하는 우익이고 나머지 10%가 공산주의자들이다. 그리하여 이 90퍼센트에 달하는 우익적 동포들은 李承晩·金九 양씨에 많은 기대를 가지고 숭배하여 왔다. 金九타도라는 구호에 우리 우익에서는 반감을 가지고 왔던 것인데 이제와서 공산주의자들과 손을 잡고 전조선에 공산주의정책을 감행하려는 金日成파의 책동에 추종한다면 3천만을 지도할 영도자의 자격을 상실한 것이라고 비난하고 있다.


(問) 이북동포들은 5월 10일 실시될 총선거를 어떻게 보는가 


(答) 이에 대하여서는 이북에서 일체 보도도 없고 언론자유가 보장되지 못한 관계상 자세한 내용을 모르고 있으나 유엔위원단 입경을 거절한 소련군에 대해서 반감을 가지고 있으며 하루바삐 국제무대에서의 우리 독립국가가 실현될 방법을 갈망하느니만치 이번 선거에 많은 기대를 가지고 있는 것만은 사실이다.





           1949.7.


[ ...... 매일같이 심한 부역과 50%를 넘는 현물세에 살 수 없어 월남하였다 ........    ]


북한 한 마을 天道敎靑友黨員 100여 명이 집단 월남 


 경향신문 

 1949년 07월 08일 



이북공산당정권하에서는 살 수 없다고 한 부락이 송두리째 월남한 사실이 있다.


즉 강원도 춘성군 공고리에 살고 있는 26가구 102명이 지난 7월 1일 밤 9시경 북한괴뢰군이 없는 틈을 타서 월남하여 왔다. 그들 가운데는 76세나 되는 노인도 있으며 그들은 소 21頭를 끌고 월남하여 강원도민의 열렬한 환영을 받고 있다.


그리고 그들은 대개 청우당원으로 매일같이 심한 부역과 50%를 넘는 현물세에 살 수 없어 월남하였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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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48년 9월7일  농지개혁법 기초위원회가 발족


[ ...... 이승만은 정부수립 선포식이 끝나자마자 농지개혁법의 제정을 다그쳤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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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만은 정부수립 선포식이 끝나자마자 농지개혁법의 제정을 다그쳤다. 그리하여 농림부 직제가 공포되기도 전인 1948년 9월7일에 농지개혁법 기초위원회가 발족했는데, 위원장은 농림부 장관 조봉암, 부위원장은 기획처장 이순탁(李順鐸)과 농림부 차관 강정택(姜鋌澤), 그리고 위원은 갓 발령받은 농림부 농지국장 강진국(姜辰國)과 지정과장 윤택중(尹澤重), 분배과장 배기철(裵基澈), 사정과장 안창수(安昌洙) 세 담당과장들이었다.3)


법안기초에 착수는 하였으나 참고자료도 아쉽고 각종 통계도 신빙성이 희박하여 필요한 자료를 농촌으로부터 직접 수집해야 할 형편이었다. 초안을 기초했던 강진국은 “농촌 부락의 머슴방이 농지개혁법안 기초의 산실이었다.… 민국정부 수립 후에도 좌익분자가 농촌지대에 많이 묻혀 있다고 짐작했던 까닭에 중앙 관리가 왔다면 경계하고 함구하리라는 예감에서 신문기자를 가장했다”라고 썼다.4)


농림부가 자료수집으로 시일을 끌자 1949년 봄갈이까지 농지개혁을 실시한다고 공언하고 있던 이승만은 11월 중순에 조봉암을 불러 불호령을 내렸다. 이승만이 격노한 것은 농지개혁 계획이 늦어지면서 신문지상에 지주와 소작인 사이의 분쟁이 보도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농림부의 농지개혁법 시안은 이렇게 쫓기는 상황 속에서 11월19일과 20일 이틀 동안 강진국의 집에서 강진국과 세 담당과장이 꼬박 이틀 밤을 새워 만들었다. 이 시안을 다시 강진국과 차관 강정택이 머리를 맞대고 이틀 재검토했다. 초안을 들고 가서 조봉암에게 보고하자 조봉암은 내용을 읽어보지도 않고 “소작인이 잘된다지만 지주도 살아야 할 것 아니오”라고 말했다고 한다.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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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48.12.4.  이승만


[ ...... 정부가 대지주가 되고  농민들은 다 소작인으로 경작 ........

  ...... 부호에 노예되던 것이  지금은 정부에 노예가 된다면 ........    ]

 


[  ...... 자본가가 있어야 국내에 경제가 유통되어서 민중이 다 살 수 있다 ........

   ..... 공장에 일을 얻어 생활방도를 만들어 주어야 ....... 

  ...... 공업과 산업은 자본이 아니고는 될 수 없는 것이니 .........    

  ...... 토지를 내어놓고 그 가격을 받아서 자본을 만들어야 공업에 착수할 수 있을 것 .........      ]



 李承晩 대통령, ‘토지개혁문제’라는 제목으로 방송연설 


게재지명 서울신문
게재일자 1948년 12월 07일


지난 4일 오후 8시 이승만 대통령은 ‘토지개혁문제’에 관하여 23분간에 걸쳐 중앙방송국 마이크를 통하여 대요 다음과 같은 요지의 강연방송을 행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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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나라에 소위 국유지라는 농토와 적산토지를 합하여 다 민유지로 분배시킬 것인데 땅 없는 농민들에게 넉넉히 나누어서 作農하게 하되 그 땅을 그저 내주는 것이 아니고 정당한 가격을 정하여 매년 얼마씩 정부에 보상하기로 約條를 정하고 팔게 할지니 보상하는 條理와 몇 해만에 다 갚는다는 등 細節目은 다 국법으로 정하게 될 것이니 미리 말할 수 없으나 대체로 말하자면 농민이 그 땅에서 自農하여 묵히는 땅이 없고 그 所出미곡으로 가족에 1년 計糧을 제하고는 여유를 팔아서 돈으로 바치거나 미곡을 대신하여 몇 해만에 다 완납한 후에는 정부에서 문서를 주어서 영구히 농민에 사유지로 만들 것이니 이것이 즉 우리 정부에서 주장하는 토지개혁책의 요점이요, 모든 농민은 이대로 되기를 바라며 또한 노력할 것입니다. (서울신문 1948. 12. 7)



다소간 문제되는 것은 소위 대지주에 소속인 큰 농지에 관한 것입니다. 이 대지주들로 말하면 혹은 몇 대 조상적부터 遺傳하여 내려오는 소유지도 있고 또 혹은 돈을 주고 사서 차지한 토지도 있는 것이니 이상에 말한 바 공공한 천연적 재원을 부자들이 사유로 만들었다는 것은 몇 천년 전에 시작이 잘못되었다는 말이요, 중간에 와서 무슨 방식으로든지 소유권을 가지게 된 것은 누구나 인정치 않을 수 없는 것이니 이 대지주들의 땅을 무조건하고 몰수한다는 것은 法理도 아니오 公義도 아닐 것이므로 이 지주들에 소유권은 인정할 뿐만 아니라 국법으로 보호하는 것이 민주주의에 피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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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산제도를 행하는 나라에서는 지주의 땅을 乾沒해서 소작인에게 나누어 준다 하나 실상은 농민에게 주는 것이 아니오 농민들에게 맡겨서 경작하게 하고 그 땅은 정부에서 차지하고 있으므로 그 실상을 말하자면 공산제도가 토지를 인민에게 분배하는 것이 아니라 정부에서 빼앗아서 정부가 대지주가 되고 농민들은 다 소작인으로 경작해서 정부에 받기만 할 뿐이니 부유한 대지주에게 세를 물고 얻어 경작하느니보다 정부의 땅을 얻어서 경작하는 것이 더욱 자유롭지 못하고 속박을 받는 것이니 전에는 부호에 노예되던 것이 지금은 정부에 노예가 된다면 경제상 이해에 무슨 차별이 있으며 농민생활에 아무 도움도 없을 것이다. (서울신문 1948. 12.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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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산주의자들의 토지개혁책이라는 것이 우리와 같지 아니한 외에 또 한가지 우리와 같지 아니한 것은 소위 자본주의라는 문제입니다. 그 사람들의 말은 토지분배로 많은 경제력을 공평히 조정하기에 부족한 모든 금융과 각종 재산을 다 평균히 분배해서 자본가가 없게 만들어야 한다 하나니 우리 주의는 이와 상반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자본가가 있어야 국내에 경제가 유통되어서 민중이 다 살 수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 나라가 자고로 농업을 근본으로 삼아서 자족자급할 능력을 가졌었지마는 지금은 인구가 해마다 증가되어 토지는 한정이 있으므로 그 땅의 소출만 가지고는 그 민중이 먹고 살 것이 부족합니다. 그러므로 공업을 숭상해서 생산력이 발전되어야 땅 속에 묻힌 재산을 패어서 인류생활에 공헌할 것이요, 공업의 소출 물산으로 우리도 쓰고 또한 국외에 수출해서 남의 물건을 바꾸어다가 우리의 생활을 돕게 할 것이며 기계공장을 시설해서 國中에 땅이 없이 농사 못하고 일없이 굶게 되는 사람들이 공장에 일을 얻어 생활방도를 만들어 주어야 될 것이니 이것은 공업과 산업이 아니고는 될 수 없는 것이고 공업과 산업은 자본이 아니고는 될 수 없는 것이니, 그러므로 자본가를 다 없이 해다가 노동자만 살 수 있게 하자는 것은 우리가 찬성할 수 없는 것이니 우선 예를 들어 말할지라도 자본이 없어서 기계공장이 문을 닫게 된다면 다수 실업자가 먼저 타격을 당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공산주의자들은 罷工罷業 등 행동으로 자본가와 충돌을 내며 농민으로 지주와 충돌을 내서 모든 민중이 서로 싸우는 중에 정부가 모든 것을 차지하게 하는 폐단을 우리는 절대 포용치 아니하는 것이니 세계 모든 재원에 세 가지 근본되는 토지와 노동과 자본, 이 세 가지가 서로 충돌을 내지 말고 피차 도와서 합류하여 나가는 중에서 모든 것이 和意로 진전되며 부강전진해 나갈 수 있을 것이니 우리는 농민이 지주를 질시하거나 노동자가 자본가를 원수로 여기거나 하여 自相충돌하는 것을 피하고 서로 제휴 공헌하는 중에서 다 잘살 수 있기를 도모하자는 것입니다. (서울신문 1948. 12. 9) 


우리 나라의 자본은 대부분이 토지에 있나니 지주들이 다 토지를 내어놓고 그 가격을 받아서 자본을 만들어야 공업에 착수할 수 있을 것이므로, 정부에서는 토지대가를 갚아 줄 것이 큰 문제가 되니 이것은 정부와 국회에서 무슨 특별한 방법이 있어서 지금 지주들로 하여금 상당한 자본을 얻게 하는 것이 긴요한 문제이니 이것은 많은 연구로 해결책이 생기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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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신문 1948. 12.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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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박사 재임 중 국회는 지주 출신이 다수를 점하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이 박사가 공산주의자였던 조봉암을 농림장관에 임명해 농지개혁을 강력히 추진했다는 점은 대단히 높은 평가를 받아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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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전쟁 전에 분배가 단행될 수 있었는가?


이러한 여러 가지 증거들로 미루어 볼 때 한국전쟁이 터지기 전에 농지의 상당 부분이 분배되었다는 사실은 부인되기 어려울 것 같다. 문제는 어떻게 관련법규가 정비되기도 전에 정책이 먼저 시행되는 일이 발생했는가이다. 정상적인 근대국가에서는 생각하기 어려운 일이 1950년 봄 한국에서 발생되었다. 이것이 어떻게 가능했을까?

 

이러한 헤프닝이 벌어질 수 있었던 것은 무엇보다도 소관부처의 행정적 판단과 李承晩의 독려가 어우러졌기 때문이다. 정부는 1949년 6월 21일 우여곡절 끜에 농지개혁법(당초법안)을 공포하지만, 그 법안은 내용상 논리적 모순을 안고 있었기 때문에 곧 이어 국회에서 개정작업에 들어갔다. 이 때 행정부의 관련부처에서는 개정안의 국회통과가 시간 문제일 뿐 반드시 이루어진다는 판단 아래 시행령과 시행규칙을 마련하기 위해 애썼다. 그 결과 세부규칙들은 형식상 공포되지 않았을 뿐 내부적으로는 이미 분배 시행 훨씬 전인 1949년 후반에 마련되어 있었다. 1950년에 들어서자마가 농지개혁 시행에 관한 통첩뿐 아니라 그에 필요한 각종 용지 등이 일선 행정관서에 보내질 수 있었던 것도 이 때문이다(김성호 외,『농지개혁사연구』, 서울 : 한국농촌경제연구원, 1989, pp. 648, 998~999)

 

주무부서인 농림부로서도 농지개혁 사업이 순조롭게 추진되려면 농지분배가 늦어도 보리수확 및 모내기 작업이 시작되는 6월 이전에 끝마쳐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렇지 않으면 농민들이 곧 누구의 소유가 될지도 모를 농지에 파종하려 들지 않아 올 한 해 농사가 망쳐질 우려가 있었다. 또한 농림분는 농민들에게 서둘러 농지를 분배하고 그들로부터 하곡을 대상으로 상환을 받아야 한편으로는 곧 닥쳐올 지주들에 대한 보상에 충당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당시 식량수급과 관련하여 중요한 행정수단인 양곡수집을 제대로 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한편 이러한 관련 부서의 과잉신속을 부추긴 것은 李承晩의 독려였다. 당시 李承晩이 농지분배를 조속히 시행토록 재촉한 증거는 여러 곳에서 나타나고 있는데, 여기서는 1950년 2월 22일에 있은「서산군 농지개혁 사무 주무자회의 서류」와 1950년 4월 25일 농림부에서 작성한「농지개혁지침」의 해당내용을 소개해 보겠다.

 

 농지개혁 사무는…예산의 불성립과 지방기구 및 각급 농지위원회 미구성으로 천연 중이었던 바 대통령각하께서는 이에 대하여 각별히 진념하시어 작년 12월 13일 국무회의에서 특별 교시로 금년 춘경기 이전에 완수하게 하라는 분부가 있었고 또 1월 17일에는 국회의장에게 공한을 보내시어 농지개혁관계 추가예산안을 우선 상정케 하라 하였으며…사무추진에 적극 매진함을 요함(「서산군 농지개혁사무 주무자회의 서류」, 김성호 외,「농지개혁사연구」, 서울 : 한국농촌경제연구원, 1989, p.936에서 재인용)

 

 춘경기(春耕期)가 촉박하였으므로 추진상 불소(不小)한 곤란이 유(有)하였으나, 만난(萬難)을 배제하고 단행하라는 대통령각하의 유시를 받들어 정부로서는 최선을 다하여 실행단계에 돌입한 것이다. 제1단계로서는 소작인에게 파종기전, 즉 4월 10일까지 농지분배 예정통지서를 교부하여 장차 자기 농지가 된다는 것을 전제로 하여 안심하고 파종하라는 것이다.(「농지개혁지침」4쪽, 김성호외, 위의 책 p603에서 재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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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李承晩대통령과 농지개혁 3

한국전쟁 전에 농지의 상당부분이 분배되었다
김일영 성균관대학교 교수. 정치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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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萬甲 선생의 관찰에 따르면 토지개혁과 함께 정부가 발행한 地價(지가) 증권이 대학 설립의 자본으로 집중되면서 새로운 私立 대학들이 늘어나기 시작했다. 

더구나 6·25 전쟁과 함께 대학생 軍 징집 보류 정책이 대학을 폭발적으로 증가시키는 요인의 하나로 작용한 것도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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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클럽] 브라질 대통령도 인정한 李承晩의 농지개혁 


裵振榮 月刊朝鮮 기자 (ironheel@chosun.com) 


최근 중앙일보의 南美 특집을 읽다가 흥미로운 얘기를 발견했다. 중앙일보 기자가 룰라 브라질 대통령에게 『브라질처럼 풍부한 자원을 가진 나라에 어째서 5000만 명이 넘는 절대빈곤층이 존재하는 겁니까』라고 묻자, 그는 이렇게 대답했다. 

