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상에 시달린 프란체스카 여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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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 남침으로 대구와 영천이 위기에 처하자 대구의 임시 경무대는 1950년 8월 18일 부산으로 이전했다. 경남도청이 임시 중앙청이 되었고, 무도관을 개조하여 국회로 사용했다. 부산의 임시 경무대는 항구를 향한 언덕 중턱에 있는 허술한 벽돌집이었다. 아래층은 자그마한 서재와 회의실 외에 두 개의 비서용 사무실이 있었고, 2층은 조그만 침실과 현관 쪽에 유리창이 있는 부인용 사무실이 있었다.

식사는 대개 서재에서 했다. 비서용 사무실에 오일 스토브가 하나 있었는데, 그것이 집 전체의 난방장치였다. 관저 주위에 공터가 있어 이 공터에 야채를 심어 대통령 내외의 식탁에 올렸다. 여름에는 뒤뜰의 조그만 나무 밑에 테이블을 놓고 그곳에서 회의도 하고 집무를 했다. 부산 임시 경무대에서는 양성봉 경남지사의 부인과 손원일 해군참모총장 부인이 살림을 도왔다.

이승만 대통령은 경남도지사 관사의 조그마한 방에서 집무했다. 너무나 초라한 집무실이어서 비서들이 민망할 정도였다. 대통령은 2층 다다미방에 경무대에서 가져간 다 헤진 융단을 깔고 침대와 응접세트를 차려 거실로 썼다. 스팀 장치가 되어 있는 집이 아니어서 난방은 석유난로로 했다.

1층 식당 옆에 있는 3평 남짓한 온돌방에 책상과 서가를 놓고 집무실로 썼다. 1층 응접실은 외국 손님을 접대하거나 국무회의 같은 회의가 있을 때 사용했다. 화장실이 재래의 한국식이어서 여간 불편하지 않았다. 비서들은 몇 번이고 화장실을 서양식으로 고쳤으면 했지만 이 대통령은 “그런데 쓸 돈이 어디 있느냐”고 반대하여 고치지 못했다.

부산의 임시 경무대는 연료 부족으로 난방을 못해 프란체스카 여사는 손발에 동상이 걸려 여기저기 부어올랐다. 당시 상황에 대한 프란체스카 여사의 기록이다.

‘대통령은 나에게 마늘껍질과 대를 삶은 물을 미지근하게 해서 손발을 담그도록 했다. 나는 그런 치료방법이 마음에 들지는 않았지만, 남편의 뜻에 따랐다. 그 당시 우리 부산 임시관저를 드나들면서 나에게 도와드릴 일이 없는지를 묻는 무초 미국 대사나 미국 장군들에게 부탁하면 동상을 치료할 약이나 연고를 쉽게 얻을 수도 있었다. 그러나 대통령은 외국인들에게 개인적인 신세를 지는 일을 몹시 싫어했기 때문에, 나는 마늘 대와 껍질 삶은 물에 손발을 담그는 민간요법으로 동상을 치료했다.’

부산의 대통령 관저를 방문한 김활란 당시 공보처장은 보일러 시설이 없는 실내에서 난로도 못 피우게 하여 온몸을 담요로 감싼 채 집무실에서 일하는 대통령을 보고 눈물을 글썽였다. 김활란이 “연세도 있으시니 난로는 피우고 일하셔야 감기 안 걸리십니다” 하고 권하자 이승만은 “다리 밑에서 떨고 있는 수많은 피난동포들을 생각하면 이것도 과분해” 하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