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75.3.26  황해도 평산군 마산면 능내동에서 출생. 호는 우남(雩南).
아버지 이경선(李敬善,1839-1912), 어머니 김해 김씨(1833-1896) 사이에 3남 2녀중 막내로 출생하였으나, 손위의 두 형이 그의 출생 전에 사망했기 때문에 6대 독자가 됨. 양녕대군(태종의 장남)의 16대손이지만 대군이 세자 자리를 동생 충령대군(세종)에게 넘겨주었기 때문에 양녕대군파는 조선시대에 별로 빛을 볼 수 없었다. 게다가 이승만 자신은 가난하게 자랐기 때문에 조선왕조 자체에 대해 극히 비판적이었다.

1877 서울로 이사하여 남대문밖 염동, 낙동을 거처 도동의 우수현(雩守峴)에서 자람. 그 때문에 그는 지역적으로 서북파 보다는 기호파로 분류되는 것이 보통이다.

1879 퇴직 대신 이건하가 운영하는 낙동서당에 입학.

1885~1894 사간원 대사간직을 지낸 이근수(양녕대군 봉사손)의 도동서당에서 수학.
1895.4.2  (20세)신긍우(신흥우의 형)의 권유로 아펜셀러의 배재학당(培材學堂) 입학.

11.29  명성황후의 원수를 갚는다는 계획(춘생문 사건)이 탄로나 황해도 평산의 누이 집에 3개월간 피신.

1896.5  (21세)배재학당에서 서재필을 만나 서양 학문을 배움.  
 
11.30  배재학당에서 양홍묵 등과 함께 <협성회>를 결성하고 미국식 토론회를 통해 개화-구국운동의 방향을 찾음. 이승만은 서기, 회장을 맡음.


1897.7.8  (22세)배재학당 졸업식(방학예식)에서 졸업생을 대표해 ‘한국의 독립’이란 제목 으로 유창한 영어 연설을 함으로써 참석한 정부 고관들과 주한 외국 사절들로부터 극도의 칭찬을 받음.  

 

1898.1.1  (23세)양홍묵과 함께 한글판 주간신문「협성회회보」발간하고 주필을 맡음. 한국 최초의 현대시 “고목가(枯木歌)”를 실어 열강의 침략에 대한 국민의 경각심을 일깨우려 함.  

 

3.10  러시아의 이권 침탈을 규탄하기 위해 독립협회(獨立協會)가 종로에서 제1차 만민공동회를 개최하자 가두연설로 인기를 얻음. 외부대신에게 항의하는 총대(總代)위원으로 뽑힘.  


4.9  「협성회회보」를 한국 최초의 일간지인「매일신문」으로 발전시킴(사장 및 저술인의 직책을 맡음).  

8.10  이종일과 함께 한글 신문인「제국신문」을 창간(편집과 논설 담당).  

 

11.5  군주제를 폐지하고 공화정을 도입하려한다는 혐의를 받아 독립협회의 이상재, 남궁억 등 17인이 체포되자(익명서 사건), 이승만은 배재학당 학생 등 대중을 이끌고 경무청과 평리원(고등법원) 앞에서 철야 농성을 벌여 석방시키는 데 성공.  

 

11.21  만민공동회에서 연설하던 중 수구파들이 보낸 보부상 2천여 명의 습격을 받아 유혈충돌이 일어남.  

 

11.26  고종 황제가 독립협회를 달래기 위해 헌의6조의 실시를 약속하고, 이승만, 남궁억 등 50여명을 중추원 의관(종9품)으로 임명함.  

 

12.23  고종이 만민공동회 해체로 방향을 바꾸자, 미국인 의사 해리 셔먼의 집으로 피신.  

 

1899.1.9  (24세) 박영효 일파의 고종 폐위음모에 가담했다는 혐의로 체포됨(독립협회 사건).5년 7개월 간의 감옥 생활이 시작됨.  

 

1.17  이승만의 석방을 미국공사 알렌이 외부대신 박제순에게 요구했다가 거부당함.  

1.30  독립협회 동지 주시경(한글학자)이 몰래 건네 준 육혈포를 쏘며 동지 2인과 함께 감옥을 탈출했으나 곧 체포됨. 서상대만 중국으로 탈출 성공.  

 

7.11  평리원(고등법원) 재판장 홍종우에게 곤장 100대와 종신형을 선고받고 한성감옥서에 수감됨. 탈옥 동지 최정식은 처형됨.


1900.8  (25세) 한성감옥서에서 청일전쟁의 교훈을 다룬 중국책「중동전기본말」을 한글로 번역(1917년에 하와이에서「청일전기」라는 이름으로 출판됨).  

 

1901~1904.7  (26-28세) 옥중 생활 속에서도 가명으로「제국신문」과「신학월보」에 수시로 논설을 실음. 어린이 죄수들을 교육하고, 옥중도서실을 운영. 국민계몽서인「독립정신」의 원고를 완성(그것은 서양의 선진문명을 배워 부국강병을 이룩할 것을 백성에게 호소한 책으로써, 원고가 미국으로 몰래 반출되어 1910년 3월에 로스앤젤레스에서 출판됨).

1904.8.9  (29세) 러일전쟁이 일어나면서 특사로 감옥을 나옴(민영환, 한규설이 그의 사면을 위해 노력).  

 

10.15  남대문의 상동교회 상동청년학원 교장직에 취임했으나 미국으로 가기 위해 곧 사임.  