『한국은 과거 1950년대에 농지개혁을 했지만 브라질은 그러지 못했고, 아직도 그것이 풀어야 할 숙제입니다』 


순간 기자는 李承晩 대통령을 떠올렸다. 李承晩 정부는 제헌헌법 제정 당시부터 『농지개혁이야말로 공산당을 막는 最良의 길』(헌법 기초위원 兪鎭午의 말)이라는 인식 아래 헌법에 농지개혁에 대한 근거 조항을 마련하고, 의욕적으로 농지개혁을 추진했다.


李承晩 정부의 농지개혁 추진 소식을 전해 들은 金日成은 술잔을 내던지면서 『만일 남한에서 토지개혁이 되면 남한의 농민을 다 대한민국에 뺏기고 말아, 우리들이 이제껏 해왔던 赤化운동은 모두 수포로 돌아가고 만다』고 개탄했다고 한다.


기득권층의 반발이 있었지만 李承晩 대통령은 『萬難(만난)을 배제하고 농지개혁을 단행하라』고 독려했다. 정부는 관계 법령이 제정·정비되기도 전에 불도저식으로 토지개혁을 밀어붙여 1950년 4월15일까지 농지개혁과 관련된 행정절차를 마무리지었다. 그로부터 두 달 열흘 뒤에 6·25가 발발했다. 


金日成은 전쟁 전부터 준비해 온 남한지역에서의 토지개혁 프로그램을 내밀며 남한 민중(농민)들의 봉기를 선동했다. 하지만 농지개혁 이후 『李박사 덕분에 쌀밥을 먹을 수 있게 됐다』고 희망에 부풀어 있던 남한 민중들에게 金日成의 선동은 먹혀 들지 않았다.

농지개혁 결과 전체 농지의 92.4%가 自作地(자작지)가 됐다. 이는 농지개혁으로 전체 농지의 90%가 자작지가 된 일본의 성과를 넘어서는 것이었다. 

정부가 地主(지주)에게 보상한 20억원 가운데 절반 가량이 地主의 손을 떠나 산업자본으로 전환되었다. 


반면에 「無償 몰수, 無償 분배」를 내걸고 시작된 북한의 토지개혁은 결국 모든 농민을 小作農化하는 「농업 집단화」로 귀결됐다. 그 결과는 농업생산성의 저하와 기근, 대량 餓死(아사) 사태로 이어졌다. 


농업경제학자인 金聖昊 前 한국농촌경제연구원 고문은 『李承晩의 농지개혁이 한국의 번영을, 북한의 소련식 土地 국유화가 오늘의 북한 참상을 불렀다』고 단언한다. 李承晩 대통령이야말로 진정한 의미에서의 「개혁자」였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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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남한의 농지개혁이 북한보다 못했다는 얘기가 있었는데.


 “중국이나 북한에서 농민에게 분배된 토지는 곧 집단농장으로 바뀐다. 중국은 덩샤오핑(鄧小平)의 개혁에 이르기까지 수천만 명이 굶어 죽었다. 북한은 오늘날까지 만성적 식량 부족에 시달린다. 참으로 아이러니한 대비다.


대한민국 건국과 농지개혁, 한국전쟁이 전개된 과정을 새롭게 조명해야 한다. 이승만 정부의 농지개혁으로 땅을 갖게 된 수많은 자영농의 자발적 중노동과 창의력이, 또 그들의 교육열이 오늘 대한민국의 자본주의 경제발전 기적을 만든 에너지의 원천이다. 위대한 나라가 탄생했다. 대한민국 건국이야말로 우리 민족 역사에서 가장 큰 사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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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국은 우리 민족사 가장 큰 기적 … 진보도 인정해야”
[중앙일보] 입력 2013.04.10

주대환 사회민주주의연대 대표가 보는 현대사 논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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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지개혁의 의미는….


“1950, 60년대 우리나라 토지 소유의 평등지수는 세계 1위였다. 그만큼 세계사로 봐도 가장 철저한 농지개혁이 이뤄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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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의 ‘무상몰수 무상분배’에 비해 한국의 농지개혁은 효과가 작았다는 주장들이 있었다.


“농지개혁법은 농민에게 지극히 유리한 조건이었다. 소출의 30%를 5년만 정부에 내면 소유권을 갖도록 했다. 한 해 10석이 나는 땅이라면 매년 3석씩 5년간 내라는 거다. 일제강점기 한 해 5석씩 소작료를 내던 농민이 3석씩 5년 동안만 내면 내 땅이 된다는데 누가 포기하겠는가. 지주들에게는 국채를 줬는데 전쟁 통에 인플레이션으로 휴지조각이 됐다. 그래서 지주들이 쫄딱 망했다. 북한은 1950년대 중반부터 집단농장을 만들면서 국유화했다. 그 결과는 모두 아는 바와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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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워인터뷰]  주대환 부회장  “죽산이 추진하고 인촌이 도운 농지개혁, 평등과 번영 이끌어”

조종엽 기자      2019-04-05 





             *  


     "공산당선언"  중에서


[ ..... 농민 등....반동적이기도 하다.......   ]

[ ..... 일체의 국적으로부터 독립된 전체 프롤레타리아트의 공동이해를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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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간계급 하층, 소규모 공장주, 상점주, 기능공, 농민 등 이들 모두는 중간계급의 각 부분이라는 자신의 존재를 소멸시키지 않기 위해서 부르주아지에 맞서 싸운다. 그러므로 그들은 혁명적이 아니고 보수적이다. 게다가 그들은 역사의 수레바퀴를 후진시키려 하기 때문에 반동적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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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산주의자의 당면 목적은 다른 모든 프롤레타리아 당들과 마찬가지로, 프롤레타리아트를 하나의 계급으로 형성시키고, 부르조아 지배를 타도하며, 프롤레타리아트가 정치권력을 장악하도록 하는데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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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산주의자는 오직 다음과 같은 점에서만 다른 노동계급의 당들과 구별된다. (1) 각국 프롤레타리아의 일국적 투쟁에서, 일체의 국적으로부터 독립된 전체 프롤레타리아트의 공동이해를 제기하고 전면에 내세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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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아가, 공산주의자는 나라와 국적을 폐지하려 한다고 비난받는다. 


노동자에게는 나라가 없다. 갖고 있지 않은 것을 빼앗을 수는 없는 일이다. 프롤레타리아트는 무엇보다도 정치적 지배권을 획득해야 하므로, 해당 민족의 영도적 계급으로 떠올라야 하므로, 자신이 스스로 그 민족을 구성해야 하므로, 비록 부르조아적 의미는 아니지만 그 자체가 민족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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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30  소련


[ ..... 차라리 임차한 땅에서 경작하는 것을 선호하여 .... 중농, 빈농들이 집단농장에서 대규모로 이탈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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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토호들의 조직적인 사보타지와 선동, 위로부터의 급속한 집단화에 따른 농민들의 인식부족과 일부 공산당원과 빈농들 사이에서의 좌경적 경향으로 농민들이 국경을 넘어 중국을 도피하는 일이 발생하였다. 


많은 빈농들이 과중한 국세가 책정되어 있는 국영농장에서 반강제역노동 하는 것 보다는 차라리 임차한 땅에서 경작하는 것을 선호하여, 1930년 3-4월 일부 마을에서는 중농, 빈농들이 집단농장에서 대규모로 이탈하는 일이 발생하기도 했다. 뿐만아니라 극도로 높게 책정된 과세, 원시적인 농업기술, 높은 생산노동을 향한 의욕 부재 등으로 인하여 벼 파종면적의 축소와 수확량 감소를 초래하였다.44)""


원동의 러시아 공산당간부들도 이러한 좌경적인 오류로 인한 집단화의 문제를 인식하고 있어서, 원동집행위원회는 1930년 4월 19일 "농촌과 어민 집단과정에 대한 결의"를 채택하고 당과 소비에트 농장조직들이 소수민족지역의 콜호즈건설의 특수성을 감안하지 못하고, 빈농의 지도에 실패했을 뿐만 아니라, 중농들까지 무시했다고 지적하기에 이르렀다.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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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로한인(在露韓人) 강제이주(强制移住) 이전(以前)의 한인사회(韓人社會)의 동향(動向)(1923-1937)  

반 병 율(潘 炳 律)*  





             1938.12.    삼천리  - 소련탈출 군인 증언



[ ...... 「도망한 장교들은 잘했다」고 동료들이 부러워하면서 ........

   ...... 바람이 부러서 창이 덜걱거려도 께페우가 오지 않는가 .........       ]



[ ......  농민은 .... 혁명이전 때가 살기 좋았다 해요. .........

   ...... 부담이 많어서 입는 것은 고사하고 빵문제 해결에도 곤란합니다. ........   

   ...... 지금은 백퍼-센트가 다- 빈민 ....... 만족하다고 볼수 있는 것은 농촌에 있는 청년공산당원 뿐 ........    ]



[ ...... 독신이래도 8시간 勞働이면 겨우 살어갈 정도 ........

  ...... 물건이 니러졌으나 께페우는 재판에 부칠 수가 없으니깐 상점의 책임이 되여서 ........


  ...... 트로키스트 ..... 1937년 1월부터 38년 5월까지 그 명목 하에 검거당한 인수가 전부 2백60만 ........      ]


[ ...... 데파-트 한 집의 상품만 해도  하바롬스크全市에 있는 상품보다 아마 더 많고 ........     ]



삼천리 제10권 제12호    

1938년 12월01일    



蘇聯事情 듯는 座談會, 脫走하여 朝鮮에 온 赤露士官으로부터    


出席者


脫走 赤軍士官 이반 야꼬레비치 나하로프

脫走 赤軍兵 표오톨 마까로비치 이봐노프

權忠一, 朴得鉉, 金漢卿, 朴英熙,

이박게 朝鮮軍 囑託 高井邦彦 



지난번 高鼓峯事件 때 蘇聯 極東軍에서 탈출하여 蘇聯兵 2명이 새로운 살 길을 찾고저 OO에 와 있는 것을 기회로 그들을 中心삼어 이 좌담회를 열었다. 질문한 사람들은 元共産黨 幹部로서 入露의 경험조차 가젔든 몃 분들이다. 우리가 이 좌담회를 개최한 까닭은 蘇聯知識의 一資料를 어드려고 하는 것뿐 아니라 그들 탈주병이 祖國蘇聯을 어떻게 보는가를 알고저 함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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高井. 그러면 나부터 먼저 張鼓峰事件에 현지에서 탈주해 온 蘇聯兵<92> 2명을 소개하겠읍니다. 이분은 나하로푸군 24세올시다. 저쪽 분은 이와노푸군 22才올시다. 양군이 다 歐羅巴 로시아 출신으로 나하로푸군은 8년제 학교를 졸업하고 군대에서는 하사관양성소를 중도에서 퇴소했읍니다. 이와노푸군은 극히 짧게 밖에 학교에 가지모했음으로 무학이라해도 과언이 아입니다. 


나하로푸. 사건이 勃發하기 얼 전에 일인대요. 蘇聯의 장교 6명이 ****?近에 갓는데 수비병들이 확실히 삼림 속에 들어간 것을 보았다고 하지만 장교 6명이 죄다 행방불명이 되었든 것입니다. 내 생각엔 그이들도 滿領내에 탈주한 것 같슴니다. 그때 내가 있든 군대가 1개 연대 출동해서 장교 6명이 들어간 국경 부근의 산을 죄다 찾어 봤으나 발견하지 못하고 말었읍니다. 그때 도라오면서 「도망한 장교들은 잘했다」고 동료들이 부러워하면서 외국의 이야기들을 했는데 그것이 내게 있어서 마음의 파동을 이르게 했읍니다.


記者. 이와노푸군은 어떳습니까.

이와노푸. 나는 個人農임으로 늘 꼬르포-즈에게 압박을 받어 심히 괴로운 생활을 계속하고 있었든 관계로 생각할수록 로서아가 싫어졌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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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와노푸. 우리 가족의 일상생활이란 그야말로 恐怖의 연속이라고 해도 좃습니다. 바람이 부러서 창이 덜걱거려도 께페우가 오지 않는가 하고 신경이 산란해 집니다. 밭에 나가 일을 하다가도 군복을 입은 자가 오는 것을 먼데서 보면 우리들 잡으러 오나부다고 벌벌 떨고 있읍니다. 이것이 우리들 농민의 생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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金漢卿. 소聯學校에서는 東洋事情이라고 할는지 특히 日本에 대해서 어떻게 가르키고 있읍니까?


나하로푸. 4년제의 의무교육학교에서는 日本에 대해서 또는 그 他 다른 외국에 대해서 교육하지 않습니다. 지리는 배워 주나 극히 개략적입니다. 4년제 이상의 학교가 되면 일반정치학을 배워 줌으로 각국의 정치상태, 국내상태 등을 배워 주고 특히 日本에 대해서는 로시아가 본 日本의 나쁜 점에 주력해서 배워 줍니다. 그래서 나는 일본의 농민은 매우 가난하다든가 상품이 없다든가 하는 것을 밤낮 들었든 까닭에 오늘까지 그렇게 생각해 왔슴니다. 그랬으나 현재는<95> 그것이 틀린 것으로 알고 로시아의 교육은 진실하지 못하고 역선전하는 것이라고 알었읍니다. 학교는 상급이 됨에 따라서 정치교육이 진보되고 로시아대외정책이라는데 대해서 가르치고 있으나 제1상급의 대학교 혹은 사범학교에서는 그 경향이 만습니다. 또 그 교재로서는 주로 신문에서 산 재료를 취해서 배워 주긴 하지만 그 신문도 결국은 로시아 신문이 아니면 않되는 것이니까요.

高井. 외국신문은 전혀 볼 수 없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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金. 최근엔 蘇聯政府의 종교에 대한 정책도 엣날과 같이 심하지 않다고 들었는데 어떠읍니까?

나하로푸. 정부는 법률로선 종교의 자유를 인증하면서도 무신론자, 무종교단체라는 것을 맨들어서 그것을 통하여 간접적으로 박멸책을 강구하고 있읍니다. 


權. 현재 소련민중은 종교에 대해서 어떤 感을 가지고 있읍니까? 우리도 들었지만 無神運動者들이 선전하기 위하여 농촌에 가면 농민들이 뫃여들어 때러서 골통을 깨고 도라 온다는데 사실입니까?


나하로푸. 혁명전에 교육을 바든 사람들은 전부 신을 믿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공산주의자들 중에도 맑씨즘에 대해서 의심을 갖게 되는 땐 신앙을 가지는데요. 더구나 부모들의 영향이 있음으로 이런 사람들은 몰내 긔도를 하는 일이 있읍니다.


農民은 極度로 絶望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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金. 농민은 정말 행복합니까.


나하로푸. 개인경영으로선 재산을 빼앗깁니다. 꼴포-즈조직은 월급이지요만 이전은 勤農들에게 매우 환영을 받어답니다. 그러나 현재에 있어선 먼저도 말한 바와 같이 前途의 희망이 보이지 않음으로 蘇聯의 농업자들은 매우 실망하고 있읍니다. 혁명이전 때가 살기 좋았다 해요.


朴得鉉. 그렇게 되면 현재의 농민생활과 혁명이전의 농민생활과의 차는 어떻읍니까?


나하로푸. 帝政時代엔 아주 큰 지주가 있었고 그밖게 농민이 그것과 비교된 때문에 어쩐지 재미없는 일이 많은 것 같았지만 그때도 현재의 농민과는 비교할 배가 아니지요.<98>

이와노프. 문제도 않된다고 하는데요.


나와로푸. 현재 농민과 帝政時代의 농민과를 비교할 만한 정확한 數字는 내가 여기서 말슴하지 못하지만 내 부모든지 또 형제에게서 들은 바에 의하면 帝政時代 世界大戰 당시 이전은 그 지주들이 농민에게 그 토지를 난하줄 운동이 있어서 그래서 농민은 대지주로부터 토지를 가지고 자기의 토지와 재산을 가질 遇境가 있도록 되었다고 합니다. 최근은 꼴푸즈가 되면선 자기의 재산, 자기의 토지라는 걸 가질 수 없고 또 정규수납의 규정이 있기 때문에 부담이 많어서 입는 것은 고사하고 빵문제 해결에도 곤란합니다.


