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통령의 구멍 난 모자, 구겨진 국산 양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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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용삼 미래한국 편집장  dragon0033@hanmail.net


어느 날 이 대통령이 프란체스카 여사가 겹겹이 꿰맨 내복을 들고 방재옥에게 

“재옥아, 이 꿰맨 걸 나더러 또 입으란다”


이승만의 생애를 추적해 보면 청년 시절의 애국 계몽운동, 열강들과의 사력을 다한 외교 노력, 공산주의자들과의 투쟁 등 강직한 인물이라는 느낌이 든다. 시선을 돌려보면 그는 검소한 생활이 몸에 밴  청교도적 인물이었다. 

1945년 10월 16일, 33년 만에 귀국한 이승만은 미군정 사령관 하지 장군이 마련해준 조선호텔에 잠시 머물다가 10월 24일 서울 동소문동 4가 103번지, 조선타이어 사장이었던 장진영의 집을 빌려 2년 여 생활했는데, 이것이 돈암장이다.

돈암장에서는 이승만의 프린스턴 대학 후배이자 미국에서 독립운동을 도왔던 윤치영과 이기붕(서무담당), 윤석오(문서담당)가 비서로 일했고, 부인 프란체스카 여사가 귀국하기 전까지 임영신(중앙대학교 설립자)과 윤치영의 부인이 살림을 돌봤다. 

이승만과 미군정이 신탁통치 문제로 불편한 관계가 되자 입장이 난처해진 장진영이 집을 비워주었으면 좋겠다는 뜻을 전해왔다. 이승만의 거처가 마땅치 않자 하지 장군이 마포 언덕 위에 위치한 다나카 다케오(田中武雄) 조선총독부 정무총감의 여름 별장을 주선해 주었는데, 이것이 마포장이다. 

▲ 이승만 대통령은 옷이나 내의, 양말 등이 닳아서 해지면 꿰매 입을 정도로 검소한 생활이 몸에 밴 인물이었다.

목수 이승만 

마포장은 집이 협소하고 교통이 불편한데다가 언덕 위에 위치하고 있어 수돗물도 잘 나오지 않고 강바람이 세찼다. 이승만은 문짝이 잘 맞지 않고 공사해 놓은 것이 날림인 것을 보고 혀를 차며 “내가 한 것만도 못 하구만. 저 밖에 있는 나무 궤짝 좀 끌르게” 하고 윤석오 비서에게 지시했다. 

그 궤짝에는 이승만이 미국에서 쓰던 대패, 톱, 끌, 망치, 칼 등 연장이 가득했다. 작업복으로 옷을 갈아입은 이승만은 대패를 망치로 톡톡 쳐 맞췄다. 맞지 않는 문짝을 떼 자로 대어 줄을 긋고 대패질을 한 뒤 문 손잡이를 분해하여 고쳤다. 솜씨나 태도가 완전히 전문가였다. 

윤석오 비서가 “선생님, 미국서 목수노릇 하셨습니까?” 하고 물었더니 “내가 하와이에서 교포학교 지을 때 목수 일도 하고 돌층계도 쌓았다”고 대답했다. 그리고는 매일 부지런히 정원수를 다듬고 고목나무는 잘라 도끼질을 했다. 1년 이상 손을 안대 무성한 정원의 풀은 아무도 손대지 말고 그대로 두도록 엄명을 내렸다. 이 무성한 풀은 점심 식사 후 약 반시간씩 손으로 뽑아 한 달 만에 다 없애 버렸다. 

윤치영의 증언에 의하면 자신과 이승만이 하와이에서 활동하던 시절, 두 사람은 일당 1달러 50센트를 받고 농장에서 교민들과 함께 노동을 한 적이 여러 번 있었다고 한다. 이승만은 농사뿐만 아니라 어디서 익혔는지는 몰라도 목수 일, 미장이 일까지 못하는 일이 없었고, 솜씨가 대단해 모두가 감탄했다고 한다(윤치영, <윤치영의 20세기>, 삼성출판사, 1991, 90쪽). 