 

11.4  제물포항에서 미국으로 출국(독립보전에 대한 미국의 지원을 호소하기 위한 고종의 밀사 자격). 일본 고베를 거처 호놀룰루에 도착하여 윤병구 목사와 합류.  

 

12.31  샌프란시스코, 로스엔젤레스, 시카고를 거처 워싱턴디시에 도착,

1905.1.15  (30세) 「워싱턴포스트」지에 일본의 한국 침략을 폭로하는 인터뷰.  

 

2  워싱턴디시의「조지워싱턴」대학에 2학년 장학생으로 입학.  

 

2.20  한국에 선교사로 왔던 상원의원 휴 딘스모어의 주선으로 존 헤이 국무장관과 30분간 면담. 1882년의 ‘한미수호조약’의 거중조정 조문에 따라 협조하겠다는 약속을 받아냈으나, 헤이 장관의 죽음으로 허사가 됨.  

 

4.23  워싱턴디시의 커베넌트 장로교회의 류이스 햄린 목사로부터 세례를 받음.  

 

8.5  뉴욕 시 동쪽 오이스터베이의 사가모어힐 <여름 백악관>에서 윤병구 목사와 함께 시오도 루즈벨트 대통령을 잠시 면담하고 한국의 독립보전에 대한 지원을 요청.  

 

9.10  시종무관장 민영환으로부터 격려 편지와 함께 300달러의 경비를 지원 받음. 두 달 후에 민영환은 을사조약 체결에 분개하여 자결함.  

1907.6.5  (32세)「조지워싱턴」대학 콜럼비아 학부를 졸업.  

 

6.23  워싱턴포스트」지에 이승만이 YMCA에서 했던 연설기사가 실림.  

 

7.25  「에드베리 파크」「뉴욕모닝포스트지」에도 인터뷰기사가 실림.  

 

8.1  헤이그 만국평화회의에 참석했다가 연해주로 돌아가는 이상설을 뉴욕에서 만남.

9  「하버드」대학 석사과정 입학. 1908년에 수료했으나 안중근의 이등박문 암살 사건과 전명운의 스티븐스 암살 사건으로 친일적인 미국인 교수들로부터 냉대를 받게 됨. 학업을 계속하기 어려워 석사학위는 1910년 2월에 가서야 받게 됨.  

 

1908.7.10-15  (33세) 콜로라도 주 덴버에서 열린 애국동지대표자대회(The Korean Patriots' Delegation Convention)에서 의장으로 선출됨. 스탠포드대학 총장 데이비드 스타 조단의 개회사. 「덴버 리퍼블리칸」지가 이 대회를 자세히 보도.  

 

9  프린스턴대학 박사과정에 입학하여 정치학과 국제법을 공부. 지도교수인 우드로 윌슨 총장(나중의 대통령) 가족과 친밀한 관계 유지.  

1910.7.18  (35세) 「프린스턴」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음. 그의 학위논문 ‘미국의 영향을 받 은 영세중립론’은 1912년에 프린스턴 대학출판부에서 출간됨.  

 

9.3  국권을 빼앗긴 조국으로 돌아오기 위해 뉴욕 항을 출발.  

 

10.10  (35세) 귀국 (리버풀,런던,파리,베를린,모스크바,만주를 거처 서울역에 도착, 5년11개월 6일 만의 귀국).  


1910~1912.3.26  (35-37세) 서울 기독청년회(YMCA)의 한국인 총무와 청년학교 학감에 취임하여 교육, 전도 활동. 존 모트의 <신입학생 인도>를 번역해 출판. 37일 동안(1911.5.16 ~ 6.21)의 전국순회전도 여행 중에 개성에서 윤치호가 세운 한영서원(송도고등학교)에 들러 제2회전국기독학생 하령회(夏令會)에 참석.  

 

1912.3.26  (37세) 다시 미국으로 망명(1년5개월의 한국 생활을 마감). ‘105인 사건’에 뒤 이은 체포 위협이 있자, 미네아폴리스에서 열릴 ‘국제기독교 감리회 4년 총회’의 한국 평신도 대표로 참석하도록 선교사들이 주선함으로써 체포를 면함.  

 

5.1  일본, 캐나다, 미국의 시애틀을 거처 미네아폴리스의 감리교 총회에 참석.  

 

6.19  은사인 우드로 윌슨(당시 민주당 대통령 후보)을 뉴저지의 시거트 별장에서 만나 한국의 독립 지원을 호소(그 후 두 차례 더 만남). 윌슨의 추천서를 가지고 워싱턴 등지를 다니면 한국의 독립을 호소.  


11.28  「워싱턴포스트」지에 인터뷰 기사 실림.

1913.2.3  (38세) 하와이에 정착. 105인 사건을 폭로하는 「한국교회 핍박」을 출간.  


8  하와이 미 감리교회가 운영하는 ‘한인기숙학교’의 교장직을 맡음. 한국어와 한문을 새로 가르치고 학교 이름도 ‘한인중앙학원’(韓人中央學院)으로 바꿈.  


9.20  월간「태평양잡지」창간(나중에 ‘태평양주보’로 제호를 바꿈).  

 

1914.7.29  (39세) ‘한인여자(성경)학원’을 설립.  

 

1915.5  (40세) 하와이 대한인국민회의 재정문제를 둘러싸고 박용만과 충돌. 박용만은 몇 년 뒤에 중국으로 활동무대를 옮겼다가 그의 행동을 오해한 한인에 의해 피살됨.  