高井. 거기에 내가 한 마디 말슴 더 하겠읍니다. 쏘베-트당국은 농민으로부터 것보리를 1키로 5카페-클을 수납해서 이것을 찟튼지 혹음 제분하든지 해서 1루-부르 카페클 내지 2루-부르 즉 30배 내지 40배의 값으로 팔어 버립니다. 찟는 데라든가 제분하는 비용을 합한다 치드래도 약 20배의 값이 되지요. 우유에 있어서도 1릿토르 15카페-크르를 수납하고 이것을 그대로 1루-부르 50카페클 즉 10배의 값으로 국영상점을 통해서 국민에게 판매하고 있읍니다. 그 差額이 전연방에 쌓이고 쌓여 蘇聯國家 豫算의 반액을 형성하고 있읍니다. 이것을 보드래도 꼴포-즈란 것이 조직적으로 농민을 착취하는 수단에 지나지 않으니까요. 즉 농민은 정부에게 자기의 소득을 10배 많으면 30배 40배식 착취하고 있으니 쏘베-트 농민이 곤궁에 빠질 것은 뻔한 일이 아니겠읍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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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 당신네들이 일상 먹는 음식을 거즛없이 말슴해 주시요. 그것으로 대체를 알 수 있으니까요. 


이와노프. 아츰은 우유와 껌정팡... 우유를 먹을 만하면 상당한 셈죠. 점심은 감자얘요. 고기를 살 수 있으면 먹게 되지만 지금은 닭과 소를 먹이게 못하는 까닭에 소고기 같은 건 도모지 먹질 못해요. 지금은 그런 고기도 없이<99> 대체로 감자와 파를 한데 짓*서 가지고 가*쯔데쯔를 맨드러 먹지요. 거기에 쓰-프 이것도 감자와 카*쯔. 저녁은 차와 껌정빵, 연어같은 *을 먹을 때도 있지만.


權. 나는 1931년. 1932년에 우라지오 太平洋 勞働書記局에 있을 때의 일이지만 그때 *껌정빵이 없어졌단 이얘길 들었는데 아직 있읍니까.

이와노푸. 우리들의 상식 인데요.

나하로푸. 도회엔 한때 없어진 때가 있었을지 모르나 현재 극동에 있어서 蘇聯 농민의 긴요한 양식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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金. 농민은 얼마나 세납을 부담합니까.


高井. 농민이 바치는 세금 중에서 제일 많은 것은 소득세입니다. 이것을 소득률에 따라 지불*니까 여기서 구체적으로 말할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나하로프. 그다음에 문화세 같은 것이 십수종이나 됨니다. 

高井. 그 밖에 보험료가 있읍니다.

나하로프. 세금 외에도 여러가지 돈을 많이 냄니다. 먼저 의무적으로 채권을 사야 됨니다. 그밖에 스페인 전쟁 때문에 자기들이 동지를 구조할 자금이라든가 사변 때문에 곤란을 받고 있는 支那의 자제들을 구조할 자금이라든가 혹은 각국 혁명 때문에 타국에 있는 사람들을 구조할 자금이라든가 여간 많은 것이 아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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權. 농민들은 현정부의 정책에 대하야 만족*하는 모양이지요.


나하로프. 만족이란 蘇聯에는 없읍니다. 농민들은 결코 만족하여 있지 안슴니다. 혁명이전에는 농촌에 *는 빈민 라고 돈이 없기 때문에 해도 약 15퍼-센트밖에 안되고 그 외의 85퍼-센트는 지금보다 훨씬 나은 생활을 하고 있었읍니다. 그러던 것이 지금은 백퍼-센트가 다- 빈민이 되였읍니다. 물론 한사람도 신정부의 정책에 만족하는 사람은 없읍니다. 다만 만족히다고 볼수 있는 것은 농촌에 있는 청년공산당원 뿐으로 그 사람들은 꼴포-즈의 근육노동에 참가할 필요가 없고 다만 선전이라든가 세금 독촉에<100> 한목 끼여서 일할 뿐인 고로 筋肉勞働을 안 하게되니깐 만족해 하지요.


都市의 勞働者 生活


金. 도시 勞働者들은 어떳슴니가.

高井. 도시 勞働者들의 생활이라고 말하면 勞働法에 따라서 勞働時間은 8시간이라고 제한되여 있기는 하지만 8시간의 勞働으로선 가족을 부양해 나갈 수가 없읍니다. 제한되여 있어도 가족들 때문에 3시간 내지 4시간을 연장하야 11시간 12시간의 勞働을 하지 않으면 안되는 것입니다. 


記者. 월급이 아니고 일한 분량대로 주는군요.

이봐노프. 독신이래도 8시간 勞働이면 겨우 살어갈 정도입니다.


金. 그래도 勞働者가 농민보다 생활이 행복함니까.


이봐노프. 물론 勞働者는 농민보다 생활이 양호함니다. 그러나 혁명전에 勞働과는 비교도 될 수가 없읍니다. 싸베트에서 비교적 행복되게 뵈는 것은 勤務員입니다. 그 중에서도 학문이 있고 또 특수한 기술이 있는 사람들입니다. 스탈린은 기술은 모든 것을 해결한다. 간부가 모든 것을 결정한다는 표어를 늘 쓰고 있습니다. 그러니 거기 해당하는 기술자, 학문이 있는 사람들이 비교적 유복하게 생활하고 있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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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하로프. 물론 다 그러타고 할 수는 없겠지요. 그러나 공산주의는 공산주의자에게만 조치요. 왜 그러냐하면 그들은 공산주의를 표방함으로써 좋은 지위도 어들 수 있고 비교적 넉넉한 생활을 할 수가 있으니깐요. 그러니깐 그런 사람들은 공산주의는 아주 좋은 것인 줄 알지요. 그러고 일반 청년은 반동적으로 여기 대하야<101> 공산주의라는 것은 공허한 것이다. 그것은 공산주의자의 것이지 우리의 것은 아니라는 그런 생각을 가지고 있읍니다.


肅淸工作의 一例들 들음


記者. 여기서 문제을 박궈서 스탈린의 숙청공작에 대하야 즘 이야기합시다. 싸베트 건설공로자를 투옥한다거나 살해한다거나 하는 스탈린의 숙청공작에 대한 蘇聯내의 일반사회의 공기 같은 것은 어떳습니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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酒井. 당신도 3년 징역 살었다지요.(笑聲)

나하로프군이 처형 바덧다는데는 금일의 싸베트를 잘 나타내고 있는 무슨 사정이 이슬 듯하니 좀 들어봅시다. 


나하로프. 생각해 내는 것만 해도 실증이 남니다만 나는 3년간의 强制勞働에 복역하였읍니다. 감옥에 드러 가기까지는 나는 어떤 상점 발송계에서 일을 보고 있었읍니다. 그 상점이라는 것은 지배인과 야체-카와 께페우의 3세력이 주장이 되여 있어서 내가 발송계니깐 물건을 어디로 보내라구 명령을 바더서 그대로 보낼야구 하면 금방 또 께페우에서 그 물건은 어디로 보내라구하는 주문이 드러옴니다. 나는 명령이니깐 께페우의 주문대로 했드니 처음 보낼 작정이든 그 곳에서는 물건이 안 오니깐 그것이 분실되였다구 말이 되는 것임니다.


高井. 께페우가 중간에서 주문을 했다는 것은 비밀이니깐 결국 죄는 발송계에 씨여지지요


나하로프. 물건이 니러졌으나 께페우는 재판에 부칠 수가 없으니깐 상점의 책임이 되여서 보내야 할 걸 보내지 않은 발송계의 책임이 되는 것임니다. 그 때문에 국가에 손해를 끼첫다는 의미로 재판에 걸닌 것입니다. 나는 국가의 유해자라구 하야 그때 처벌당한 것입니다.


記者. 재판 현황을 하나


나하로프. 내가 처형당한 재판소는 인민재판소였읍니다. 그 재판은<102> 재판장과 판사장 앞에 내가 서고 또 검사가 있읍니다. 거기다 또 배심원이라고 해서 농민출신이 한 사람, 勞働者출신이 한 사람, 이 밖에 여자 서기가 1명 이것으로 구성된 데서 재판을 바덧는데 별로 조사도 없어 그냥 인정서를 가지고 약간 물어 본 후 그냥 그 조서를 認定식히고 단 10분도 안돼서 징역 3년 强制勞働이 회부한다는 판결을 바든 것입니다. 그리고 3년의 强制勞働을 모스코바 마보루가에서 지냈읍니다.



犯罪, 乞食, 賣笑婦


記者. 그러면 이쯤에서 화제를 돌여서 이번에는 일반사회 사정을 들읍시다.


朴英熙. 싸베트에서 어떤 범죄가 제일 만습니까.


高井. 그것은 무엇무엇해도 지금 유행하고 있는 트로쯔키스트의 검거일 걸요.(笑聲)

나하로프. 범죄라고 하기엔 안됐지만 국가에 손해를 준다든가 혹은 국가가 원치 안는 자는 다- 싸베트의 범죄자로서 트로쯔키스트의 명목으로 검거당하는 것이 제일 만슴니다. 그 다음이 公金消費입니다. 그밖에는 뭐 다 그러치요. 살인은 도회에 많고 절도 같은 것은 농촌에 많은 것같이 보힘니다. 


高井. 그것은 농촌이 얼마나 貧하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暫間 소개함니다만 범죄의 이야기가 나왔으니 말이지 싸베트에서 제일 많은 범죄는 지금 유행하고 있는 트로키스트라고 생각함니다. 1937년 1월부터 38년 5월까지 그 명목 하에 검거당한 인수가 전부 2백60만9천인이나 됨니다. 그리고 本年度 內務人民委員部豫算의 강제노역소 경비를 정하는 기초로 되여였는 정부측의 자료에 의하면 강제노역소 재감자 수가 6백11만2천4백3십2인 약 1천만인입니다. 이중의 대부분을 정부측에서 소위 트로쯔키스트라고 보는 자들이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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貧弱한 民衆娛樂


金. 蘇聯의 민중오락이란 어떠한 것입니까?


이와노. 도시에는 여러 가지 있읍니다마늘 우리 농촌에는 手풍금에 맟어 딴스를 하는 것쯤 한 정도이고 혹 휴일에는 술도 먹습니다.

나하로. 다른 것은 없어도 술만은 잘 공급하여 줍니다. 따라서 농촌의 오락으로서는 딴스와 술의 정도입니다.

權. 우리들이 로시아에 있을 때의 영화는 5箇年計劃의 선전영화가 대부분이고 다음은 모다 아메리카의 희극 같은 것이였는데. 

나하로. 공개영화는 이전에는 獨逸 것도 있는 모양이였으나 지금은 주로 아메리카영화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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記者. 일본에 물자가 많은데는 저 三等大將 류시코프도 놀난 모양인데 대체 로시아의 현상은 어떠하십니가.


나하로프. 蘇聯의 물자란 대체 빈약합니다. 있기는 있드래도 불필요한 것이 많고 필요한 것은 적습니다. 워드카 같은 것이 많지요. 그러나 팡 같은 것은 적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나는 이곳에 와서 데파-트를 구경하였는데 그 데파-트 한 집의 상품만 해도 하바롬스크全市에 있는 상품보다 아마 더 많고 민중이 즐겨할 것도 더 많으리라고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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朴得鉉. 蘇聯의 兵役은 自由兵役입니까. 强制兵役입니가?


나하로프. 蘇聯의 兵役은 형식으로는 自由兵役이여서 징병한다 하드래도 徵兵檢場에 査가면 나도 그랬지만 징병관이 「당신은 兵役에 종사하겠느냐」고 묻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당신의 자유다.」라고 하는데 그 徵兵官의 골 속에는 「兵役을 기피하는 者 國賊이다.」라고 하는 큰 글자가 씨어저 있읍니다. 그것을 보고는 모다들 자진하여 지원합니다.(笑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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記者. 日本에 와저 제일 감탄된 것이 무었입니가. 어데 간단히 대답하여 보시요.


이하노프. 제일 감탄한 것은 전쟁 중인데도 극히 평온한 것 그리고 日本은 전쟁을 하고 있기 때문에 물자가 없다는 것을 蘇聯에서 들었고 로시아는 물자가 아주 풍부하다고 하는 것이 전혀 그 반대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또 한가지는 日本 사람들은 퍽 친절하다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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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45.8.24.   소련   경원선 차단

           1945.8.25.   소련   경의선 차단

           1945.9.6.     소련   통신 우편 차단


           1945.9.6.     미군   진주



"경원선 철도 끊기며 분단 시작 너무 어이없고 황당하지 않나"


 2009.06.29


신작 '별들 너머 저쪽과 이쪽' 낸 소설가 이호철


"남북 분단은 소련군이 1945년 8월 24일 서울~원산 간의 경원선(京元線) 철도를 차단하면서 시작됐다."


'분단시대'의 실향민 작가 이호철씨(78)는 함경남도 원산이 고향이다. 1945년 광복 당시 10대 소년이었던 이씨는 "지난 60여년간 우리를 고통스럽게 한 남북 분단이 이렇게 '철도 차단'에서 시작됐다는 것은, 당사자인 우리로서는 너무 어이없고 황당하지 않은가"라고 회상했다.


"소련군은 이어 8월 25일 서울~의주 간의 경의선(京義線) 운행도 막았고, 미군이 서울에 진주한 9월 6일에는 전화·전보 등 통신과 우편물 교환을 완전 차단했다. 소련은 처음부터 동구권을 먹었듯이 북한을 자국의 패권주의 틀 속에 편입하려고 했다. 미국은 소련과의 전후(戰後) 처리 합의에 따라 그저 먼 산 쳐다보듯 할 수밖에 없었다."

 
이호철씨는 얼마 전 "분단과 6·25전쟁의 원흉은 스탈린"이라고 강조하면서 허구와 역사의 결합을 통해 남북 분단을 새롭게 조명한 신작 장편소설 《별들 너머 저쪽과 이쪽》을 펴냈다. 이씨는 "문학성보다는 내 경험을 바탕으로 젊은 세대에게 6·25와 남북 관계의 실체를 알려주기 위해 현대사 참고서로 사용할 수 있는 책을 썼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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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www.chosun.com/site/data/html_dir/2009/06/28/2009062800858.html




        *    당연히 이런 사실은 전국민 공지의 사실이었읍니다.

              또한 전국민이 수시로 얘기하고  성토하던 사실이었읍니다.





         1945.9.   한경직 목사의 증언



[ ..... 대낮에 거리에서 공산주의에 반대하는 발언을 한 사람이 공산당원인 경찰의 총을 맞고 죽었다. .......


 ...... 사람들은 압도적 다수가 공산주의에 반대하지만 공포와 테러 분위기에 사로잡혔고 ........    ]


[ ..... 소련군은 철수하기 전 북한 전역을 공산화하려고 결심한 것이 분명하다 ........    ]


[ ..... 먼저 은행에 가서 현금을 강탈 .......

 ...... 가정집에 침입해 시계부터 여성복까지 귀중품을 약탈하고 부녀자를 강간 .......     ]



[단독] "소련군에게 무기 넘겨받은 공산주의자들, 라디오 방송국과 지역신문 빼앗고 있다… 반대세력 학살 위협하고 대낮에 총살"



조선일보    이선민 선임기자

  2017.08.16 


[오늘의 세상]


故 한경직 목사가 1945년 9월 평안북도 상황을 알린 비밀청원서 발견


"청원서 받은 美군정 정치고문… '소련군 활동, 믿을 만한 첫 증언'
소련군, 도시에 들어가면서 현금 강탈·부녀자 강간 일삼아"



"(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우리는 평화와 민주주의를 기대했다. 그러나 놀랍게도 소련군이 진주해 우리 백성을 약탈하고 많은 비행을 자행하고 있다. 게다가 이 모든 것이 공산당 지배를 예고하고 있다. 우리는 '공산 한국'을 원하지 않는다(We do not want red Korea). 이런 상황이 계속되면 북한 지역은 완전히 황폐질 것이다. (연합군이) 즉각 위원회를 파견해서 상황을 조사해 달라."

