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 국가를 만년반석 위에 세우자"
- 제1대 대통령 취임사(1948년 7월 24일)



외국통상 비교 (1)-제국신문(1903. 3. 12)

관리자
2017-12-25
조회수 1710

외국통상 비교 (1)

 

 

제국신문 1903. 3. 12

 

 

우리나라 일은 범백(凡百)이 다 우리가 자작(自作)하여 보지 못하고 남이 대신하기도 하며 억지로 남을 주기도 하여 심지어 내 나라 소문도 여간 큰 관계는 우리나라 사람이 하나도 듣지 못하고 다 외국으로 먼저 나가서 일본, 청국에서 서양까지 퍼져 각 신문에 모두 반포되고 무수히 의논한 후에 그 신문이 다시 이리로 굴러 들어와야 우리가 보고 비로소 권래에 어느 때는 무슨 일이 있었고, 정부의 아무가 무슨 일을 어찌 의논하고 운동한 것을 소상히 알고 있으니 실로 편안하기 한량없다 하리로다.

 

나라마다 그 이해 관계있는 나라에는 정부에서 혹 정탐도 보내며 그 곳 공사로 하여금 비밀리에 그 정상을 채탐(採探)하기도 하며 그 백성들이 회(會)를 모으고 사람을 파송하여 내지와 궁중 일을 사실(査實 : 사실을 조사함)하며 혹 신문사에서들 사람을 약조하여 소문을 얻어 듣기도 하니 돈도 허다히 허비하며 인력도 무수히 들이고 아무쪼록 남보다 먼저 알고 먼저 방책을 정하여 남에게 잃지 않으려 하나니 이러므로 포대, 군대와 비밀 정책에 관계되는 곳은 항상 사람 내왕에 방한이 있어 임의로 통섭하지 못하는 바거늘 우리가 남의 사정을 탐지하기는 새로 내 나라 재정상 큰 관계도 백성이나 관원이 알지 못하여 외국신문을 보고야 알게 되니 이만치 편한 사람들의 사는 곳이 다시 어디 있으며 전국에 비밀한다는 데는 외국인 못갈 곳이 없고 본국 사람 못 보는 데와 못하는 것은 모두 외국인의 못가고 못할 것이 없는지라. 나라가 이렇게 개명하여 가지고 문호를 열어 놓아 피차에 등분이 없이 일체로 왕래를 통할진대 실로 상등국이라 할 터이나 그렇지 못하고 도리어 차서가 바뀌니 또한 이상한 일이로다.

 

상해 영자신문에 한국 상법비교표를 보고 하였는데 외국배로 한국 항구에 실어 들인 물화총액이 1892년(壬辰)에는 4,598,485원 어치요, 1897년(丁酉)에는 167,514원 어치요, 1901년(再作年)에는 13,025,407원이요, 외국으로 실려나가 물품은 1892년(壬辰)에 3,296,490원 어치요, 1897년(丁酉)에는 11,006,974이요, 1901년(재작년)에는 13,455,300원이라.

 

이 출구시킨 물화중에 종류를 구별할진대 1892년에는 각종물화는 2,443,739원 어치요, 금이 852,752원 어치요, 1887년에는 각종 물화는 8,973,895원이요, 금이 23,479원이요, 1901년에는 각종물화가 8,461,949원이요, 금이 4,903,351원이라. 그런즉 실어들인 것이 전후 아홉 해 동안에 9,427,995원이 늘었고 수출한 세액은 아홉 해 동안에 13,058,810원이 늘었는데 이것으로 출입을 다시 비교하면 740,002이 더한지라.

 

외국상업이 이렇게 되는 것은 다 수입 액수가 늘어난 연고요, 1901년에 해관세납 거둔 것이 1,325,414원이니 육 년 전에 비하면 21,220,045원이라 이 세납이 태반이나 수입한 물건에서 거둔 것인데 수입한 물품은 포목과 철물이 가장 많으며 양목으로 보아도 1900년에는 33,478필인데 일 년 동안에 79,238필에 이른지라. 이것이 자초로 영국직조소에서 실어 오던 것인데 지금까지도 여전히 가져오지만 일본에서 새로 직조하는 포목이 또한 대단히 흥왕한지라. 이로 보면 한국사람들이 의복을 모두 외국인이 만드는 것으로 쓰는데 돈을 허다히 실어내는 것을 보겠으며, 그외에 백동이 많이 들어왔는데 이는 다 황실의 주전 소용이요, 청국에서 짜는 포목, 주단 따위가 새로 많이 들어왔는지라. 기타 수출한 수요는 내일 연속하려니와 이상의 물건 출입함을 볼진대 나라가 어찌 점점 빈핍하며 백성이 더욱 곤궁하지 않으리오.[미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