 

6  ‘한인중앙학원’을 미국 감리교 선교부로부터 독립시킴.  

 

1917  (42세) 호놀룰루에서 ‘독립졍신’(제2판)과 ‘청일전기’를 출판.  

 

10.29  뉴욕에서 개최된 25개 약소 민족대표회의에 한국대표로 참석.  

1918.7.29  (43세) 호놀룰루에 ‘신립교회’ 창설,  

 

9  ‘한인여자(성경)학원’을 남녀공학의 한인기독학원(The Korean Christian Institute) 으로 바꿈.  

 

12.1  정한경, 민찬호와 함께 <대한인국민회>의 파리 평화회의 한인대표로 선출됨.  

 

12.23  ‘신립교회’의 이름을 한인기독교회(The Korean Christian Church)로 바꿈.  

 

1919.1.6  (44세) 파리 평화회의에 참석하기 위해 미주 본토를 향해 호놀룰루 출발. 로스앤젤레스에서는 안창호를, 필라델피아에서는 서재필, 장택상, 민규식 등을 만나 독립 추진 방략을 논의.  

 

3.3  파리 평화회의에 기대할 것이 없어 보이자, 정한경의 제의에 따라 장차 완전독립을 전제로 한국을 국제연맹의 위임통치 하에 둘 것을 윌슨 대통령에게 청원. 그러나 이것은 급진파 독립운동가들로부터 맹렬히 비난을 받게 됨.  

 

3.5  파리 행 여권 발급이 불가능하다는 통보를 미 국무부로부터 받음.  

 

3.10  서재필로부터 국내에서 3.1운동이 일어났다는 소식을 들음.  

 

3.21  노령(러시아령) 임시정부에서 국무경(국무 및 외무총장)으로 추대됨(대통령 손병 희, 부통령 박영효). 이승만은 그 사실을 4월5일에 알게 됨. 4.7 국무경 자격으로 UP통신과 회견.  

 

4.11  상해임시의정원이 이승만을 국무총리에 추대(이승만은 4월15일에 알게 됨).  

 

4.12  하와이에서 독립선언식 거행.  

 

4.14-16  서재필, 정한경과 함께 필라델피아 시내 ‘소극장’에서 한인대표자대회(The First Korean Congress)개최를 개최하고 인디펜던스홀까지 행진. 대회에는 필라델피아 시장을 비롯한 저명인사들이 참석.  

 

4.23  서울에서 13도 대표들이 국민대회를 열고 한성임시정부(漢城臨時政府) 수립을 선포하고 이승만을 집정관총재로 추대(이승만은 이 사실을 5월말에 알게 됨).  

 

4.23  워싱턴디시에 대한공화국(The Republic of Korea) 활동본부 설치.  

 

6.14~27  ‘대한공화국’ 대통령 이름으로 미국, 영국, 프랑스, 이탈리아, 일본의 국가원수들 과 파리 평화회의 의장 조르쥬 클레망소에게 한국의 독립선포를 알리는 공문 발송.

6.27  파리에서 외교활동중인 김규식 대표에게 정부훈령을 보냄.  

 

7.4  국ㆍ내외 동포에게 독립을 위한 헌신을 촉구하는 ‘대통령 선언서’ 발표  


7.17  워싱턴디시에 ‘대한공화국’ 임시공사관 설치.  

 

8.15  호놀룰루에서 대한독립혈젼긔(大韓獨立血戰記) 발간.  

 

8.16  대한인국민회가 이승만의 집정관 총재 추대 축하식 거행.  

 

8.25  워싱턴디시에 ‘구미위원부’를 열고 김규식을 위원장으로 임명함. 9월에 ‘임시정부 구미위원회’로 이름을 바꿈.  

 

9.1  재정확보를 위해 김규식과 공동명의로 임시정부 공채(公債) 발행.  

 

9.6  상해 임시정부 의정원에서 ‘임시대통령’으로 선출.  

9.19  필라델피아에서 서재필과 함께 1주일동안 전체한인회의를 개최. 필라델피아시장 토마스 스미스, 상원의원 S. D 스펜서 등의 저명인사들이 참석. 그들의 연설문은「미국의회의사록」에 수록됨.  

 

9.19  이승만의 고문 변호사 프레드 돌프의 한국독립 지지 논설이「미국의회의사록」에 게재됨. 


1919~1920.6  미국 각지를 순회하며 ‘대한공화국’ 지지 호소 강연.  

 

1920.3  (45세) 서재필과 함께 찰스 토마스, 존 쉬로스 미 상원의원으로 하여금 한국독립승인 안을 미 의회에 상정케 함. 상원 본회의에서 아일랜드 독립지지안과 함께 상정되었으나 34:46으로 부결됨.  

 

11.15  상해 임시정부 임시대통령직에 부임하기 위해 호놀룰루 항에서 비서 임병직과 함께 몰래 화물선에 오름. 일본이 30만 달러의 체포 현상금을 걸었기 때문에 중국인 시체를 넣은 관 속에 숨어 있었음.  

 

12.5  상해에 도착하여 미국인 안식교 선교사 크로푸트 목사 집에서 기거.  

 

12.28  상해 임시정부청사에서 초대대통령 취임식. 5개월간 집무했으나 독립운동가들의 노선 갈등으로 크게 시달림.  

 

1921.5.29  (46세) 워싱턴 군축회의 개최 예정 소식이 들리자, ‘외교상 긴급과 재정상 절박’ 때문에 불가피하게 떠난다는 ‘고별교서’를 발표하고 상해를 출발.  