 

20세기 후반 한국을 대표하는 개신교 지도자인 한경직(1902~2000) 목사가 광복 직후인 1945년 9월 26일 서울의 미군정에 소련군이 점령한 평안북도 일대의 정치 상황을 알리고 도움을 요청한 영문(英文) 비밀청원서가 발견됐다. 한국기독교사를 연구하는 박명수 서울신학대 교수가 최근 미국 국립문서기록보관소(NARA)에서 찾아낸 이 문서는 일본이 패망한 뒤 신의주에서 소련군 및 공산당과 마찰을 빚던 한 목사가 서울로 내려와 미군정 당국에 제출한 것이다. 당시 미군정 정치고문이었던 베닝호프는 비밀청원서를 자신의 평가를 담은 보고서와 함께 미국 국무부에 보냈다. 베닝호프는 이 청원서가 "38도선 이북을 점령한 소련군의 정치 활동에 관한 최초의 믿을 만한 목격자 증언"이라고 평가했다. 베닝호프의 보고서는 미 국무성 외교문서집(FRUS)에 수록됐지만 한 목사의 비밀청원서는 포함되지 않아 그동안 전문이 알려지지 않았다.



한경직 목사가 신의주 제1교회 담임인 선배 윤하영(1889~1956) 목사와 연명으로 작성한 A4용지 3장 남짓 분량의 청원서에 따르면, 일본이 항복한 다음 날인 8월 16일 신의주의 지도급 인사들은 질서 유지를 담당할 자치위원회를 구성했고, 8월 25일 평안북도 각 시·군 대표들이 참여하는 평북 자치위원회로 확대됐다. 8월 30일 소련군이 신의주에 들어오면서 시태가 급변했다. 소련군은 인민정치위원회를 새로 만들고 급조된 두 개의 소규모 공산주의 조직과 자치위원회가 함께 참여하도록 지시했다. 곧 공산주의자들이 인민정치위원회의 다수를 차지했다.


소련군은 일본군을 무장해제시킨 뒤 그들에게서 빼앗은 무기를 공산주의자들에게 넘겨주었다. 며칠 뒤 조직된 공산당은 법원 건물을 무력으로 차지해 본부로 사용했고 라디오 방송국과 유일한 지역신문을 빼앗아 공산주의 선전 선동을 시작했다. 공장과 농촌 마을에는 공산당 조직이 만들어져 무력으로 공장과 농지를 접수했다. 소련군은 비행기로 선전 유인물을 살포하면서 공산당을 지원했다.


이런 사태 전개에 놀란 개신교 지도자들은 '기독교사회민주당'을 만들었다. 이를 알게 된 공산당은 그들이 공식 활동을 하면 소련군이 대량 학살할 것이라고 위협했다. 한경직 목사는 신의주에서 벌어진 테러 현장을 생생하게 증언한다. "9월 16일 대낮에 거리에서 공산주의에 반대하는 발언을 한 사람이 공산당원인 경찰의 총을 맞고 죽었다. 살인자는 풀려났고, 평상시처럼 일하고 있다. 사회민주당 지도자들이 이에 항의하자, 다음 날 경찰이 몰려와 체포했다."


비밀청원서는 "사람들은 압도적 다수가 공산주의에 반대하지만 공포와 테러 분위기에 사로잡혔고, 다음에 무슨 일이 일어날지 아무도 알지 못하고 있다. 이런 상황이 계속되면 공산주의자를 제외하고는 살 수 없게 될 것이다. 소련군은 철수하기 전 북한 전역을 공산화하려고 결심한 것이 분명하다"고 적었다.

 

이어 소련군의 비행이 "상상을 넘어선다"며 자세히 설명한다. 소련군은 도시에 들어가면 먼저 은행에 가서 현금을 강탈한다고 했다. "신의주에서 소련군은 (은행에서) 120만엔을 가져갔다. 가정집에 침입해 시계부터 여성복까지 귀중품을 약탈하고 부녀자를 강간한 사례는 셀 수조차 없이 많다." 이런 절망적인 상황을 피해 남쪽으로 내려가는 사람은 38선을 넘으면서 소련군에게 약탈과 강간을 당한다고 폭로했다.


1932년 미국 프린스턴신학교 유학에서 돌아와 신의주 제2교회에서 목회하던 한경직 목사는 일제 말 교회를 사임한 뒤 고아원과 양로원을 설립해 운영했다. 광복 후 신의주 자치위원회 부위원장, 기독교사회민주당 부위원장으로 활동한 한 목사는 비밀청원서를 제출한 뒤 평양으로 돌아갔지만 10월 말 윤하영 목사와 함께 북한을 탈출했다. 그가 북한을 떠난 뒤 용암포 지역의 기독교사회민주당 창립 모임을 공산당이 습격하자 신의주 일대의 개신교 학생이 중심이 돼 저항한 사건이 신의주학생의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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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7/08/16/2017081600252.html



       


            1945.11.


[ ....... 국도 넓은 길은 환영인파로 메워졌고 연도에는 부근 촌락민들이 도열하여 120리 거리에 인파가 들끓었다. 그리고 진남포 수십리 앞길까지 환영인파가 물결쳤다. 


         대한민국 만세, 조민당 만세 ........       ]



孫世一의 비교 評傳 (83) 한국 민족주의의 두 類型 - 李承晩과 金九


朝鮮民主黨의 創黨과 新義州學生들의 蜂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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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韓民黨보다 더 保守的인 朝民黨의 「政策」


  창당대회는 11월 3일 오후에 구 일본인중학교 교정에서 거행되었다. 이날 채택된 조선민주당의 「선언」과 「강령」 및「정책」은 조선민주당의 정체성을 둘러싼 민족주의세력의 저항이 만만치 않았음을 보여준다. 6개항의 「강령」은 


(1)국민의 총의에 의하야 민주주의공화국의 수립을 기함(제1항), 

(2)종교, 교육, 노농(勞農), 실업, 사회 각계 유지의 결합을 요함(제4항), 

(3)반일적 민주주의 각 정파와 우호협력하야 전민족의 통일을 도모함(제5항), 

(4)소련 및 민주주의 제 국가와 친선을 도모하야 세계평화의 확립을 기함(제6항) 등으로서, 친일파 배제와 소련과의 우호 등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 눈길을 끈다. 


게다가 반일적 민주주의 각 당파와 우호협력하여 전 민족의 통일을 도모한다는 「강령」(제5항)의 규정은 “북한에 반일적인 민주주의정당 및 조직의 광범한 연합을 기초로 한 부르주아민주주의정권을 확립”하라는 스탈린의 비밀지령과 일치한다.


그러나 12개항의 「정책」에는 조선민주당의 보수적인 성향이 그대로 표명되어 있다.
 

  먼저 정치면에서는 국민은 언론, 출판, 집회, 결사 및 신앙의 자유와 선거 및 피선거권이 있고(제1항), 의회제도와 보통선거제를 실시하며(제2항), 교육과 보건의 기회균등을 보장한다(제3항)고 하여 의회제 민주주의를 천명했다. 그러나 소작제도의 개선, 자작농 창정(創定)의 강화, 농업기술의 향상(제8항)이라고 애매하게 표명된 토지문제나 노자문제(勞資問題)의 일치점을 득하야 생산의 지장이 없기를 기함(제11항)이라고 한 노동문제의 비전 등은 극히 보수적인 입장을 견지하고 있다.31) 그것은 좌익정당들로부터 지주들과 친일파의 정당이라고 비판받던 남한의 한국민주당의 정강정책보다도 더 보수적인 것이라고 할 만했다.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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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민당은 창당되자 “요원의 불처럼 단시일내에 경이적인 숫자의 당원을 획득”37)할 만큼 큰 호응을 얻었다. 창당하고 한 달 뒤인 12월 1일 현재 북한지역의 공산당원수는 4,000명 미만이었는데 비하여 조민당의 당원수가 5,406명이었다는 사실38)은 조민당의 인기를 짐작하게 한다. 


북한 전역의 도-시-군-면에 지부가 결성되어 당원수는 결당 3개월동안에 50만에 이르렀다고 관계자들은 주장한다.39) 그것은 물론 과장된 숫자일 것이나, 조민당이 급속한 성장세를 보인 것은 사실이었던 것 같다. 지방지부가 결성되는 상황의 한 보기로 진남포(鎭南浦)시당을 결성할 때의 상황을 이윤영은 다음과 같이 적었다.
 

  “중앙당부에서 수백명의 당원이 … 트럭에 분승하고 악대를 선두로 진남포로 향하였다. 국도 넓은 길은 환영인파로 메워졌고 연도에는 부근 촌락민들이 도열하여 120리 거리에 인파가 들끓었다. 그리고 진남포 수십리 앞길까지 환영인파가 물결쳤다. 대한민국 만세, 조민당 만세 소리가 들끓었다.”40)
 

  이를 시기하여 지방의 공산당은 조민당 지방당부를 습격하고 폭행을 가하는가 하면 허무맹랑한 사건을 날조하여 조민당의 지방당간부를 경찰에 구금시키는 등 온갖 방해공작을 벌였다.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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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46.1.5.   조만식 연금




           1948.4.


[ ...... 이북동포의 90%가 李박사 노선을 지지하는 우익이고 나머지 10%가 공산주의자들이다. ........    ]


월남한 북로당원 유재민, 이북실정 폭로
 

 
동아일보

1948년 04월 30일

 

 
북조선인민위원회의 일요인이며 북로당원의 일인인 柳在敏은 북조선의 金日成정책이 비민족적임을 지적하고 25일 월남하여 시내 모 여관에 여장을 풀고 있는데 氏는 왕방한 기자와 다음과 같은 문답을 하였다.


(問) 귀하가 월남한 이유는 무엇인가 


(答) 나는 북로당원의 일원이며 북조선인민위원회의 일인이다. 그러나 그들의 목표는 조선을 적화하려는 소련의 의도를 그대로 계승하여 인민의 생활문제를 도외시하고 있어 인민들은 의식주 안정을 찾기 위하여 남하하는 것이다. 나도 유엔조위의 來朝에 많은 기대를 가지고 북조선의 유엔위원단에 대한 불협조에 불만을 품고 그리운 고향을 뒤로 남하하였다.


(問) 이북동포들은 남북협상을 어떻게 보는가 


(答) 이북동포들은 남북협상에 하등 기대를 가지지 않고 있는데 도리어 남조선 동포들이 기대를 가지고 있다는 것은 기괴한 일이다. 하여간 이북동포들은 여러번이나 북조선인민위원회의 모략 선전에 속아왔기 때문에 이번 남북협상도 기대하지 않고 솔직히 말하면 총선거의 반대 공작이라는 것은 이북동포들도 잘 알고 있다.


(問) 金九씨는 현재까지 공산주의자들과 적대시하여 왔으며 북조선인민위원회에서는 金九타도라는 구호를 부르짖어왔던 것인데 최근의 金九씨 태도를 이북동포는 어떻게 보는가 


(答) 남조선동포들은 북쪽 동포를 전부 공산주의자들이라고 보는 듯하나 이북동포의 90%가 李박사 노선을 지지하는 우익이고 나머지 10%가 공산주의자들이다. 그리하여 이 90퍼센트에 달하는 우익적 동포들은 李承晩·金九 양씨에 많은 기대를 가지고 숭배하여 왔다. 金九타도라는 구호에 우리 우익에서는 반감을 가지고 왔던 것인데 이제와서 공산주의자들과 손을 잡고 전조선에 공산주의정책을 감행하려는 金日成파의 책동에 추종한다면 3천만을 지도할 영도자의 자격을 상실한 것이라고 비난하고 있다.


(問) 이북동포들은 5월 10일 실시될 총선거를 어떻게 보는가 


(答) 이에 대하여서는 이북에서 일체 보도도 없고 언론자유가 보장되지 못한 관계상 자세한 내용을 모르고 있으나 유엔위원단 입경을 거절한 소련군에 대해서 반감을 가지고 있으며 하루바삐 국제무대에서의 우리 독립국가가 실현될 방법을 갈망하느니만치 이번 선거에 많은 기대를 가지고 있는 것만은 사실이다.




              1949.7.


[ ...... 매일같이 심한 부역과 50%를 넘는 현물세에 살 수 없어 월남하였다 ........    ]


북한 한 마을 天道敎靑友黨員 100여 명이 집단 월남 


 경향신문 

 1949년 07월 08일 



이북공산당정권하에서는 살 수 없다고 한 부락이 송두리째 월남한 사실이 있다.


즉 강원도 춘성군 공고리에 살고 있는 26가구 102명이 지난 7월 1일 밤 9시경 북한괴뢰군이 없는 틈을 타서 월남하여 왔다. 그들 가운데는 76세나 되는 노인도 있으며 그들은 소 21頭를 끌고 월남하여 강원도민의 열렬한 환영을 받고 있다.


그리고 그들은 대개 청우당원으로 매일같이 심한 부역과 50%를 넘는 현물세에 살 수 없어 월남하였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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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50.10.1.


[ .... ‘와아, 38선이다. 저걸 넘어 김일성의 목을 받으러 가자’.......

  ....“상상하지 못할 정도로 일반 주민의 환영이 대단했다” ........  ]



[ ...... 우리를 보자마자 20, 30명이 모여들어 ‘국방군 만세’를 목이 터져라 외쳤어요. ........

 ...... 갑자기 가마니를 가져오더니 그 안의 사과를 길에 좍 깔아놓더군요. ........     ]



“와, 38선… 김일성 목 받으러 가자”



《 1950년 10월 1일 국군은 38선 이북으로 진격했다. 9·28 서울수복 후 미국 정부와 유엔이 전쟁 확대에 부정적인 태도를 보이자 이승만 대통령은 국군 단독의 38선 돌파 명령을 내렸다. 6·25전쟁 발발 후 계속 밀리기만 했던 국군이 ‘남한 사수’에서 ‘북진 통일’로 목표를 전환한 것이다. 10월 1일 국군의 날은 여기서 유래한다. 》


■  당시 박격포 탄약수로 강원도 양양서 북진


당시 보병 3사단 23연대 제1중화기중대 박격포 소대 탄약수로 강원 양양에서 최초로 38선을 넘었던 박한진 예비역 육군 대령(82세·당시 이등병)으로부터 1일 60년 전 북진 과정을 들었다. 


“9월 18일 포항을 탈환한 뒤 승승장구하며 9월 30일 오후 강원 양양에 다다랐습니다. 38선이 보였어요. 병사들이 ‘와아, 38선이다. 저걸 넘어 김일성의 목을 받으러 가자’라고 환호하는데 갑자기 정지하라는 겁니다. 북진을 놓고 유엔군과 이견이 있다는 건 전혀 몰랐죠. 하루 쉬고 기력을 충전한 뒤 진격하려는 줄 알았습니다.”

 

1950년 10월 1일 국군은 단독으로 38선 이북으로 북진했다. 동부전선을 관할한 육군 제1군단장 김백일 장군(오른쪽)이 38선 돌파 직후 기념비를 세우고 있다. 기념비에는 ‘아아 感激(감격)의 三八線(38선) 突破(돌파)’라고 적혀 있다. 동아일보 자료 사진 


사실 잇단 승전으로 사기는 충천했지만 보름 동안 매일 70∼80리 행군을 하며 북상한 장병들의 몸 상태는 말이 아니었다고 한다.

“물자 보급이 거의 안됐습니다. 군화도 고무신 밑창에 헝겊을 씌운 형태였어요. 그나마 고무 두께는 1cm도 되지 않았죠. 끔찍할 정도로 발에 물집이 생겨 쩔뚝이면서 행군을 했습니다.” 


그러나 고구마밭에서 숙영을 마친 10월 1일 오전 진격명령이 떨어지자 장병들은 서로를 얼싸 안았다. “철모와 군복에 나뭇가지와 풀을 꽂고 신이 나서 38선을 넘었습니다.” 이 부대가 38선을 넘은 공식 시간은 오전 11시 45분으로 전사(戰史)에 기록돼 있다.


38선을 넘은 뒤 가장 처음 마주친 사람은 허름한 주막에 있던 마을주민이었다. “우리를 보자마자 20, 30명이 모여들어 ‘국방군 만세’를 목이 터져라 외쳤어요. 그때의 감격은 말할 수 없습니다. 발 아픈 건 까맣게 잊게 되더군요.”
 

선물은 또 있었다. “이 사람들이 갑자기 가마니를 가져오더니 그 안의 사과를 길에 좍 깔아놓더군요. 배 속으로 들어가는 사과가 어찌나 시원하고 맛있던지 그 맛을 잊을 수가 없어요. 보급이 안돼 전날 아무것도 먹지를 못했거든요. 그렇게 북진의 첫날이 시작됐습니다.”


