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게 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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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만은 고국으로 귀환하지 못하고 3년 여 동안 하와이에서 힘든 투병생활을 계속했다. 그는 날마다 국가를 위해, 민족을 위해 기도했다.

“하나님 저는 너무나 늙고 지쳤습니다. 사랑하는 우리 민족을 위해서 더 이상 아무 것도 할 수 없습니다. 우리 민족을 하나님께 맡깁니다.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게 하소서.”

이승만은 90세가 되던 1965년 7월 19일 자정을 조금 넘긴 시각, 망명지의 요양원에서 숨을 거두었다. 7월 21일 오후 4시 30분 하와이 호놀룰루의 한인기독교회에서 영결식이 거행되었다. 영결식장에는 이승만의 50년 친구 윌리엄 보스위크가 있었다. 그는 이승만이 임시정부 대통령에 취임하기 위해 상하이로 갈 때 중국인 노동자들의 관을 실은 배를 이용하여 밀항을 시켜준 사람이었다. 보스위크는 고인의 얼굴을 보고는 울부짖었다.

“내가 자네를 안다네, 내가 자네를 알아. 자네가 얼마나 조국을 사랑했는지, 자네가 얼마나 억울한지를 내가 잘 안다네. 친구여, 그것 때문에 자네가 얼마나 고생을 해 왔는지, 바로 그 애국심 때문에 자네가 그토록 비난받고 살아 온 것을 내가 잘 안다네. 소중한 친구여.”

영결식에는 인도주재 총영사인 임병직, 전 유엔군사령관 밴 플리트 장군 및 미국, 월남, 일본, 파키스탄 등의 대표가 참석했다. 그를 존경하던 미군 장군들이 추도사를 했고, 미군 의장대가 사열하고 조포 발사에 이어 진혼나팔이 울려 퍼졌다. 존슨 미국 대통령은 운구를 위해 미 공군 특별기를 제공했다. 영결식이 끝난 후 이승만 대통령의 유해는 하컴 미 공군기지로 옮겨졌다가 미군 의장대에 의해 C-118 특별기에 올랐다.

밴 플리트 장군은 14명의 영구 환국 호송요원으로 이화장에 왔다. 7월 23일 오후 김포공항의 유해 봉영식에는 3부 요인, 외교사절, 일반시민 등 5000여 명이 나왔으며, 이화장까지 이르는 길은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이승만 전 대통령의 유해는 1965년 7월 27일 오후 서울 동작동 국립현충원 공작봉 중턱에 안장됐다.

하관할 때 별안간 소나기가 내렸다. 그것은 한평생을 조국을 위해 살아온 인물의 죽음을 하늘도 슬퍼하여 눈물 같은 비를 뿌린 것이 아니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