 

 6.29  호놀룰루 도착. 민찬호 등과 함께 자신을 지지할 대한인동지회(大韓人同志會) 조직.  

 

 8.27  워싱턴 군비축소회의(태평양회의)에 참석하기 위해 상해 임정의 전권대사 자격으로 워싱턴디시에 도착(부대사 서재필, 서기 정한경, 고문 프레데릭 돌프).  

 

 10.10~12.1  워싱턴군축회의 미국 대표단에게 ‘한국독립청원서’ 제출. 대한민국의 승인을 요청하는 법률고문 프레데릭 돌프의 글이「미국의회사록」에 수록됨.  

1922.1.25  (47세) ‘군축회의에 드리는 한국의 호소’ 속편 발표.  

 

 3.22  이승만 지지자들이 ‘대한인국민회 하와이 지방총회’를 ‘하와이 대한인교민단’으로 이름을 바꿈.  

 

1923.6  (48세) 학생고국방문단(남학생 12명 여학생 8명)을 2개월간 한국에 파송, 전국 각지를 돌며 야구시합과 공연을 갖고 3,600 달러를 모금해 하와이로 돌아옴.  


1924.1~10.25  (49세) 미국본토 방문. 임영신으로부터 관동대진재(關東大震災)때 일본인의 만행 자료를 얻음. 로스앤젤레스에서 파나마운하를 거쳐 워싱턴 에 도착.  

 

11.23  ‘대한인동지회’의 종신총재로 추대됨.  

 

1924.1~10.25  (49세) 미국본토 방문. 임영신으로부터 관동대진재(關東大震災)때 일본인의 만행 자료를 얻음. 로스앤젤레스에서 파나마운하를 거쳐 워싱턴 에 도착.  

 

1925.3~4.10  (50세) 상해 임시정부가 오랫동안 자리를 비웠다는 이유로 이승만을 임시대통령에서 면직하고 구미위원부 폐지령을 발표. 그러나 이에 불복해 이승만은 구미위원부를 계속 운영.  

 

1928.4.10  (53세) 구미위원부에서「재만동포옹호」팜플렛 발표


1929~1930.1.8  (54세) 미국 본토 전역을 방문. 호놀룰루로 돌아 온 후 ‘태평양잡지’를 ‘태평양주보’로 이름을 바꾸어 다시 발간하기 시작.  

1932.11.10  (57세) 대한민국임시정부에 의해 국제연맹에 한국독립을 탄원할 전권대사로 임 명됨.  

 

1932.12~1933.1.26  국제연맹 본부가 있는 제네바에 도착(리버풀,런던,파리 경유).  

 

1933.1.26  (58세) 프랑스어 일간신문「주르날 드 제네바」에 인터뷰 기사 실림.  

 

 2.8  독립을 요구하는 공한(公翰)을 국제연맹 회원국 대표들과 기자들에게 배포.  

 

 2.16  「국제연맹」 방송시설을 통해 극동분쟁과 한국에 관해 연설.  

 

 2.21  제네바의 호텔 드뤼시 식당에서 아내가 될 프란체스카 도너(Francesca Donner) 양을 만남.  

 

 2.22  제네바의 프랑스어 신문「라 트리뷴 도리앙」지에 독립운동 기사가 실림.  

 

 2.23  베른의 독일어 신문 「데르·분트」도 활동 상황을 실음.  

 

 7.9-20  소련에게 독립지원을 호소해 보고자 모스크바 기차역에 도착하였으나(비엔나 경유) 즉시 퇴거당함.  

 

 8.10-16  프랑스 니스를 출발하여 뉴욕에 도착. 10월에 호놀룰루로 돌아옴. 

1934.1.12  (59세) 워싱턴의「데일리뉴스」지가 이승만의 활동을 보도.  

 

 7.22  미 국무부의 정치고문 스탠리 혼벡 박사 면담하고 독립호소.  

 

 9.16  장기영과 함께 몬태나의 뷰트 방문.「몬타나 스탠다드」지가 기사 게재.  

 

 10.8  뉴욕 랙싱턴 가(街)의 호텔 몽클래어에서 프란체스카 도너와 결혼.  

 

 1935.1.24  (60세) 부인과 함께 호놀룰루에 도착.「스타불리틴」지에 만주 한국인도 독일의 자르 지방인들처럼 민족자결의 원리에 따라 지위가 결정되어야 한다는 호소문을 실음.  

 

 1938.4.24  (63세) 호놀룰루 시 릴리하 가(街)에 ‘한인기독교회’ 건물 낙성.  

 

 1939.3.30  (64세) 제2차 대전의 발발 가능성이 보이자 워싱턴디시에서 구미위원회 활동을 다시 시작하기 위해 호놀룰루 출발.  

 

 8.30  한국인과 중국인이 국제정세에 대해 몽매한 것을 한탄하며 한국의 독립에는 미국의 지원이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임을 강조하는 편지를 김구에게 보냄.  

 

 12.10  「워싱턴포스트」지와 인터뷰에서 이청천 장군의 독립운동을 알림. 

 1941.4.20  (66세) 호놀룰루에서 9개 단체가 모인 ‘재미한족연합위원회’에서 외교위원장으로 임명됨.  

 

 6.4  대한민국임시정부로부터 ‘주미외교위원부’ 위원장으로 임명됨.  