38선 이북의 북한군은 무력했다. 전쟁 초반 막강했던 인민군이 아니었다. “싸울 의지라는 게 거의 없었고 (전투라는 게) 패잔병 잔당을 소탕하는 수준이었죠.”

 몇 차례 공방전을 치르며 그는 10월 9일 원산 시가지에 도착했다. “상상하지 못할 정도로 일반 주민의 환영이 대단했다”고 그는 회고했다. 

하지만 그는 이날 가장 가슴 아픈 경험을 했다. 

“아침에 시가지에 들어가니 미루나무에 70여 명이 죽은 채 매달려 있었습니다. 인민군이 퇴각하며 교도소에서 끌어내 죽인 것 같았어요. 시신을 살펴보니 몸이 채 굳지도 않았어요. 몇 시간만 더 일찍 들어갔으면 이들을 구할 수도 있었을 텐데 하는 자괴감이 전쟁 내내 저를 괴롭혔어요. 지금도 그때 기억이 생생합니다.”


11월 말에는 함북 길주를 지나 혜산진까지 진격했다. 개마고원에도 올라갔다. “두만강이 코앞에 있었습니다. 통일이 왔구나 싶어 가슴이 설레 춥지도 않았어요.”


그러나 12월 1일 철수명령이 떨어졌다. “영문도 모르고 남하하다가 함북 경성에 도착해서야 중공군에 밀려서 철수하게 됐다는 걸 알았어요. ‘부산에서 어떻게 여기까지 왔는데…’ 하는 생각에 막막해지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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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news.donga.com/Society/3/03/20101002/31554739/1

국군의 날 유래된 1950년 10월 1일 38선 첫 돌파… 박한진 예비역 대령의 ‘그날’ 증언

 2010-10-02




         1950.10.18. 평양


[ ....... 총탄 비가 오가는 사이를  뚫고 선교리로 다가서는 국군을 향해  ‘대한민국 만세!’, ‘국군만세!’를 외치며 달려 나온 시민들은

        건물마다 널려 있던 김일성과 스탈린의 초상화를 뜯어내 짓부수기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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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일 아침 1사단이 평양 동남쪽 상원(祥原)으로 향하고 있을 때 미 제1기병사단은 신막(新幕)을 탈환, 평양에 접근  중이었으며 영연방군 27여단 선봉부대는 황주(黃州)를 점령, 계속 북진 중이었다. 18일 정오 상원을 탈환한 1사단은 적 탱크부대의 저항을 무찌르고 10월 19일 상오 10시  40분쯤 그 주력부대가 대동강변 선교리에 도달했다. 강 건너 본 평양을 향해 포격을 개시할 무렵, 건물 속에 숨어 앉아 반격을 시도하는 적들을 소탕하는 시가전이 격렬하게 벌어졌다.


그처럼 총탄 비가 오가는 사이를  뚫고 선교리로 다가서는 국군을 향해  ‘대한민국 만세!’, ‘국군만세!’를 외치며 달려 나온 시민들은 건물마다 널려 있던 김일성과 스탈린의 초상화를 뜯어내 짓부수기도 하고 국군의 진격을 가로막는 장애물 철거에 나서기도 했다.


이런 감격적인 장면이 벌어진 지 10여분이 지났을 때 황주쪽에서  올라온 미 제1기갑사단 ‘게이’ 소장이 선교리에 도착, 백 사단장과 역사적인  악수를 나누는 것을 목격하였다. 그때서야 미군에 종군한 외신기자들이 평양 돌입 상황을 우리에게 묻기도 하였다. ‘이 역사적인 승전보를 빨리 보도해야 된다’는 생각으로 내 머리는  꽉 찼다. 그래서 군 당국에 특별차편을 간청, 지프 한 대를 배정받았을 때 두 김(金)기자는 평양진격을 지켜본 후 기사를 ‘풀’하는 대신, 나는 서울로 먼저 가서 평양탈환 첫 보도를 ‘풀’하기로 타협을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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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50.10.16.  함경남도 북청


[ .....  거리에는 벌써 수많은 사람들이 태극기를 들고 나와 있었다. ..... 거리로 쏟아져  나온 사람들은 서로 얼싸안고 기뻐했다.

        집집마다 태극기가 내걸렸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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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많은 사람들이 태극기 들고 거리에


 10월16일 밤. 이때까지도 전기는 들어오지 않았다. 읍내에는 유엔군이 곧 이곳에 상륙할 것이고 자정을 기해 김일성이 항복할 거라는 소문이 파다하게 퍼져  있었다. 이날 밤 10시 쯤 새로운 소식이 전해졌다. 노동당과 읍인민위원회를 비롯해 내무서 등  각 기관이 중요한 서류를 모두 소각하고 도주한다는 것이었다.


나는 곧바로 노동당 리당 사무소로 달려갔다. 그곳에는 이미 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모두들 흥분한 상태였다. 나는 일단 집으로 돌아와 부친과 함께 태극기를 만들었다. 온식구가 뜬눈으로 밤을 새웠다. 이튿날 새벽 동이 틀 무렵 더 이상 기다릴 수가 없어 거리로 나갔다. 거리에는 벌써 수많은 사람들이 태극기를 들고 나와 있었다. 진위를 가릴 수 없었지만 국군이 이곳에 입성하고 김일성이 항복한다는 소문이 입에서 입으로 전해졌다. 거리로 쏟아져 나온 사람들은 서로 얼싸안고 기뻐했다. 집집마다 태극기가 내걸렸다. 8·15 광복과 함께 빛을 본 뒤 사라진 태극기가 다시 그 빛을 찾는 순간이었다. 날이 밝자 맑게 갠 하늘에 유엔 공군기가 태극기를 들고 환호하는 사람들 위로 저공비행으로 선회하며 조종사가 손을 흔들었다.
 


  나는 친구 한 명과 함께 인근의 신창여중으로 달려갔다. 도중에 주민들로부터 노동당 간부 몇이 과수원에 숨어 있다는 정보를 듣고 과수원을 수색, 그들을 발견하여 학교로 끌고 갔다. 그들로부터 당원증을 빼앗고 난 뒤 숙직실에 가두고 부락 청년들에게 학교 주변을 지키도록 했다. 우리는 등사판으로 전단을 만들었다. 「쇠사슬에 묶여 살던 우리가 그렇게도  기다리던 자유의 종이 울려 퍼졌다」는 내용이었다.


한창 등사판을  밀고 있는데 바깥에서 총소리가 들려 왔다. 곧 이어 밖에 있던 친구가 달려들어오며 인민군이 학교를 포위하고 총을 쏜다고 알렸다. 밖으로 나가보니 부락 청년들은 한 사람도 보이지 않았다. 우리는 긴급히 피신했으나 몇 시간인가를 숨어있다가 발각되어  붙잡히고 말았다. 우리가 너무 서두른  탓이었다. 아직 국군은 들어오지 않은 상태였고, 인민군도 완전히 철수한  게 아니어서 1개 중대 병력이 남아 있었던 것이다. 이제 꼼짝없이 죽었구나 하는 생각 뿐이었다. 1개 분대의  인민군에 둘러싸여 우리는 머리에 손을 얹은 채 약 2킬로  정도 떨어진 신창인민학교로 끌려갔다. 가다 보니 그 많던 사람은 다 어디로 갔는지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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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0월24일, 국군과 유엔군이 利原에 들어왔다. 마을은 온통 축제 분위기였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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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민군 군의관이 싫어서 탈영, 미군 통역을 거쳐 영어 교사가 되다
         


가작 <인생의 갈림길에서 경주로 향하다>는 咸興醫大(함흥의대) 재학 중 인민군의 군의관이 되었으나 탈영했다가 국군의 북진 때 남하해 미군 통역관을 거쳐 영어교사가 된 분의 사연이다. 글쓴이 오윤근 선생(90세)의 고향은 함경북도 豆滿江(두만강) 남안의 국경마을 鍾城(종성)이다.  


<해방 직후 고향 마을에 소련군이 들오던 날, 방학 중의 나는 귀향해 방에서 낮잠을 자고 있었다. 그런 나를 여동생이 흔들어 깨웠다. “오빠, 빨리 일어나. ‘마우재’가 오고 있대. 빨리 큰길로 나가봐.”

 마우재는 소련군인을 가리키는 함경도 사투리로서, 그 어원은 “말이나 소같이 미욱하다”는 뜻의 馬牛者(마우자)에서 유래된 것이라는 說(설)이 있다.


 큰길로 나갔더니 소련병사 10여 명이 나타났다. 그들 중 하나가 내게 다가오더니 대뜸 시계를 찬 내 왼 팔목을 붙잡았다. 그 자가 몇 시인지 알려고 그런 줄 알고 시계를 그의 눈앞에 들이댔다. 그런데 그 자는 강도로 돌변했다. 그는 시계를 찬 내 팔목을 비틀어 시곗줄을 풀고 자기 손목에 나의 시계를 찼다. 그의 팔목에는 이미 세 개의 시계가 채워져 있었다. 소련군의 노략질은 갈수록 심해졌다.>


1946년 3월13일, 함흥에서 학생들이 소련군의 만행을 규탄하는 가두시위를 벌였다. 이것이 3
·13 함흥 反共(반공)학생사건으로, 1945년 11월23일의 신의주 反共학생사건 다음으로 규모가 컸던 反소련 데모였다.


<1950년에 들어서자 내가 보기에도 남침전쟁의 조짐이 곳곳에서 나타나고 있었다. 함흥에도 인민군 1개 사단이 주둔하고 있었는데, 6월로 접어들자 모두 38선 지역으로 전진 배치되어 함흥의 주둔지엔 1개 소대 병력만 남아 있었다. 

 인민군의 남침이 시작되자 바로 ‘전쟁 승리를 위한 궐기대회’가 개최되었고, 결의문도 채택되었다. 그 결의문은 “인민군에 지원할 것을 만장일치로 결의한다”는 내용이었다. 강의실에 들어온 정치보위부 요원은 강의실 앞뒷문을 막고 입대지원서를 학생들에게 돌렸다.> 


임상 경험이 없었던 그를 포함한 함흥의대 2학년생들 중 11명은 함흥시내 국·공립병원에 3개월간의 실습을 거친 후 신설 중이던 北靑(북청)의 예비사단으로 배치되었다. 함흥에서 200리 북쪽인 北靑으로 동문들과 트럭을 타고 함께 이동했다.


<인민학교의 교사를 징발해 막사로 사용하고 있었다. 운동장에서는 30∼40대의 장정들을 훈련시키고 있었다. 군복도 지급받지 못하고 학생복을 입고 장교식당에서 숙식을 하며 장정들의 훈련이 끝날 때까지 대기했다. 그런 지 1주일 되던 날, 평소 서로 속마음을 털어놓던 친구 범은이가 나에게 탈영을 제의했다.>


그의 고향은 북청에서 북쪽 100리 거리의 利原(이원). 둘은 걸어서 다음날인 10월8일 집 근처의 고갯마루에 이르렀다. 밤이 되기를 기다려 이웃사람 몰래 집에 들어갔다. 숨어 지낸 지 15일 만인 10월24일, 국군과 유엔군이 利原에 들어왔다. 마을은 온통 축제 분위기였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였다.  

 12월6일(1950년) 청천벽력 같은 소식에 그만 넋을 잃고 말았다. 중공군 개입으로 전세가 불리해진 국군과 유엔군이 후퇴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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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www.chogabje.com/board/view.asp?C_IDX=63881&C_CC=AZ

광복 70주년 현대사 체험수기 심사 後記





[ ....... 대통령을 처음 모시고 애국가를 봉창하는 평양 시민의 제창소리는 온천지를 울릴만큼 웅장하고도 .........     ]


1950. 10.31일자 조선일보 2면


이대통령 평양 방문

감개 더욱 무량히....39년동안 그리든 곳에


[평양에서 대한통신 특파원] 이(李)대통령은 29일 오전 8시35분 미군 항공장교 2명이 조종하는 C-47 미군 특별비행기로 그간 해외풍상 39여년간의 망명생활에서나 또한 4278년10월 환국한
이래 몽매간에도 잊지 못하고 그리워하던 잃었던 우리의 국토 일부 북한 줌심도시 평양을 향하야 역사적인 여도에 올랐다.


29일 오전 8시 35분! 이대통령 일행을 실은 특별 비행기는 폭음도 경쾌하게 여의도 비행장을 이륙, 비행장 상공을 일주한 뒤 기수를 북으로 돌려 일로 북으로 북으로. 오전 8시 45분 개성을 지난 비행기는 과거 5년간 우리 자유한국의 허리를 끊어 자의로 동포를 괴롭히며 갖은 비극과 민족적 악몽에 우리를 사로잡았던 마의 적경(赤境) 38선을 뚫고 일로 북한으로 돌진하였다. 기자는 폭음 관계로 “각하의 심경은 어떠하십니까?” 하고 서면 질의를 제출하엿더니

각하께서는 친히 붓을 들어 다음과 같이 그 감상을 적어주셨다.

“본인이 평양을 방문한 것은 지금으로부터 39년전인 1911년이었다. 

이제 39년만에 처음으로 평양을 방문하게 되니 감개무량하며 기뿌다.

그보다도 세계정복만을 일삼는 외세에 의하야 과거 5년간 분단되었든 우리 조국이 다시 통일 되니 더 한층 기뿌다.

이때 우리는 유엔의 지원을 얻어 다시 통일되었는바 어떠한 나라일지라도 우리가 모든 문명국가와 힘을 합하야 나가는 이상 다시 우리나라를 분단함은 허용되지 않을 것이다. 모든 문명국가는 반드시 우리와 함께 나갈 것이다“


우리 일행이 무한한 감개에 싸여 아름다운 조국산천초목을 바라보는 동안에도 비행기는 시속 160 마일의 속도로 비행하야 어느 듯 대동강을 지나 평양시 일각에 기수를 들여놓았다.

우리기가 밟은 코스는 서울서 개성까지는 북으로 직행, 개성서부터는 약간 서북방향을 취하야 재령 사리원 황주를 거쳐 대동강을 건너 평양에 이른 것이다.

오전 9시30분 비행기는 약 150마일의 양도시간 거리를 불과 55분 밖에 안걸려서 평양 비행장에 도착하였다.


단기 4283년(1950) 10월29일 오전 9시30분 역사적인 평양 입성의 제일보를 들여놓으신 이대통령 각하께서는 비행기 앞에서 조종사도 포함하야 일행과 기념촬영을 하신 뒤에 아군 제O군단장 백(白) 준장(평양 제1착돌입 맹장)등 제장성들의 인사를 받으신후 그 노고와 분투를 치하하셨다. 

이어 대통령 각하께서는 미군과 아국군 의장병이 전후로 보위하는 가운데 찦차로
한때는 피로 물드렀든 대동강을 건너 소위 김일성대학촌을 보시면서 대동강변을 지나
기림리를 거쳐 소위 쏘련 위성국가 수도였던 평양을 아국군과 유엔군이 연도에 도열한 가운데 일보일보 입성하시었다.


평양 시청에 이르는 연도에는 피난갔다가 돌아오는 짐을 진 주민들도 포함한 시민 다수가 손에 태극리를 휘날리며 이날의 세기적인 대통령 방문을 만세소리도 우렁차게 환영하였으며 거리에는 ‘대한민국 국부 이대통령 만세’ 등 대통령을 한영하는 프랑카드와 아치 문이 처처에 보였다.

오전 10시 대통령 각하께서는 과거 5년간 김일성 도당이 선량한 민중을 억압하고 쏘련에의 예속을 위하여 온갖 혹독한 짓을 다해 오던 살인 방화의 마전이었든 지금은 평양시의 새살림집이 된 평양 시청에 무사히 도착하시었다.


39년만의 평양...환호성 천지를 진동


평양시에 무사히 역사적인 제일보를 드딘 이대통령은 평양시청에서 박현숙 권옥희 양씨의 인사를 받은 다음 평양시 관리위원회 위원장 임정득씨를 비롯하야 부위원장들을 인견하고 간단히 시 운영상황을 청취한 뒤에 그들을 치하하면서 앞으로도 성심성의 노력하라는 부탁을 하였다. 그리고 이어 미국 임시민정관 벨파이어 대좌와 힐 중좌도 인견하고 위무한 다음 약 5만여명에 달하는 운집한 시민들의 열광적 환호리에 발코니에 나섰다.