마포장은 여름 별장으로 쓰던 곳이라 바람이 심하고 추운 겨울을 지내기 쉽지 않았다. 바람이 심하게 부는 날이면 방에서도 외투를 입어야 할 정도였다. 이승만이 집 때문에 고생한다는 소식을 전해들은 실업인 30여 명이 모금을 하여 종로구 이화동 1번지 낙산 아래 저택 이화장을 구입했다.

이승만은 이화장에서 대한민국 초대 내각을 조각했고, 정부 출범 직후인 1948년 8월 18일 하지 장군의 관저로 사용되던 경무대(景武臺, 윤보선 대통령이 청와대로 개명)로 거처를 옮겼다. 

이승만이 대통령에 취임하면서부터 거주한 경무대는 변변한 가구조차 없었다. 이 대통령은 어려운 나라 살림을 감안하여 경무대 살림을 돌보는 직원을 두 명으로 줄였고 1층의 접견실과 사무실 2개, 2층의 침실 하나와 작은 식당, 거실을 제외하고는 폐쇄했다. 경무대의 농구 코트만한 연회장이 사용된 것은 1953년 한미상호방위조약 체결을 위해 방한한 덜레스 미 국무장관을 위한 만찬 때뿐이었다. 

대통령의 구겨진 양복 

이승만은 귀국 후 감리교회인 정동교회에 출석했다. 대통령이 된 후에도 항상 정동교회에 출석했는데, 1956년 1월 21일 정동교회 당회는 이승만을 명예장로로 선임했다. 

이승만은 부인 프란체스카 여사가 손수 기운 양말을 즐겨 신었으며, 하오에나 저녁에는 틈만 나면 붓글씨 연습을 했는데, 꼭 새 종이가 아닌 신문지나 쓰고 난 봉투를 뒤집어 사용했다. 

경무대 내실 근무자였던 방재옥은 이승만 대통령 내외는 나물 두 가지에 국 한 가지로 간소하게 식사를 했다고 회고한다. 프란체스카 여사는 경무대에 있을 때 미장원에 가지 않았으며 옷도 시장에서 천을 사다가 비서와 함께 블라우스를 손수 만들어서 입었다.

옷이나 속내의, 양말 등은 닳아서 해지면 꿰매서 입곤 했다. 어느 날 이 대통령이 프란체스카 여사가 겹겹이 꿰맨 내복을 들고 방재옥에게 “재옥아, 이 꿰맨 걸 나더러 또 입으란다”면서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경무대 2층으로 올라가는 계단 옆에는 몇 십 년 묵은 헌 중절모자와 구멍이 크게 뚫린 모자가 걸려 있었다. 이승만의 비서였던 박용만의 회고다. 

‘우리네 서민 가정에서도 이런 따위의 고물 모자라면 벌써 엿장수한테 넘겼거나 쓰레기통에 버렸을 것이다. 이와 같은 고물 모자가 몇 개씩이나 귀빈들이 출입하는 국가원수의 관저에 걸려 있다는 것은 퍽 조화되지 않았다.

그러나 누구도 이 고물 모자를 치워버리거나 없앨 수는 없었다. 대통령은 모자 하나를 몇 년이고 쓰다가 보기 흉해지면 버리지 않고 모아 놓았다가 등산할 때, 낚시할 때, 노동이나 운동을 할 때 이를 애용했다.’(박용만, <제1공화국 경무대 비화>, 내외신서, 1986, 87쪽.) 

건국 직후엔 우리나라 방직기술이 미숙해 국산 양복지의 품질이 형편없었다. 그래서 양복 입는 사람들은 마카오에서 수입한 영국제 복지로 양복을 해 입고 다녔다. 박용만이 소개하는 이승만의 양복에 대한 일화다. 

‘어느 날 대통령은 새로 만든 양복을 입고 중앙청으로 나가려고 차에 올랐다. 대통령을 모시려고 나도 급히 차에 탔다. 중앙청에서 내려 대통령 뒤를 바짝 따라가다 보니, 대통령의 새 양복은 마구 구겨져서 주름 투성이였고, 양복천을 훑어보았더니 조잡하기 짝이 없었다.

우리도 입지 않는 국산 양복을 대통령은 입고 계시다…. 대통령은 조잡하고 구겨진 국산 양복을 입고 있는데, 대통령의 가방을 들고 그 뒤를 따르는 나는 기름이 흐르는 고급 마카오 양복을 걸치고 있었으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