 

 6  뉴욕에서 일본의 미국 침공을 경고하는「일본내막기(Japan Inside Out」를 출간, 12월에 진주만 기습공격이 일어나자 그 책은 베스트셀러가 됨.  

 

 12.9  미국과 일본이 전쟁을 시작하자 미 국무부 정치고문 스탠리 혼벡 박사, 대통령 루즈벨트, 국무장관 코델 헐에게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선전포고문과 임시정부 승인 요구 공한(公翰)을 전달함.  

 

 1942.1.2  (67세) 미 국무부의 실세인 알저 히스와 면담. 소련의 한반도 점령 의도를 설명하 고 미국의 대응책을 제안했다가 나중에 소련 간첩으로 판명된 알저 히스로부터 호되게 모욕을 당함.   


1.16  미국인들로 한미협회(The Korean-American Council)을 창설. 미국의회 상원 원목인 프레데릭 해리스(이사장), 전 캐나다 대사 제임스 크롬웰(회 장), 언론인 제이 제롬 윌리엄스, 변호사 존 스태거즈가 중심인물. 임시 정부 승인과 무기지원을 목표로 활동.  

 

2.27  미 국무장관 코델 헐에게 자신의 신임장과 임시정부의 공한을 제출. 


2.27-3.1  워싱턴디시의 라파옛 호텔에서 한인자유대회(The Korean Liberty Conference) 개최. 이승만이 이끄는 한미협의회와 재미한족연합위원회가 공동 주최함.  

 

 3.23  미 국무장관 코델 헐에게 임정 승인을 요청.  

 

 5.5  이승만 후원조직인 ‘한미협의회’ 회장 제임스 크롬웰이 국무장관 코델 헐에게 임정 승인을 촉구.  

 

 6-7  미국의 소리(VOA) 초단파 방송망을 통해 고국 동포들의 투쟁을 격려.  

 

 9.30  미 육군전략사무처(OSS)의 로센봄 중위, 국무부 차관보실의 로스토우를 만나 중국내 한인 게릴라 부대 조직 문제를 협의.  

 

10.10  미 육군전략사무처(OSS) 프레스톤 굳펠로우 대령에게 항일 게릴라 조직 제의.

10 한국인 선발요원 50명의 명단을 OSS에 통보.  

 

 12.4  12명이 선발되어 군사훈련을 받기 시작.  

 

 12.7  루즈벨트 대통령에게 한국인 군사훈련에 대한 지원을 요청하는 서한을 보냄.  

 

 12.31~1943.2.16  미 국무장관 코델 헐이 만나 주지 않자, 만약 미국정부가 임정을 승인하지 않으면 전후 한반도에 친소 공산정권이 수립될 것임을 편지로 경고.  

 

 1943.2.17  (68세) 미 육군장관 헨리 스팀슨에게 편지로 항일 게릴라 조직계획서를 제시.  

 

 3.30  육군장관에게 하와이 한인동포들을 일본인과 같은 적성국민으로 대하지 말 것을 요구하는 서한을 보냄. 육군장관으로부터 다르게 취급하겠다는 회신을 받음.  

 

 5.15  미 대통령 루즈벨트에게 극동에 대한 소련의 야욕을 상기시키고 임정 즉각 승인과 무기 지원을 요청하는 서신 발송.  

 

 8.23  제1차 퀘벡 회의에 참석한 루즈벨트 대통령과 처칠 영국 수상에게 전보로 임정 승인과 군사지원을 요청.  

 

 8  한미협회와는 별도로 기독교인친안회(The Christian Friends of Korea)를 조직. 한국 의료선교사 애비슨, 아메리칸대학 총장 폴 더글러스 등이 중심인물. 임시정부 승인과 무기지원을 목표로 활동.  

 

12  이승만을 지지하는 대한인동지회가 재미한족연합위원회에서 탈퇴.


12.19-22 가이 질레트 상원의원으로부터 임정 승인이 불가능하다는 서한을 받자, 몇 몇 동지들과 함께 항의 방문.  

 

 1944.8.21  (67세) 루즈벨트 대통령에게 편지로 임정 승인 촉구.  

 

 9.11  제2차 퀘벡 회의에 참석한 루즈벨트와 처칠에게 카이로 선언문의 문제점을 지적하고 일본 패망 후 한국의 즉각 독립을 요구하는 전보를 보냄.  

 

 10.25  루즈벨트 대통령에게 편지로 임정 승인을 촉구.  

 

 11  미 체신부가 태극기 마크가 그려진 미국 우표 발행.

1945.2.5  (70세) 미 국무차관 조셉 그루에게 한반도에 공산정권을 수립하려는 소련의 야욕 을 막는 방법으로 임정의 즉각 승인을 촉구하는 전보를 보냄.  

 

 3.8  미 국무장관 에드워드 스테티니우스에게 4월에 열릴 샌프란시스코 유엔 창립총회에 임정 대표를 초청하도록 요구.  

 

 3.9  루즈벨트 대통령 부인 엘리노어 여사를 부인 프란체스카 여사와 함께 면담.  

 

 5  유엔 창립총회에 참석하려는 한국인들에게 중국의 외교부장 송자문(쑹쯔원)이 좌우합작을 주장한 데 대해 맹렬히 반대.  

 

 5.14  얄타 회담에서 미국과 영국이 한국을 소련의 지배로 넘겨주기로 비밀협약이 이루어졌다는 주장을 발표함으로써(얄타밀약설) 미 국무부와 충돌.  