“맹세하자 민주 쟁취를”

이대통령 환영대회서 유시


조국이 일제기반으로부터 광복된 지 5년동안 그리고 그리웠던 이대통령을 처음 맞이하는 시민들의 환호성은...(판독불가)....태극기의 바다로 화하였으며 오랫동안 간판을 내걸지 못하였든 조만식 선생이 영도한 조선민주당을 비롯하야 서북의용대 학생단체들....(판독불가)....

이날 식은 먼저 주악대의 대통령 환영주악.....(판독불가)......대통령을 처음 모시고 애국가를 봉창하는 평양 시민의 제창소리는 온천지를 울릴만큼 웅장하고도...(판독불가)..한복의 대통령은 마이크를 손에 들고 감개무량한 어조로 다음과 같이 약 한시간에 걸쳐 간곡한 인사말씀과 유시를 하시었다.


▲ 국군이 탈환한 평양을 방문, 시청 앞 5만 군중에게 연설하는 이승만 대통령(자료사진)


“본인이 39년 만에 다시 한번 대동강을 건너 평양을 찾아보게 되니 감개무량하며 무한히 기쁩니다. 여러분, 그동안 얼마나 고생하시었습니까.


제2차대전후 적국 일본이 패망하자 자유조국이 독립하여 즐거운 신생활을 할 줄 알었드니 세계 정복을 꿈꾸는 쏘련이 하등 정당한 이유도 없이 비법적으로 우리나라를 양단하여 38선이란 운명의 선을 그었습니다. 쏘련은 김일성 공산도당을 시켜 한국의 쏘련 예속화를 위한 충성을 다하도록 교사하는 한편  방화 약탈을 감행하도록 하여 아름다운 우리 향토 국토를 더럽혔습니다.

그동안 2백만 이상의 북한 동포들이 재산과 가족을 떠나 남쪽으로 내려왔으며 우리는 없는 것은 너로 노나 먹으면서 화해롭게 살아왔습니다. 이북에서 피난해온 동포들은 그 동안 대한민국의 헌법을 준수하면서 민중의 선두에 서서 공산당의 비행을 지적하면서 눈부신 활동을 해왔습니다. 여러분의 가족 친척중 많은 사람들이 민주활동을 많이 해왔습니다. 


쏘련은 소위 막부(모스크바) 삼상(三相)결정이라 하여 우리나라를 신탁통치하에 두고 자기의 위성국가화 하려고 가진 모략과 술책을 다하여 왔으나, 우리는 죽음을 걸고 한마음 한뜻으로 싸워왔습니다.


좌우합작이니 뭐니 가진 방법을 쓰다못해 실패에 돌아가자 쏘련은 무기를 김일성에게 주어 급기야는 지난 6월25일 38선을 넘어 대한민국에 침범하야  수도 서울을 점령하고 전국을 정복하려고 기도하였습니다. 그동안 우리는 돈을 가지고 무기를 사려하여도 여러 가지 국제관계상 무비를 충분히 하지 못했습니다. 쏘련이 대한민국의 무비가 약한 것을 보고 침략을 한 것은 어느면 그들의 판단이 옳았다고는 할 수 있으나 그러나 그들은 목전의 침략에 눈이 어두어 대한민국 뒤에 53개국의 자유민주진영이 있음을 몰랐던 것입니다.


보시오. 우리의 우방 53개국의 평화애호 국가는 24시간 내에 자유을 위해 총궐기하여 오늘날 우리국군을 도와 용감히 싸우고 있지 않습니까. 

쏘련은 필시 한국 같은 조그만 나라를 위하야 전세계가 다 같이 일어날 줄은 몰랐을 것이요, 지금은 머리를 싸매고 앓고 있을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유엔의 지원을 얻어 다시 통일 되었습니다. 

이제는 어떠한 나라일지라도 우리를 다시 분단하지는 못할 것입니다.

공산당은 한국 내에서 축출되었으며 앞으로 중공이나 쏘련이 나온다 할지라도 우리는 하등 겁낼 것이 없습니다. 우리는 자유와 정의를 위하여 싸울 뿐이오, 우리가 합하면 감히 덤벼들지 못할 것입니다. 


여러분, 나와 같이 맹세합시다.

자유와 독립과 민주주의를 위해 싸울 것을!

우리 대한민국은 앞으로 국토를 튼튼히 방어하기 위하야 강력한 군대를 보유할 것이며 유엔은 우리를 도와줄 것입니다. 


여러분! 오늘날 세계는 우리 대한사람들이 얼마만큼 훌륭히 잘 일을 해나갈 것인가 많은 기대를 가지고 보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루 속히 부흥건설에 노력하지 않으면 아니 됩니다.

 여러분, 이제는 도지사도 중앙에서 임명하는 것이 아니라 여러분 자신의 의사로 선량한 대표를 선출하여 임명할 것입니다. 머지않아 도지사 선거가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지금 여러분에게 가장 긴요한 것은 의식주인데 우리 다 같이 모자라는 것은 노나먹고 서로서로 살아나갑시다. 정부는 하루 속히 교통이 통하는 대로 쌀과 광목을 남에서 가져와 여러분에게 나눌 작정인데 모자랄 경우에는 외국에서 쌀과 광목같은 것이라도 우선 사다가 보내드릴려고 합니다. 정부는 현재 만반준비를 가지고 여러분과 같이 한 살림을 하려고 하는 바 유엔을 비롯한 국제적 지원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시기는 미국의 트루먼 대통령과
맥아더 장군이 우리와 뜻을 같이하고 우리를 지지하고 있으므로 그다지 멀지 않을 것입니다.

현재 무초 대사가 워싱턴에 가서 모든 것을 협의하고 있습니다. 유엔도 만사를 잘 되도록 도와줄 것입니다. 


여러분, 이제 와서 누가 남쪽사람이니 북쪽사람이니 하거든 우리 대한민국의 앞날을 저해하는 사람으로 지목해두어 규탄하십시오. 그리고 언제든지 본인이 필요하시거든 청해주십시오.

다 같이 의논하야 살아가십시다. 


끝으로 여러분이 당장 필요한 화폐사용도 관계자들에게 일러두었으니 상의껏 경제재건을 위하야 노력하야 주십시오. 

자, 여러분! 다시 한번 나와 같이 맹서합시다.

통일된 자유조국을 위하야 싸워나갈 것을!“


약 한 시간에 긍한 대통령의 간곡한 유시가 끝나자 시민들은 감격의 열루를 흘리면서 

“우리 대통령 만세”를 연속 절규하며 대통령의 유시에 보답할 결의를 표명하였다.


이리하야 식은 오전 11시55분 국방부 전훈국파견 군악대가 연주하는 가운데 원만히 끝났는데 자유의 종소리는 자유로운 행복된 금일을 축복하면서 계속하여 울렸다.


식 종료후 대통령은 이별을 아까워하는 시민들 속을 지나 열광적 환송속에

“대통령각하 만세” 소리를 뒤에 들으시면서 수행원을 대동하시고 비행기에 탑승하야 일로 서울로 귀환  하오 한시 반 무사히 도착하시었다. (조선일보, 1950. 10.31)





          1950.10.24.  동아일보


[ ...... 남녀노유를 불문하고 모다 얼굴이 초라하게 야위고 있었으며 의복도 처참하기 짝이 없었다. .......


  ..... 어린 아애들이 길가에서 국군이 버린 빈 깡통을 줍고 있어 그들에게 물어 본즉 그와 같은 깡통을 처음 본다고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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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의 결과로서 문어진 집은 확실한 보고는 받지 않았으나 약 40 파센트가 소실당하였다.


시내에서 참살을 당한 우리 애국자 수효는 4천명이나 되며 피난해서 살어오는 사람들도 서울에 처음 들어올 때의 전쟁동포들과 비교해 보면 남녀노유를 불문하고 모다 얼굴이 초라하게 야위고 있었으며 의복도 처참하기 짝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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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어린 아애들이 길가에서 국군이 버린 빈 깡통을 줍고 있어 그들에게 물어 본즉 그와 같은 깡통을 처음 본다고 대답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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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통분한 사실을 보고 말로서는 형언을 못하고 그저 울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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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50.12.4.    평양


[ ...... 모여드는 남하 피난민의 수는 무수하였는바 그들은 파괴된 가교를 드럼통과 부서진 가교의 木片 등으로 얽어매가지고 건너는 것이었다. ........


  ...... 도강하는 시민들을 중공군 게릴라부대로 오인하고 다시 기총탄을 내려 부어서 도강 중도에 쓰러지는 시민도 있었으나 쓰러지는 사람의 시체를 넘으면서도 도강하는 시민들 .......


 ..... 평양에서 남쪽으로 .... 연도는 약 50만으로 추측되는 피난민으로 덮여 .......       ]



유엔군 철수 직후의 평양 전경


조선일보 

1950년 12월 13일 


[본사 특파원 全東天 記] 12월 5일 유엔군 및 국군의 전략적 철수로 적의 손에 떨어지기 직전의 최후의 평양은 폭음과 화염 그리고 그 충천하는 흑연 속에서 도강하여 남하하려는 시민들의 아우성으로 뒤덮여 있었다. 일반시민에 대한 피난 권고는 12월 3일에 내려져서 대부분의 시민은 4일까지 피난을 하였으나, 4일 저녁 대동강의 가교가 최후 철수부대의 손으로 끊긴 다음에도 이 가교로 모여드는 남하 피난민의 수는 무수하였는바 그들은 파괴된 가교를 드럼통과 부서진 가교의 木片 등으로 얽어매가지고 건너는 것이었다. 


이렇게 피난민들이 건너는 동안 하오 3시가 되자 유엔군 전투기들은 모란봉 근처의 중공군 게릴라부대를 기총 소사한 다음, 도강하는 시민들을 중공군 게릴라부대로 오인하고 다시 기총탄을 내려 부어서 도강 중도에 쓰러지는 시민도 있었으나 쓰러지는 사람의 시체를 넘으면서도 도강하는 시민들의 광경은 대한민국의 자유와 평등을 이들 평양시민들이 죽음으로써 찾는 광경이기도 하였고, 괴뢰집단의 행악이 그들에게 얼마나 심독하였는가를 실증하는 광경이기도 하였다.


전투기들은 계속하여 시내의 군사시설 비행장 등을 폭격하여 피난민들이 寺洞 근방의 언덕에 올랐을 때는 맹렬한 화염이 평양을 뒤덮었는데 때마침 저녁노을이 화염에 반사하여 그 처절한 평양의 최후는 평양을 떠나는 시민들의 발을 몇 번이고 멈추게 하고 눈물을 뿌리게 하였다. 허나 이렇게 평양을 바라보며 눈물 뿌리는 시민들도 국군과 유엔군의 최후의 승리를 믿어 의심치 않는 것은 지극히 마음 든든한 점이었다. 대동강의 가교가 끊길 때까지 강을 건너지 못한 피난민들은 강서·용강쪽으로 흘러내려갔는데 그들의 대부분은 진남포·광량만을 경유해서 해로로 인천에 상륙할 것을 희망하고 있었다.


평양에서 남쪽으로 40리 떨어진 중화에서부터 신막에 이르는 300리 길의 연도는 약 50만으로 추측되는 피난민으로 덮여 있었는데 이들 일렬종대의 피난민의 대군은 하루 60리 내지 70리의 평균속도로 남하하고 있었으며, 이 피난민의 수는 그들이 한 마을 한 시정을 지날수록 늘어만 가고 있었다. 그들의 이동속도로 추측하여 오는 15일이면 그 선두부대는 서울에 들어올 것으로 보이는 바 불에 뒤덮인 자기 집을 돌보지 않고 최후의 평양에서 죽음으로써 대한민국을 찾아 남하하는 그들의 피난행렬은 정의의 승리를 시위하는 인민의 행렬 같기도 하였다.


조선일보   1950년 12월 13일  





              1950.11.


[ ...... 현물세가 너머도 가혹하였기 때문에 농민들은 오히려 그전 반타작의 소작제도가 좋다고 생각할 정도 ........     ]


 평양과 함흥 (2) 두개의 좌담회


 1950.11.16.동아



평양과 함흥에서 민간유지들과 좌담할 기회를 가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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탄압과 공포의 5개년동안 그들의 대한민국에 대한 동경은 흡사 지상천국에 대한 그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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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배된 토지를 어떻게 재조정하는 것이 좋겠느냐는 질문에 대하여 그들은 이구동성으로 괴뢰정권의 현물세가 너머도 가혹하였기 때문에 농민들은 오히려 그전 반타작의 소작제도가 좋다고 생각할 정도이니 대한민국의 농지개혁을 크게 환영할 것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민생문제와 아울러 그들이 심각한 안색으로 강조하는 것은 "인민군"의 대부분은 강제로 끌려간 자제들이니 이들 포로에 대하여 관대한 조치가 있기를 원한다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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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산통치의 장단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대하여 그들의 정치는 살인 강도정치에 불과하지만 그 강력한 조직력은 우리에게 많은 참고가 된다는  것이었다. 




             1951.1.


[ ...... 실지로는  6할 이상을 빼앗아가고 맙니다. ........

  ..... 무슨 회합, 무슨 대회 등 .......

  ..... 소작하던 농가도 그 전보다 살기가 더 한 층 어려워졌으니 ........

  ..... 어린 자식들이 내복입고 신발 신은 것을 이남에 나와서 처음으로 보니 .......      ]



월남민·피난민들의 공산체제 경험담    


민주신보   1951년 01월 15일    



기원전 게르만 민족의 유럽대이동도 이랬을까? 세계제2차대전 시 일본침략군을 피해 양자강 줄기를 타서 북상으로 죽음의 이동을 한 세기의 비극이라고 일컬어졌던 중국민족의 수난도 비할 바 아니다. 모진 공산 魔風에 견디지 못하여 수백만이 넘는 동족이 우리의 부모형제와 아들 딸들이 남으로 남으로 내려오고 있다. 세계 역사상에 한 민족이 이러한 수난과 이러한 비애를 겪어온 일이 어디 있었던가. 한 핏줄을 반만년이나 타고 나온 동족에 이렇게 모진 운명의 십자가를 누가 강요했는가. 대한의 온 겨레의 평화롭고 안락한 꿈을 그 어느 누가 깨뜨렸는고…….


 이제야 우리 삼천만 동포는 다 봤다. 겉으로는 민족의 행복과 발전을 위한다는 그 毒牙 품은 가면을 온 민족은 뚜렷이 봤다. 허위·약탈·학살·포악이 붉은 무리들이 자랑하던 그 정치의 전부였다는 것을…….


우리 민족은 두 번 다시 그네들에 속지 않으리라. 여기에 공산치하의 암흑세계에서 그 모진 질곡과 □□으로부터 벗어나와 광명의 천지로 돌아온 몇 사람들의 입을 빌려 민족 앞에 공개하는 그 몸서리나는 생지옥의 양상을 들어보면서 삼천만의 이름으로 아니 세계 자유애호 인류 20억의 이름으로 공정한 심판을 내려야 할 것이다.


▹곤궁이 극도, 농민 朱씨:무슨 會인지 회의 때마다 놈들은 나보고 하는 말이 中農이라고 합디다. 허기야 답 2,000평 가량하고 田 4,000평 가량 경작을 하니 남한농가로 친다면 그리 옹색한 실림은 아닐 것입니다. 그러나 북한농가는 나보다 더 많이 농사짓는 농가도 살림살이는 남한농민보다 훨씬 곤궁하지요. 


현물세라는 것이 말로는 전곡의 2割 3分, 稻作이 2할 7분이라고 하지만 알알이 세고 재고 심지어는 마당가의 호박 몇 포기, 고추 몇 대까지 현물세로 샅샅이 털어가니 실지로는 6할 이상을 빼앗아가고 맙니다. 그놈에 2개년계획은 농민이 굶어 죽는지 부어 터지는지 그 따위 것은 조금도 상관치 않고 초과 달성해야 한다고 모두 털어 가지요.