 

 8.15  해방. 즉각 귀국하려 하였으나 반공주의자 이승만을 기피인물로 여기는 미 국무부의 방해로 2개월간 지연됨.  

 

 10.16  33년만의 귀국(김포 비행장 도착). 조선호텔에 투숙. 다음날 귀국 담화 방송.  

 

 10.21  허헌, 이강국 등 좌익들이 이승만을 방문하고 인민공화국 주석 취임을 요청.  

 

 10.24  숙소를 돈암장(敦岩莊)으로 옮김.

10.25  조선독립촉성중앙협의회 총재직을 맡음.  

 

 10.31  돈암장에서 박헌영과 회담  

 

 11.3  이승만의 통일안에 대해 공산당이 반대성명.  

 

 11.21  공산당에 대한 입장을 밝히는 방송.  

 

 12.16  공산주의자들의 파괴행동에 경계가 필요하다는 방송.  

 

 1946.1.14  (71세) 신탁통치를 찬성하는 공산주의자들을 매국노로 규정하고 결별 선언.  

 

 2.8  조선독립촉성중앙협의회와 신탁통치반대국민총동원위원회를 통합한 대한독립촉성국민회(大韓獨立促成國民會) 총재가 됨.  

 

 2.25  미 군정청 자문기구인 남조선대한민국대표 민주의원(民主議院) 의장으로 선출됨.  

 

 3.25  프란체스카 여사 서울 도착.  

 

 5.11  지방 인사들이 자율정부 수립을 갈망한다고 언명.  

 

 6  하지 장군의 좌우합작위원회 참가 권유를 거부.  

 

 6.3  전북 정읍에서 남한임시정부 수립의 필요성을 역설.  

 

 6.29  독립정부 수립의 권리를 쟁취하기 위한 민족통일총본부(民族統一總本部) 결성.  

 

 8.14  미 트루먼 대통령에게 카이로 선언의 이행을 촉구하는 전문 발송.  

 

 9.10  독립정부 수립 문제를 미소공동위원회로부터 유엔에 넘길 것을 요구하기 위해 임영신을 미국에 파송.  

 

 9.12  돈화문 앞에서 공산주의자의 권총저격을 받음.  

 

 10.28  카이로 선언과 포츠담 선언에 위배되는 모스크바 3상회의 결정을 취소하라고 성명.  

 

 12.2  독립정부 수립을 UN에 직접 호소하기 위해 동경을 거처 미국으로 출발.  

 

 12.12  소련이 한국의 통일정부 수립을 허용하지 않을 것이 확실하므로 남한에서 만이라도 과도정부 수립이 필요하다고 주장.

1947.3.10  (72세) 미 정부 관계자로서는 유일하게 힐드링 국무차관보가 이승만의 독립정부 수립 안을 지지하는 발언.  

 

 4.1  귀국하기 위해 워싱턴디시 출발. 출발 전에 미 국무부로부터 귀국 방해를 당함.  

 

 4.13  동경을 거처 상해에 들러 장개석(蔣介石) 총통과 회견.  

 

 4.21  이승만의 귀국을 환영하는 성대한 국민대회 개최.  

 

 5.24  우익 59개 단체가 이승만의 신탁통치 반대 입장을 지지.  

 

 7.3  좌우합작을 주장하는 하지 중장과의 협조포기 선언. 가택연금을 당함.  

 

 9.16  독립정부 수립을 위한 수단으로 남한 총선거를 주장. 소련의 진의를 파악하게 된 미국 정부가 이승만의 주장에 동조하기 시작.  

 

 9.21  이청천(李靑天)이 단장으로 있는 대동청년단의 총재로 취임.

10.18  독지가들의 모금으로 마련된 이화동의 이화장(梨花莊) 사저에 입주.  


11.14  유엔총회에서 유엔감시하의 한반도 자유선거 실시를 가결.


1948.1.8  (73세) 유엔한국 임시위원단 한국 도착. 이승만은 환영군중대회에서 연설. 위원단 단장 메논(인도)이 북한과의 좌우합작을 요구하는 발언을 시작하자 즉각 대회장을 박차고 퇴장함.  

 

 1.23  유엔한국임시위원단의 북한 입국을 유엔소련대표 그로미코가 거부.  

 

 3.30  선거 연기설을 비난.  

 

 4.1  김구와 김규식의 남북협상은 소련의 목적에 동조하는 것이라고 담화.  

 

 5.10  최초의 자유총선거(5.10선거)에서 지역구인 동대문구에서 당선.  

 

 5.31  제헌의회 의장으로 선출됨.  

 

 6.16  헌법기초위원회에 참석하여 대통령책임제 의사를 강력히 전달.  

 

 7.20  국회에서 대통령으로 당선됨(186명 출석 가운데 180표 획득).  

 

 8.11  파리 유엔총회에서 대한민국 승인운동을 펼칠 한국대표단 파견 (장면, 장기영, 김활란)  

 

 7.24  대통령 및 부통령 취임식.  

 

 8.15  대한민국 정부수립 선포식. 파리에서 열릴 유엔총회에서 승인을 받기 위한 총력 외교에 돌입. 그러나 승인 가능성은 매우 불투명.  

 

 8.26  한미상호방위원조 협정 체결.  

 

 9.30  대통령 시정방침 연설.  

 

 10.8  미군철수 연기 요구.  

 

 10.13  40여명의 친북 소장파 국회의원들이 외국군(미군) 철수 긴급 동의안 제출.  

 

 10.19  맥아더 주일 연합군 최고사령관의 초청으로 일본 방문  

 

 11.6  여수순천반란 사건에 따른 국가위기를 맞아 수습책을 국회에서 발표.  

 

 11.26  미군 계속 주둔 요청.  

 

 12.12  파리 유엔총회 마지막 날 마지막 시간에 간신히 대한민국 승인안이 통과됨. 대한민국의 와해 모면.  

 

 12.18  국회 폐회식에서 이북 도지사 임명 언명.  

1949.1.6  (74세) 민족청년단(단장 이범석)을 해산하여 대한청년단에 통합하도록 지시.  

 

 1.7  일본에 대한 배상금을 요구할 것이라고 언급.  

 

 1.8  대마도 반환 요구 기자회견  

 

 1.9  반민특위의 친일파 처벌에 신중해야한다고 담화.  

 

 2.18  유엔기구가 북한과 협상하는 데 대해 반대.  

 

 3.23  필리핀 퀴리노 대통령이 제안한 반공적인 태평양동맹안 지지.  

 

 5.20  대일배상요구 관철 주장.

 6.9  일본의 어업구역 확대에 반대 성명.

7.1  한국에 대한 미국의 추가 원조 요청.  

 

 7.20  반공적인 태평양동맹의 체결 협의를 위해 퀴리노 필리핀 대통령, 장개석 총통을 초청.  

 

 8.8  이승만-장개석 진해 회담.  

 

 10.18  대통령관저에 폭발물 장치 사건 발생.  

 

 10.28  일본과의 강화조약 체결까지 임시통상협정을 체결할 용의가 있다고 언명.  

 

 11.26  남북통일방안으로 북한 괴뢰정부 해체후의 총선거를 주장.  

 

 11.29  귀속재산인 일본인 주택 방매 담화.  

 

 12.16  군사원조에 비행기 포함을 미국에 요청. 


1956.1.14  (81세) 정부기구축소 조속 실천 시달.  

 

 2.5  헌병 총사령부내에 김창용 중장 피살사건 전담 수사본부 설치를 지시.  

 

 2.13  일본의 공산국가들에 대한 타협정책에 경고.  

 

 2.21  국회 연설에서 판사의 월권행위에 유감표명.  

 

 3.5  자유당전당대회에서 대통령 후보로 지명되자 불출마 서한 전달.  

 

 3.9  전국 각지에서 이 대통령 3선 출마 호소 궐기대회(자유당, 국민회, 애련, 노동조합 등이 주최).  

 

 3.13  이승만 재출마를 요구하는 대한노총의 정치파업.  

 

 3.15  이 대통령 재출마 요청 궐기대회(자유당 국민회 애련 노동조합 등이 주최).  

 

 3.17  덜레스 미 국무장관의 한국 방문. 이 대통령과 통일방안 협의.  

 

 3.25  공보실 통해 재출마 결의 담화.  

 

 3.30  학도징집보류 전폐 등 국민 개병의 원칙 표명.  

 

 4.12  선거전에 친공적 협상안과 친일적 협상안을 내세워서는 안 된다고 언명.  

 

 5.12  휴전협정 조속 폐기 촉구 담화.  

 

 5.22  이승만(자유당)의 대통령 당선 공고. 부통령은 장면(민주당).  

 

 6.25  6.25동란은 미국의 오판에서 일어났고 중공군 철수가 통일의 선행조건임을 강조.  

 

 7.8  환율 고수 및 공무원 감원 단행 담화.  

 

 7.26  휴전협정은 이미 사문화되었음을 강조.

 8.15  제3대 대통령에 취임.  

 

 8.16  첫 국무회의에서 군비 증강과 경제 부흥 강조.  

 

 9.1  미국의 극동정책은 패배주의와 유화주의로 전락했다고 비판.  

 

 9.13  유엔가입을 적극 추진하도록 임병직 대사에게 훈령.  

 

 9.17  기자회견에서 야당의 지나친 반정부적 태도를 비난.  

 

 9.22  대통령령으로 10월 1일을 국군의 날로 공포.  

 

 9.30  한일관계 개선 조건으로 한국에 대한 재산권 청구 철회를 일본에게 요구.  


11.4  동해안 시찰 도중 이북동포 구출 태세를 갖추어야 한다고 강조.  

 

11.7  소련에 항거한 헝가리 국민을 돕겠다는 의사 표명.


1957.1.6  (82세) 휴전협정 폐기와 군비강화 강조.   


3.21  82회 탄신기념일을 맞아 우남장학회 발족.  

 

 3.23  제주도 송당목장 시찰  

 

 3.26  국회의장 이기붕의 장남 이강석을 양자로 맞음.  

 

 3.28  미국과 서방측의 중동문제 치중에 경고.  

 

 4.2  유도탄 도입 등을 포함한 군사력 증강 역설.  

 

 4.19  김창룡 중장 암살 배후인물인 강문봉 중장에 대한 처벌을 무기징역으로 감형.  

 

 4.20  통화발행 억제와 정부기구 축소 지시.  

 

 5.14  공산주의의 위협을 경고.  

 

 6.15  로이터 기자회견서 한국군 군비 현대화 재강조.  

 

 6.17  서방측이 소련과 군비축소 타협에 이르는 것은 자살 행위라고 경고.  

 

 6.19  UP기자와의 서면 회견에서 북한의 남침 위험성을 경고.  

 

 7.28  휴전 4주년을 맞아 휴전협정은 무효라고 선언.  