단지 이것뿐이라면 그래도 죽을 끓여 먹어도 제 고향에 박혀 있을려고들 하겠지만, 지방자치세니 국가동원이니 해서 2년에 20일 이상 노력자는 모두가 광산·탄광으로 강제노동으로 끌려가야 하고, 가마니 공출은 노력자 매 인당 20매 이상 바쳐야 하니 노동자·농민을 위한다는 북한은 실지로는 농민을 소나 말 같이 부려먹는 것입니다.


그게 다 군인에게 준다는 獸肉費로 耕作地田 1町步에 정육 8斤, 답 1정보에 16근씩 洞里마다 소 5·6頭씩 바쳐야 하고, 무슨 희사니 열성미니 애국미니 하여 바치는게 얼마나 되는지 헤아릴 수 없습니다. 만일 이걸 내 놓기를 꺼려한다면 어디서 잡아가는 줄도 모르게 끌려가는게 공산독재 치하올시다. 그러니 이것저것 다 바치고 나면 빈농가는 설 안에 식량이 떨어지고 그래도 조금 낫다는 중층이라야 3월달 밭갈 머리까지 겨우 죽으로 연명하는 형편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품삯벌이라도 하려니 도로경비니, 철도경비니, 세곡경비니 무슨 회합, 무슨 대회 등에 벌이를 할 여가가 없습니다. 하나 잘 먹고 잘 산다는 사람은 소위 노동당 간부와 인민위원회 간부들 뿐이지요. 저 같은 사람은 원래가 자작농이었지만 과거에 소작하던 농가도 그 전보다 살기가 더 한 층 어려워졌으니 거기에서 어찌 산단 말입니까. 어린 자식들이 내복입고 신발 신은 것을 이남에 나와서 처음으로 보니 고향에 둔 어린 것들이 불쌍합니다.


▹인권을 유린, 노동자 宋씨:나는 과거 5년 동안 북한에서 제철노무자 생활을 해왔다. 나는 과거의 근로자 생활에서 뼈저리게 느낀 것은 북한 괴뢰정권이 표면으로는 노동자, 농민들의 이익을 우선적으로 옹호한다고 말하고 있고 또 그들의 소위 헌법에도 보장되어 있다고 뻔뻔하게 떠들어대면서도 그 실에 있어서는 실질적으로 노동자들의 인권을 유린하고 있다.

 첫째 그들은 진보적 노동법의 혜택을 받는다고 하지만 8시간 노동제가 분명히 위반되고 있다. 그들은 항상 생산돌격이니, 목표달성이니 하는 아름다운 구호를 내걸고 8시간 노동시간을 유린하고, 둘째 노동자의 건강을 보호한다는 견지에서 사회보험제 같은 것을 실시하고 있으나 이도 그 실에 있어서는 표면적인 언사에 불과하다.


진정으로 근로자의 이익과 근로자의 모든 자유를 보장해준다면 이 나라 근로자들이 왜 그들의 정책을 반대할 리 있겠는가? 대다수의 노동자, 농민이 공장과 농토까지 버리고 심지어는 조상의 뼈가 묻혀 있는 고향산천까지를 버리고 남하하는 이유가 어디 있겠는가? 모든 남하한 피난민은 다 나와 같이 헐벗는 한이 있더라도 자유로운 땅을 찾아온 것이리라고 생각하고 있다(평양 거주자 宋榮煥씨).


▹언론을 총탄압, 문화인 李씨:나는 6·25사변 이후 3개월 동안 북한 괴뢰군이 서울에 침략의 마수를 뻗쳤을 때 그곳에 있었다. 나는 순서 없이 그들의 문화정책의 면모를 본대로 말하련다. 첫째 그들의 언론정책을 보라. 아는 자유, 알고 싶은 자유, 알리는 자유가 완전히 속박되어 있다. 그들의 신문을 보면 그야말로 정부나 당국에 아부만을 일삼고 있는 어용신문이 아니면 관보나 기관지에 불과하다. 그뿐 아니라 신문기사 검열 같은 것도 일일이 사전검열을 받아야 하니 과연 이래도 언론자유며 민주정책이라 하겠는가. 그들이 하는 선전은 모두 아름답고 기막힌다.


그러나 현실을 떠난 그 선전인 까닭에 민중들은 처음엔 속지만 나중에는 그 기만성을 누구보다도 잘 알게 된다. 문화정책에 있어서 그들의 기만성이란 더욱 심하다. 물론 우리는 무질서한 것을 자유라고는 생각지는 않는다. 허나 우리는 비판의 자유를 티끌만큼도 그들에게서 향유한 일이 없었으며 그야말로 벙어리의 3개월을 보냈다. 여기에 이제 무슨 문화가 있고 예술이 있고 인생이 있겠는가. 더 말할 여지가 없다. 나는 앞으로 내가 갈 길만을 가려고 단연 남하하였다(서울 거주문화인 李永哲씨)


▹교육은 암담, 교육가 金씨:내가 월남하게 된 동기는 별다른 것이 없습니다. 다만 북한동포의 전부가 가슴속에 가다듬고 있던 심정을 나 한 개인의 행동으로 옮겼을 따름입니다.

5년간 우리가 북한 교육계에서 맛본 鐵帳 내의 교육제도는 세계역사에도 드문 암담한 것이었고, 인간의 정당한 지성과 감정이 응당 향유해야 할 온갖 자유를 압살 당하는 그러한 교육제도였습니다. 그들의 교육정책이 어떠한 것인가에 대해서는 나보다 앞서 월남하여 국군진영에서 싸우고 있거나 전사 혹은 戰傷한 나의 후진 제자들의 눈물겨운 싸움의 길에서 잘 표현되고 있을 것입니다(원산거주 교육가 金素仁씨).


▹내분이 다반사, 관리 崔씨:북한 괴뢰정권의 소위 외무성에 근무하고 있던 나는 이번 남하하게 된 것을 행복하게 생각합니다. 외무국장이었던 李康國이가 많은 인테리겐챠와 함께 도태 당하고, 소위 그들의 성분개조운동으로 내분이 자자하던 시기를 回感하면 진저리가 나고 치가 떨립니다. 소위 남북연석회의 당시에 그들은 많은 관리들을 여관 보이로 변장시켜 정객들의 일거일동을 감시하게 하였던 것입니다.


그들의 목적을 위하여 수단을 가리지 않는 기만과 학살정책으로 인하여 괴뢰정권 내부의 모든 관리들은 상호견제하고 서로 눈치만 보고 있는 것입니다. 거기에서는 친소파가 아닌 분자는 기어이 숙청 당하고야 마는 형편입니다.


독신관리들의 합숙소에는 반드시 정치보위부의 스파이가 개입하여 각자의 일언일동을 감시하고 있습니다(관리, 전 평양외무성 西歐部 근무 崔成極).


▹지긋지긋하오, 부녀 吳某씨:지금 생각하여도 지긋지긋한 90일 공산치하의 서울의 생활……. 겨우 걸어 다니는 어린 자식들도 괴뢰군이라면 지금도 “엄마”하고 품안에 뛰어오며 울음소리를 그치는 것이다.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매일 같은 강제노동에 수수국, 캬배쓰국 한 그릇에 쓰러지는 사람들은 헤아릴 수가 없다. 남편은 반역분자라고 이곳 저곳을 피해 다니고 어린 자식 6명을 데리고 살자니 배급하나 없고, 또한 돈 한 푼 없는데 매일 야밤에 남편을 내놓으라는 놈들의 공갈협박에 1일이 천추 같았다. 저녁마다 애국자를 총살하는 총성, 수많은 괴뢰군의 강도·절도로 하루 한시간의 수면조차 어려웠다(서울 거주, 吳某씨).


▹공산주의 강요, 학생 康군:배우는 학도로써 진리의 탐구란 생명이요, 또는 양식이 되는 것이다. 그러나 이북 공산치하의 교육정치란 진리의 탐구는커녕 그 정열조차 가지지 못하는 불행 속에서 살아나왔다. 그곳의 교육제도는 4년제의 인민학교로부터 위로 초급중학(3년), 고급중학(3년), 각종의 전문학교(4년), 그리고 대학교(4년)가 있으며 이에 공산운동의 간부양성기관인 당학교가 있는데 전부 맑스·레닌주의 강제수업이 그 교육의 근본중심이 되어 있다(평양 음악학교 생도 康斗柱).


▹거래세로 파탄, 상인 朴씨:북한에서는 상업을 하려면 등록을 하여야만 상행위를 할 수 있다. 每 등록된 상인들은 매월 20일까지 거래세라는 것을 바쳐야 되고, 其 외에 공채 할당이라던지, 대소 행사비 조달은 전부 상인들의 부담으로 되어 있다. 이러한 세금, 부담금 등으로 상인들은 허리를 펴볼 여유라고 없고 1년 가야 넥타이 한 번 매볼 수 없는 형편이다. 상거래에도 여러 가지 제한이 많아서 도저히 남한에서 보는 것과 같은 상행위의 자유성은 없다. 상업규모에는 별 제한이 없으나, 대규모로 하면 할 수록 손해를 입는 기현상을 나타내고 있는데 그 이유는 크게 하면 그 만큼 모든 부담금도 증가하므로 100만 원의 자본을 가진 상인이나, 10만 원을 가진 상인이나 자기 소득에는 별 차이가 없는 것이다(함북 길주읍 거주).





[......농민은 농작물의 55% 내지 60%를 세금, 기타 부과금으로서......


..... 상시 감시..... 생산종목, 생산량 내지 그들이 할 바에 이르기까지 일일이 지시를........]


미국무부, 북한 토지개혁 실태조사 발표 


게재지명 부산일보 

게재일자 1951년 03월 31일 


[워싱턴 29일발 USIS] 미국무성은 최근 북한의 토지개혁에 관한 실태조사를 완료하였는데 28일 동 省은 소위 북한의 공산주의 토지개혁은 일종의 완전한 기만으로서 북한인민을 토지의 노예 내지 무자비한 관료정치의 희생물로 하였다고 요지 다음과 같은 성명서를 발표하였다. 


“1. 공산주의 치하 토지를 배당받은 농민은 농작물의 55% 내지 60%를 세금, 기타 부과금으로서 국가에 바쳤으며 그들은 상시 감시의 관계관 이외에 시·군·도의 관리소배들로부터 생산종목, 생산량 내지 그들이 할 바에 이르기까지 일일이 지시를 받았다.

 이 결과 그들은 작년 말에 있어 生産推持를 위한 이외에 전보다 더욱 일을 하지 않으면 안되었으나 그 보수로서는 공산주의 경제의 방직공장으로부터 배당되는 면제품 구입에도 불충분하였다. 


1. 공산주의 정권은 5년 간에 있어 신 토지소유자로부터 그들의 독립성을 여지없이 빼앗고 그들은 국가 계획경제란 기계의 예속물화 하는데 간단없는 노력을 경주하였으며 1950년에는 농업조치로서 집단농장의 실현도 未久에 근박하고 있었다. 

결국 북한의 토지개혁은 농민의 경제상태가 개선되지 않았다는 것뿐만 아니라 토지의 기술적 소유제도 잠정적인 것에 불과하다는 의미하 완전한 기만으로 되고 말 것이며 전 농민계급은 농업무산계급으로 하락하고 말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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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북한정권이 토지를 분배한 후 新 토지소유자들은 토지는 영구히 공여한 것이니 매매 대차, 저당은 이를 할 수 없다고 규정한 증명서를 받았다. 즉 그들의 토지에 대한 권리는 그 사용에 국한되었으며 그 사용료로서 25%의 현물세를 지불하였다. 


1947년에 세율은 논 27%, 밭 23%, 沓 10%로 작정되었다. 그러나 비현실적인 평가 때문에 실질적으로 규정율을 초과하는 토지세 이외에 농민들은 또한 특별세 부과금 그리고 소위 자진헌납이라는 重荷 아래 신음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1) □□을 취□하는 외에 공산주의 정권은 농민들에게 지방건설 내지 광산작업을 무보수로 강요하였으며 매 호구는 1 내지 2개월 간 자진노동을 제공하였고 18~55세의 전 농민에는 1년에 1회씩 20일간의 강제노동이 부과되었다.


(1) 북한 농민들은 항상 관공서 숫자와는 반대로 전농생산량은 일제시의 수준에도 미급하였으며 정부발표에는 멀리 미달하다고 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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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국   용정


 [ ...... 밤 12시에 일어나서 다음날 저녁 7시까지 밭에서 일을 ........

 ......  총수확을 국가, 집체, 개인이 각각 3분의 1씩 나누다 보니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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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현재 세계를 상대로 장사를 하고있습니다." 이는 룡정시 동성용진 룡산촌 촌민들의 미래에 대한 자신감으로 우러나오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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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0-70년대 정치운동과 배고픔의 련속


60-70년대 룡산촌에서 서기사업을 하였던 김석구 로인은 "당시 룡산촌, 영성촌, 평안촌, 해란촌은 선진대대로 소문났었다."고 했다. 

그는 "그러나 농민들이 마음대로 닭을 치지 못하고 소나 돼지를 기르게 못했으며 담배도 100포기이상 심지 못하도록 제한하여 농민들의 생활이 매우 어려웠다"고 하면서 "경제적인 어려움을 극복하고저 룡산촌에서 철물가공공장을 건설하려고 많은 노력을 하였고 촌민들도 철물가공공장이 촌민들의 배를 불룩하게 만들어주기를 희망했다. 그러나 이는 자본주의로선을 걸으려 하는것이라고 하면서 촌민들의 창업열에 찬물을 끼얹었다. "면서 당시를 회억했다.


김석구 농민은 "그래도 당시 농민들은 로동에 대한 열정은 매우 높았다"고했다. "밤 12시에 일어나서 다음날 저녁 7시까지 밭에서 일을 했다. 그리고 당과 조직에서 지시한 일은 목숨을 걸고 완성하였다. 그러나 식구가 많고 농사수입은 일년에 일인당 100원 정도에 지나지 않아 살기가 정말 어려웠다"고했다.


당시 김석구서기와 함께 사업했던 김일천할아버지는 "개혁개방전에는 농촌에서 호조조생활을 했는데 1년 총수확을 국가, 집체, 개인이 각각 3분의 1씩 나누다 보니 농민들은 먹고살기가 매우 어려웠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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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젠가 ‘만두를 배불리 먹고 싶어 작가가 됐다’고 고백한 적이 있다. 


“어린 시절 중국 경제는 매우 곤궁했다. 배고픔과 분리된 유년은 떠오르지도 않는다. 먹는 걸 주 소재로 다룬 이유도 거기에 있다.

 인생에서 처음 배불리 먹은 기억이 열여덟 살 때다. 부역에 동원돼 만두 여덟 개를 먹었다. 뱃가죽이 늘어지도록 먹는 게 소원인 건 당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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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97


[ ..... 좋은 것은 하나도 없지.  일나오라, 이리가라, 저리가라, 회의 많고 비판도 많고  쌀도 배급으로 주는 지긋지긋한 게 무엇이 좋겠나.  한마디로 수용소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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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땅에 들어서니 보고, 듣는 것 모두가 놀랄 정도로 새 세상이었습니다. 조선이 제일이라고 생각했는데 놀라운 중국의 현실과 생활을 체험하게 되면서 우리가 김정일에게 너무도 속고 살았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중국조선족 마을엔 어디를 가나 교회가 세워져 있었고 교회에서는 우리의 생명을 보호하고 생활을 보장해주었습니다. 교회의 집사인 김아바이는 우리들을 자기 집에서 며칠 동안이나 보호해주었습니다.


그때 김 집사의 집 마당에는 볏단이 하늘높이 쌓여 있었고 강냉이도 마대자루에 담겨 있었습니다. 또 탈곡하지 않은 곡식도 마당 한켠에 수북이 쌓여 있었습니다. 새 자전거도 자물쇠를 잠그지 않은 채 마당에 그냥 내놓고 있었습니다.


“낟알을 이렇게 마당에 방치하면 도적이 훔쳐가지 않습니까?” 그러자 김 집사는 “어느 집이나 다 이만큼씩은 있소. 도적질해가라고 해도 안 가져가. 수매시켜야겠는데 창고가 찼다고 해서 걱정이야. 중국이 개혁개방하고 농민들에게 땅을 도급으로 가족단위로 나누어주니까 이렇게 낟알이 쌓여서 처치곤난이야. 빨리 팔아야겠는데...”