 

 8.21  미국이 한국군을 감축하려면 현대장비를 지원해야 한다고 주장.  

 

 8.22  미국의 오키나와 영유가 타당함을 언명.  

 

 9.23  공산군의 재 남침 기도에 대하여 경고.  

 

 10.21  한국에 대한 미국의 경제원조 삭감에 경고.  

 

 12.3  한글전용을 국무회의에서 지시.

1958.1.1  (83세) 이북동포에게 메시지.  

 

 1.21  일본에 대한 경계심을 강조.  

 

 2.23  유엔군 철수 불가 성명.  

 

 3.8  북한에 납북된 KNA 민간여객기 기체 송환을 요구.  

 

 3.28  일본 기시(岸信介) 수상의 한일회담 재개 요망 친서에 동의.  

 

 3.31  미국 기자와의 회견에서 인도차이나에 한국군 파견용의 표명.  

 

 4.26  멘델레스 터키 수상에 대한민국 1등 건국공로훈장 수여.  

 

 5.19  일본 수상의 특사를 면담.  

 

 6.29  AP기자의 서면질문에서 유엔 감시 하의 북한 선거를 주장.  

 

 8.5  외신 기자와의 서면회견에서 국군 감축에 반대하고 장비 현대화를 강조.  

 

 8.29  아시아의 집단안전보장체제를 강조. 대만에 유재흥 연참총장을 특사로 파견.  

 

 9.13  대만과 중공의 충돌 사태(금문도-마조도 사태)에 대한 미국의 태도를 지지.  

 

 10.28  원자력 연구 지시.  

 

 11.1  운크라 업적을 찬양하는 서한을 유엔 사무총장에 발송.  

 

 11.1  운크라 업적을 찬양하는 서한을 유엔 사무총장에 발송.  

 

 11.5  월남대통령의 초청으로 베트남 방문.  

 

 12.12  CBS기자에게 UN군 철수 불가, 국가보안법의 필요성을 언명.

1959.1.1  (84세) 북한동포들에게 방송을 통해 위로.  

 

 1.5  국가재산의 효율적 운영 지시  

 

 1.26  외신기자와의 면담에서 일본에게 문화재 반환을 요구.  

 

 2.19  일본의 재일동포 북송을 추방이라고 비난.  

 

 3.1  3.1절 기념식에서 일본에 대항한 안전보장이 긴요함을 역설.  

 

 3.25  남북통일을 위한 미국의 결단 촉구.  

 

 3.29  자유진영의 단결을 위해 미국의 강경정책이 필요하다고 미 국민에 호소.  

 

 4.15  미국과 소련의 정상회담이 쓸모없음을 강조.

6.8  제5차 아시아민족반공대회 대표들을 환영하는 시민대회에 반공 메시지 전달.  

 

 6.24  UPI 기자의 서면질문에 북진통일 강조.  

 

 6.25  미국 적십자사에 일본의 재일동포 북송 저지를 요청.  

 

 9.2  국무회의에서 학원잡부금 근절 지시.  

 

 9.10  국제 적십자 부위원장에게 북송은 적십자정신에 위배된다고 강조.  

 

 10.18  민주당 내분은 창피한 일이라고 비판.  

 

 11.11  AP기자 서면질의에 한국을 유도탄기지로 사용하는 아시아동맹의 필요성을 강조.  

 

 12.25  군대 안의 부정부패 근절을 지시.  

1960.1.27  (85세) 정,부통령 선거일을 농번기를 피해 정하도록 발언.  

 

 1.28  건국이후 최초로 사법부 방문.  

 

 2.4  공산당 보다 일본을 더 경계해야한다고 언명.  

 

 2.13  정부통령입후보자 등록 마감, 대통령 후보에 이승만(자유당)과 조병옥(민주당), 부통령 후보에 이기붕(자유당), 장면(민주당), 김준연(통일당), 임영신(여자국민당).  

 

 3.6  기자회견서 연내 참의원 구성 언명.  

3.15  선거에서 대통령 4선 확정.  

 

 3.28  선거부정에 대한 논란이 커지자 자유당 간부들을 불러 민심수습 5개 항목을 지시.  

 

 4.13  마산 시위 배후에 공산당 개입 혐의 있다고 언명.  

 

 4.19  경무대 앞에서 시위 학생들이 경찰의 발포로 많은 사상자를 냄. 육군참모총장 송요찬은 군에게 시위 군중으로부터 경무대를 방어하지 말도록 지시함으로써 군부의 이승만 지지를 거부  

 

 4.21  4.19유혈사태로 정치적 상황이 험악해지자 전직 각료들을 경무대로 불러 상의.  

 

 4.22  변영태와 허정 등을 다시 경무대로 불러 사태수습을 위한 논의.  

 

 4.23  시위진압 경찰의 발포에 따른 시민들의 사망에 대해 애도의 뜻을 발표.  

 

 4.24  4.19유혈사태에 책임을 지고 자유당 총재 사임,  

 4.26  국민이 원한다면 ① 대통령직 사임 ② 정ㆍ부통령선거 재실시 ③ 이기붕의 공직 사퇴 ④ 내각책임제 개헌 등을 약속. 시위대 대표 5명과 면담 후 하야를 약속.  

 

 4.27  대통령직 사임서를 국회에 제출.  

 

 4.28  이화장으로 은퇴.  

 

 5.29  하와이로 출국.  


 1965.7.19  (90세) 호놀룰루 마우나라니 요양원에서 서거, 국립묘지에 안장.