저는 또 물었습니다. “지금의 개인농사가 무엇이 좋고 집단농사는 무엇이 좋았습니까?” 


그러자 김아바이는 “중국에서는 집단농장을 인민공사라고 하는데 좋은 것은 하나도 없지. 일나오라, 이리가라, 저리가라, 회의 많고 비판도 많고 쌀도 배급으로 주는 지긋지긋한 게 무엇이 좋겠나. 한마디로 수용소이고 감옥이지.


개인농사가 좋은 점은 노력한 것만큼 또 땀 흘린 것만큼 대가와 보상이 차례지니 좋고 제가 알아서 일하고 또 쉬는 자유가 있어 좋고 자기의 땅, 소, 자기의 낟알이 있으니 든든하거든. 한해 농사로 4~5년은 먹을 수 있으니 얼마나 좋은가? 걱정이라면 낟알이 팔리지 않는 거지. 이 낟알을 빨리 팔아야겠는데 나도 조선에 친척이 있는데 그들이 와서 가져가라는데 오기가 너무 힘든 모양이야.”라고 말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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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지개혁의 효과에 관해서는 1980년대까지만 해도 비판적인 견해가 우세했습니다. 정부가 직접 수용하여 분배한 토지가 전체개혁 대상의 절반도 되지 않은 가운데, 많은 토지가 지주에 의해 은닉되거나 사전에 소작농에게 고가로 강제 처분되었다는 것이죠. 그런데 최근의 여러 구체적인 연구는 지주가 사전 방매한 토지의 가격이 법정 상환가격보다 높지 않음이 일반적이었으며, 또 대량의 사전 방매도 결국 개혁의 강제성 때문인 만큼 크게 보아 농지개혁의 효과로 간주해야 한다는 견해를 제시하고 있습니다.


《재인식》에 실린 장시원 교수의 논문, <농지개혁ㅡ지주제 해체와 자작농체제의 성립ㅡ>은 이러한 새로운 동향의 연구 성과를 잘 대변하고 있습니다. 어쨌든 농지개혁으로 지주제가 소멸하고 전 경지의 96%가 자작지로 바뀌었습니다. 농지개혁의 효과는 어느 정도 국가체제가 안정된 1950년대 말부터 나타나기 시작합니다. 자신의 농지를 소유하게 된 농민들의 생산의욕으로 농업생산력이 부쩍 증가하기 시작했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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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영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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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북한의 토지개혁은 사인지주제에서 국가지주제로 변화 ......

    ...... 도시나 농촌에서 기아가 속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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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지개혁에 대한 저항세력은 상당수 북한을 탈출하고 없어진 것이다. 그러나 이후에도 반발세력이 완전히 없어진 것은 아니다. 새로운 반발세력이 생성된 것이다. 토지개혁 이후 무거운 세금을 거두어 갔기 때문이다. 


북한은 토지개혁 후 당해연도의 산물에 대하여 농업현물세제를 실시하였다. 처음에는 25%를 징수하도록 하였으나 이 수치는 법령상의 규정일 뿐이었다. 농업현물세뿐만 아니라 애국미, 성출 등 잡세로 인하여 실제로는 40% 정도를 납부해야 했다. 북한의 농민들이 낸 각종의 잡세는 토지개혁 이전과 다를 바가 없었다. 결국 북한의 토지개혁은 사인지주제에서 국가지주제로 변화하였다고 볼 수 있다. 당시 북한은 도시나 농촌에서 기아가 속출하는 현황이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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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5년에 150% 상환' ..... 소작료를 불과 5년만 내면 .......

    ..... 농지세 .... 세율이 7%였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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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것이 바로 '5년에 150% 상환'이라는 대원칙이었다. 즉 북한에서는 30%씩 영원히 새로운 지주에게 바쳐야 했지만, 한국에서는 30%씩 단 5년만 내면 영원히 그 땅을 자신이 소유하여 자손에게도 길이 물려 줄 수 있게 한 것이다. 1년에 50%~ 60% 소작료를 바치던 일제시대와 비교하면, 소작료를 불과 5년만 내면 영원히 토지를 소유할 수 있게 되었던 것이다! 반면에 북한은 30%씩 5년이 아니라 500년을 내도 그 땅은 자기 땅이 안 되었던 것이다! 


문제는 하나 더 남는다. 지가를 상환한 다음에 국가에 세금을 얼마나 냈느냐는 것이다. 만약 농지세를 10% 이상 걷어 가면 고려초나 조선초보다 못하게 된다. 이에 대한 자료를 알 수 있는 것이 1950년의 임시토지수득세이다. 이 해에 정부는 200만 정보의 농지에 대해서 140만석의 농지세를 걷기로 했다. 이것으로 세율을 계산해 보면 한국의 농지개혁이 농민에게 유리했는지 불리했는지 알 수 있다. 1950년 곡물 생산이 345만 톤 곧 2156만석. 140만석을 2000만석으로 나누면, 0.07 곧 세율이 7%였다. 성군인 세종조의 세율과 비슷하다. 북한에서는 세율이 30%이고 한국은 7%였던 것이다! 고추와 마늘, 배추와 무 등에 대해서는 따로 걷지 않은 걸 감안하면 6% 정도였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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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석사학위 논문으로 “농지개혁 과정에 관한 실증적 연구 - 충남 서산군 근흥면의 사례를 중심으로”를 썼다. 70년대 당시 학계에서 박현채 선생 등은 농지개혁이 실패했다고 했는데, 농민운동을 하면서 살펴본 농촌 현지에서는 지주계급을 찾아볼 수 없었다. 이러한 기존 인식과 현실의 괴리를 메우기 위해 충남 벽지 농촌에서 농지개혁 당시 농지매매경험이 있는 촌로들을 발로 찾아다니며 논문자료를 수집했고, 농지개혁에 대한 기존 인식을 전환시키는 데 일정한 역할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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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장상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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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북한식 농지개혁 .... 정부에 노예가 되는 것에 불과하다 ........

  ..... 가격을 받아서 자본을 만들어야 공업에 착수할 수 있을 것 ........    ]



위대한 지도자 이승만의 경제 리더십(8)


8.  이승만의 토지개혁으로 ‘차별 없는 시대’ 실현 



농지개혁에 성공했기 때문에 한국은 근대화 출범 초기부터 지주-소작인간의 갈등이 존재하지 않는 균질한 사회로 출발했다. 그 결과 자본주의 사회로의 이행 과정에서 첨예한 계급 갈등의 소지를 미래 해소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것이 농지개혁이 우리에게 준 가장 큰 성과다.


관리자  


지주-소작관계 청산하고 시장경제와 자유민주주의 뿌리내려 


이승만(李承晩) 대통령의 업적을 논하는 과정에서 빼놓을 수 없는 것이 토지개혁이다. 현대사 전문가들은 건국 직후 이승만 대통령의 결단으로 시행된 토지개혁이 없었다면 오늘의 대한민국은 존재하지 않았을 지도 모른다는 평을 내놓을 정도다. 


조선 500년을 지배했던 유교는 물질이나 돈을 비천한 것으로 규정했다. 황금 천시(賤視)사상은 곧 상업 천시로 이어졌고, 사농공상(士農工商)의 신분제도 하에서 상업을 가장 비천한 것으로 여기는 사회 풍토가 깊이 뿌리내려졌다.


농업을 제외하고는 산업이 태동하지 못해 민족자본 축적이 불가능했고, 그 결과 대규모 자본이 투자되어야 하는 산업화는 엄두도 못내는 상황에서 해방을 맞게 됐다. 국내에 남은 유일한 민족자본이라고는 조선시대부터 일제시대를 거쳐 해방 후까지 이어져 온 토지자본이 전부였다.


선각자 이승만의 앞선 사고방식 


이승만 대통령은 세계 최고의 선진 공업국이었던 미국에서 수십 년을 풍찬노숙(風餐露宿)하며 엘리트 교육을 받은 당대의 선각자이자 지성인이었다. 그는 미국 망명 생활과 독립운동 과정에서 미국식 자본주의와 자유민주주의, 선진 공업국의 장점을 깊이 통찰하고 있었다. 그리하여 건국 대통령에 취임한 직후 한국 사회의 근본을 개혁하기 위해서는 ‘농토는 농민에게 돌려야 한다’는 구상을 갖게 되었다. 그래야만 수천 년 이어온 지주-소작인의 갈등 관계를 청산하고 시장경제와 자유 민주주의를 뿌리내리는 토양이 될 것으로 판단했기 때문이다. 이것이 농지개혁에 돌입하게 된 배경이다. 


이승만 대통령은 농지개혁의 방법론에 있어 북한 식의 무상몰수 무상분배가 아닌, 유상몰수 유상분배여야 한다는 확고한 신념을 가지고 있었다. 서울신문(1948년 12월7일자) 보도에 의하면 이대통령은 “북한식 농지개혁을 할 경우 정부가 대지주가 되고 농민들은 다 소작인으로 경작하게 되어 전에는 부호에 노예 되던 것이 지금은 정부에 노예가 되는 것에 불과하다”고 말했다.


또 같은 신문 12월10일자에는 “자본이 대부분 토지에 있는 한국에서는 지주들이 다 토지를 내 놓고 그 가격을 받아서 자본을 만들어야 공업에 착수할 수 있을 것”이라면서 유상몰수 유상분배 형태로 농지개혁을 진행하고, 지주들에게 토지대금으로 지급된 자금으로 산업화로 나갈 방침을 밝혔다.


당시 의회의 다수 의석은 지주 계급이 주가 된 한민당이 차지하고 있었다. 이 상황에서 지주계급에 결정적 타격이 가해질 농지개혁 법안을 통과시키기 위해서는 비장한 각오와 비상한 수단이 필요했다. 이승만 대통령은 농지개혁을 반드시 성공시켜야만 나라가 바로 선다는 각오 아래 과거에 공산주의자였던 조봉암씨를 농림부장관에 발탁하여 한민당의 반대를 무릅쓰고 농지개혁을 강도 높게 밀어붙였다. 


그 결과 1950년 3월부터 농민들에게 ‘분배 농지 예정 통지서’를 발급하기에 이른다. 

여기서 주의 깊게 봐야 할 점은 농민들에게 분배 농지 예정 통지서를 발급한 것은 법과 시행령이 완성되기 이전에 이대통령의 의지로 단행됐다는 점이다. 이대통령은 “춘궁기가 촉박했으므로 추진상 불소한 곤란이 있더라도 만난을 배제하고 (농지개혁을) 단행하라”는 명령을 내림으로써 개정 법령과 시행령이 미처 마련되지 못한 상황에서 먼저 행정적 조치들이 신속히 추진됐다. 


지주들은 소유하고 있던 전답을 내놓는 조건으로 정부로부터 지가(地價)증권을 받았는데 농지개혁이 시행된 지 3개월만에 6ㆍ25 전쟁이 터졌다. 전쟁은 모든 질서와 가치를 파괴한다. 돈의 가치라 해서 예외는 아니었다. 전쟁 수행을 위해 막대한 자금이 필요했던 정부는 마구 돈을 찍어 유통시킴으로써 전시(戰時) 인플레가 발생하기 시작했다.


물가지수는 서울 도매 물가를 기준으로 1945년을 100으로 할 때 1947년 855, 1950년 2974, 1951년 1만8753, 1952년 4만605, 1953년 5만863으로 폭등하는 하이퍼 인플레이션 양상을 보였다. 부산으로 피난을 온 지주들은 전시 인플레로 인해 휴지 조각처럼 변한 지가증권을 투매하여 생활비로 사용했다.


그 결과 호남지역을 중심으로 한 대지주 계급은 몰락했고, 경제 부흥과 산업 발전에 쓰여졌어야 할 유일한 민족자본이었던 토지자본은 지주들의 생활비나 소비 자금으로 유실되어 갔다.


우리와 달리 대만은 토지자본의 산업자본화에 성공한 나라다. 특히 중소 규모의 지주들이 내놓은 토지를 대가로 받은 지가증권을 산업자본화는 데 성공함으로써 대만은 건실한 중소기업 위주의 산업 발전이 가능했던 것이다. 


반면 우리 나라는 6ㆍ25 전쟁으로 인해 중소 지주들의 지가증권이 제 역할을 못하고 소비됨으로써 특히 중소기업의 뿌리가 근본적으로 취약한 경제 구조가 되고 말았다. 

이처럼 자본축적이 미약한 상황에서 산업화가 추진된 결과 우리 기업들은 만성적인 자본 부족 상태에 빠지게 된다. 그 결과 우리 기업들은 지속적으로 원조자금이나 해외 차입금, 은행 차입금에 의존할 수밖에 없는 구조적 한계를 가지고 출발했다. 또 중소기업의 뿌리가 허약해 대기업 위주의 경제발전에 매달릴 수밖에 없는 상황으로 나가는 단서를 제공하게 된다. 


우리 나라 유일의 민족자본이었던 토지자본을 소유하고 있던 지주들이 6ㆍ25를 맞아 몰락해 가자 정부는 귀속 기업체 매수자가 타인 명의의 지가증권을 매입하여 이를 귀속기업체 인수 대금으로 지불할 수 있도록 제도를 고쳤다. 즉 지주가 아닌 제3자가 지가증권을 매입하여 귀속 기업체 매수에 참여할 수 있도록 문호를 개방한 것이다. 정부는 지가증권이 더 이상 부스러기 돈으로 공중분해되는 것을 막고, 산업으로 유도하기 위해 이 제도를 도입한 것이다. 


전시 인플레에 시달리고 피난살이의 와중에 생활비 해결에 애를 먹던 지주들은 지가증권을 액면가의 40%~80%로 처분하고 몰락해 갔다. 반면에 신흥 기업가들은 지가증권을 싼값에 매입하여 귀속재산 불하 대금으로 납입함으로써 손쉽게 산업 자본가로 도약하는 기회를 얻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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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세대 이지수씨의 연구 결과에 의하면 농지개혁 당시 20정보 이상의 농지를 분배당했던 호남지역 지주 418명을 조사한 결과 산업 자본가로 전업한 지주는 이 가운데 47명에 불과했다고 한다. 불과 11%의 지주만이 성공을 거두었을 뿐, 토지자본의 산업자본화라는 시대의 흐름에 편승한다는 것이 말처럼 쉬운 일은 아니었다. 


농지개혁 때 일반 보상으로 지급된 지가증권의 총 보상액 가운데 귀속재산 매입에 동원된 비율은 54%로 집계됐다. 전체 귀속 기업체 불하대금의 절반 정도만 지가증권으로 납입되어 산업자본화했고, 나머지 절반은 생활 자금, 소비 자금 등으로 부스러기 돈으로 흩어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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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이런 의견에 대한 반론도 적지 않다. 당시 우리 나라 지주 계층이 근대식 경영을 해 본 경험자가 거의 없었기 때문에 토지자본이 산업자본화 했다 해도 실제 경영은 불가능했을 것이란 의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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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면에 우리 나라는 사회 지도층이었던 지주와 양반 계급이 해방될 때까지 공업이나 산업의 개념이 무엇인지 인식조차 없었다. 해방 후에는 우리 나라 기업인이 창업한 기업 중 경성방직이 유일한 산업 시설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산업 수준이 보잘 것 없었던 것이 현실이다. 

이런 상황에서 농지개혁으로 지주들이 받은 지가증권을 산업자본화 하는 데 성공했다 해도 산업 시설 운영 능력이나 경영 능력이 없었기 때문에 제대로 성공할 수는 없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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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농지개혁은 우리 사회 전반에 엄청난 파장을 몰고 왔다. 지주계급은 대대로 토지를 세습했고, 소작인 계급은 대를 물려 소작인으로 존재함으로써 부익부(富益富) 빈익빈(貧益貧) 현상을 되풀이해 왔다. 그런데 하루아침에 지주 계급이 소멸됨으로써 뿌리 깊게 이어져 오던 지주-소작인, 즉 부자와 빈자(貧者)간의 갈등을 일거에 불식시킨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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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저 그 동안 지주들에게 갖다 바쳤던 소작료의 상당 부분이 농민 자신의 것이 되자 농민들은 늘어난 소득을 자녀교육에 집중 투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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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하여 반공주의자들이 된 농민들이 이승만의 장기 집권을 가능케 한 지방의 이승만 지지층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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